[역사산책] 배달겨레의 오행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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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산책] 배달겨레의 오행사상
  • 이형모 발행인
  • 승인 2015.02.21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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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형모 발행인

  고금을 통해 오행의 구조를 지닌 배달겨레의 문화적 유산으로는 환국의 오훈, 신시의 오가와 오사, 윷놀이, 소도의 오상, 신시배달국으로부터 고구려까지의 다섯 부족 제도, 발해의 오경, 훈민정음의 다섯가지 발음기관(아,설,순,치,후)등이 대표적인 예인데 ‘칠회제신의 력’까지 포함하여 모두 삼신오제의 설에서 비롯된 ‘오제와 오령’의 소산이다.

 

칠회제신의 력

  삼한관경본기에 의하면 칠회제신의 력(七回祭神의 曆)은 신시(배달의나라) 초기에 자부선생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칠회제신이란, 첫 날은 천신(天)에게, 둘째 날은 월신(月)에게, 셋째 날은 수신(水)에게, 넷째 날은 화신(火)에게, 다섯째 날은 목신(木)에게, 여섯째 날은 금신(金)에게, 일곱째 날은 토신(土)에게 제사를 올리던 신시의 풍속이다.

오제와 오령은 오방이 있다.

  BC3897년 환웅 임금께서 신시를 도읍으로 배달의나라를 개천하셨으므로 신시의 풍속이란 배달의나라의 풍속이라는 말이다. 칠회제신 중에 천신과 월신을 제외한 ‘수, 화, 목, 금, 토(물, 불, 나무, 쇠, 흙)’는 ‘땅의 기운’으로 오령(五靈)이라 하는데 이 수-화-목-금-토의 배열순서가 바로 동양철학의 원류이다. 훗날 고조선 초기 단군왕검의 명을 받아 부루태자가 중국의 순임금에게 전수한 ‘치수의 과학’이 바로 오행에 기초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땅의 기운이 오령이면 ‘하늘 기운’은 오제(五帝)라고 하는데 ‘적(赤), 청(靑), 황(黃), 흑(黑), 백(白)’이라고 한다. 태백일사 삼신오제본기에는 “삼신께서 오제를 감독하고 명하여 각각 그 큰 힘을 나타내게 함으로써 만물이 통하게 하시고, 오령을 인도하여 그 조화를 이루도록 함으로써 만물을 기른다.”고 하였다.

  오제와 오령은 오방(五方)이 있다. “북방-흑/물, 남방-적/불, 동방-청/나무, 서방-백/쇠, 중방-황/흙”이 그것이다. 중국은 사방(四方)을 말하나, 한민족의 오행론(五行論)은 배달의나라 이후 지금까지 오방(五方)이고 사방에 더하여 ‘中方’이 있다.

  오제의 주에서 전한다. “오방에 각 사명이 있다. 하늘에 있으면 임금이라 하고 땅에 있으면 대장군이라 한다. 오방을 살펴 감독하는 자를 천하대장군이라 하고, 땅을 살펴 감독하는 자를 지하여장군이라 한다. 용왕현구는 선악을 주관하고, 주작적표는 목숨을 주관하고, 청룡영산은 곡식을 주관하고, 백호병신은 형벌을 주관하며, 황웅여신은 병을 주관한다.”

오방과 중국의 사신도

  위 다섯 동물의 이름에는 오제의 색깔로서 방위를 나타내고 있어 북에는 현구, 남에는 주작, 동에는 청룡, 서에는 백호, 중앙에는 황웅이다. 중국 한나라 전후 발생된 도가에서도 사신도라 하여 비슷한 이름을 쓰고 있는데 우리와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중국의 사신도에서는 ‘북 현무, 남 주작, 동 청룡, 서 백호’로써 하늘의 별자리 28수(宿)를 동서남북의 네 방위에서 지키는 동물이자 장생불사를 목적으로 하는 연금술과 단학의 상징적 용어이다. 북 현무는 거북과 뱀이 합쳐진 형상으로 우리의 ‘현구(거북)’와 다르고, 남 주작은 공작으로 우리의 주작(까치)과 다르다. 그리고 사신도에는 중방의 황웅이 없다.

음양과 오행

  훗날 중국학자들이 그들의 전통사상인 음양과 우리의 오행론을 학문적으로 결합하여 이른바 음양오행설을 지어 내게 된 이후, 음양이건 오행이건 모두 중국에서 비롯된 문화인양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배달겨레의 오행론에는 음양이 포함되어 있지만 중국의 음양론은 본질적으로 오행의 수리와 방위를 포함하지 않은 2분법이라는 것이 요점이다.

  음양론으로 중국에서는 2(음양)와 4(사신도)가 중요하다면, 배달겨레의 오행으로 한민족에게는 1(일신), 3(삼족오), 5(오제, 오령, 오방 & 오가, 오경), 7(칠회제신의 력)등이 모두 중요하다.

  *삼한관경본기와 삼신오제본기는 이맥이 편찬한 ‘태백일사 8권’중에 들어있다. “이맥은 연산군에 의해 괴산으로 유배되었다가 중종 때에 소환되어 1520년에 찬수관이 됨으로써 내각의 수많은 비장서적을 접할 수 있었다. 태백일사는 이 시기에 펴낸 것이다.”

  2015년 2월 19일 설날에  재외동포신문 이형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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