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유력 일간지, 한국계 여성 은행장 성공스토리 다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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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유력 일간지, 한국계 여성 은행장 성공스토리 다뤄
  • 허겸 기자
  • 승인 2015.02.17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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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앤 김 CBB은행장, LA폭동 보며 ‘필요한 건 돈이 아닌 우리만의 목소리’ 절실히 느껴

▲ 미국 일간 LA타임스가 15일 한인 동포여성 은행가 조앤 김(60) 씨의 인생 스토리를 다뤘다.(LA타임스 인터넷판 캡처)

‘최선을 다하고 약속 이상을 돌려준다’ 비즈니스 철학, 조앤 김 CBB은행장 조명
“한인들이 성공하는 모습 보면, 나도 그 일부인 듯 느껴져..이 일 계속하는 이유”

  미국의 유력 일간지가 한인 여성 은행장의 성공 스토리를 다뤄 눈길을 끌고 있다.

  LA타임스는 지난 15일(현지시간) 한국계 여성 동포 은행가 조앤 김(60) 씨의 인생 역정을 소개했다. 신문에 따르면 김 행장은 지난 2011년 4월부터 LA 한인타운에 있는 CBB은행에서 은행장 겸 최고경영자(CEO)로 일해 왔다.

  은행의 자산 규모는 10억 달러를 조금 밑돈다. 소자본 자영업자와 중소기업, 산업자본을 상대로 대출업을 영위한다. 이곳에서 일하기 전에 조앤 김 행장은 윌셔은행에서 최고대출심사책임자(CLO)로 근무하기도 했다.

  부모는 전란에 피난온 이북5도민이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남한으로 피난을 왔다. 김 행장의 부모는 비교적 어려서 결혼했다. 혼인 당시 어머니는 18세였다.

  김 행장은 서울에서 자랐다. 셋째인 그녀는 다섯 형제 중에서 가장 고집이 셌다. 부모의 관심을 받기 위해서였다.

  전직 경찰관인 아버지는 작은 사업체를, 어머니는 잡화점을 각각 운영했다. 자식 교육을 위해 100% 자신들을 희생한 부모로 김 행장은 기억하고 있다.

  크리스찬인 어머니는 매우 엄하게 자식들을 가르쳤고 매를 드는 때도 있었다. 엄한 교육 때문에 김 행장은 20년 간 주일학교 교사로 사역했는지도 모른다고 LA타임스는 전했다.

  조앤 김 행장은 외교관을 꿈꿨다. 고려대 정외과에 진학하려 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부모는 등록금을 대지 않겠다며 뜯어말렸다. 교사, 간호사, 비서 이외엔 여자에게 (사회생활의)기회가 흔치 않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고집을 꺾지 않으며 부모와 갈등을 빚던 김 행장은 결국 영문학을 전공하게 됐다. 셰익스피어를 전공하며 역사학을 부전공하는 것으로 절충했다.

  김 행장은 한국의 사회적 관습의 벽을 넘고 싶었다. 그래서 외국에서 생활하길 바랐다. 남편이 미국으로 가자고 제안했을 때 망설임 없이 캘리포니아행을 결심했다. 그녀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고 했다.

  1978년 김 행장은 처음으로 LA 땅을 밟았다. 이민 온 지 한 달이 채 안된 시점에 일자리가 필요하다고 느끼게 된 그녀는 어느 한국 자본 은행의 대출부서에서 일할 기회를 얻었다. 공부하는 남편을 대신해 취업 전선에 뛰어든 것이다.

  3개월 만에 그녀는 파이낸스 담당 임원의 비서(executive secretary)로 승진했다. 그러나 시련도 찾아왔다. 전근대적 사고방식을 지녔던 임원은 영어구사력이 뒤떨어지고 파이낸스 지식이 부족하다며 김 행장을 한 달 동안이나 상대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김 행장은 날마다 도전하는 기분이 들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미국에서)경험이 전무했기 때문에 초라함을 느꼈어요. 남들과 같아지기 위해 배 이상 노력을 기울여야 했어요.”

  조앤 김 행장은 남성 중심의 풍토가 강한 금융업계에서 여성 은행원으로 명성을 쌓는 것이 힘들었다고 했다. 그녀는 “금융가의 룰은 어떤 것이든 남자들이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직장 내 성희롱 방지 사규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이른바 마티니 런치에 착석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마티니 런치는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며 흥청망청 마음껏 요란하게 떠드는 백인 문화의 일종이다. 음담패설이 오가기도 한다. 이런 자리에 유일한 아시아 여성으로 끼어드는 일이 여간 곤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김 행장은 마치 남성 동료들의 농담을 이해하는 것처럼 행동했고 성적 농담은 듣지 않으려 애썼다고 했다.

  “가끔은 정말 큰 상처가 되기도 했어요. 그럴 때마다 (참기 위해)입술을 깨물어야 한다는 걸 배우게 됐죠.”

  그녀는 빠르고 효율적으로 일처리 하는 은행원이 되는 일에 더욱 매진하며 실력을 겸비했다.

▲ ‘필요한 건 돈이 아니라 우리의 목소리’ LA타임스에 소개된 당찬 한인 여성은행장 조앤 김(60) 씨의 성공 스토리.(LA타임스 캡처)
  조앤 김 행장이 미드시티은행의 부행장으로 있던 1992년 은행 인근에서 LA 폭동이 발발했다. 은행은 오전 11시에 문을 닫았다. 임직원들에겐 한인타운 중심가에 자리한 버몬트 애비뉴에서 빨리 벗어나도록 소개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그녀는 곧장 차를 몰고 폭동 발생지역으로 내달렸다. 이윽고 눈앞에 펼쳐진 장면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한국 전쟁 이후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을 것처럼 느껴졌다. 그날 집으로 돌아온 김 행장은 TV를 보며 눈물을 떨궜다.

  그때만 해도 동포사회는 한국계 정치인이 많지 않아 정치력이 미약할 때였다. 한인 동포들은 공정하지 못한 언론 보도가 나와도 어찌할 도리가 없어 분루를 삼켜야만 했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김 행장은 “돈을 갖거나 금전적으로 성공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아니었다. 우리(동포사회)는 목소리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날부터 김 행장은 정치 이슈에 틈틈이 관심을 보이고 참여해왔다고 신문은 전했다.

  김 행장은 업무적으로 후회해본 적은 없다. 다만 자녀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냈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했다.

  김 행장의 딸(33)은 경마 트레이너이고 아들(32)은 주한미군 군의관이다. 모두 김 행장과 떨어져 지낸다. 김 행장만 덩그러니 노스브릿지에 혼자 살고 있다.

  그래도 그녀에겐 자신만의 삶이 있다. 1987년부터 자칭 밸리걸로서 살아왔다고 했다. 그녀는 핏빗(Fitbit) 피트니스 트래커를 착용하고 산에 오르고 여행을 떠나는 애호가이다. 올해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2주간 휴가를 떠나기 전까지는 몸만들기에도 열중했다.

  “(고객에게)최선을 다하고 약속한 것 이상을 돌려줍니다.”

  김 행장이 지녀왔던 비즈니스 철학이다. 그녀는 7년 간 윌셔은행에서 최고대출심사책임자로 일했고 3년은 최고경영자로서 자리를 지켰다. 그녀는 불황에도 불구하고 2000년 2억4000만 달러였던 자산을 꾸준히 불려 CEO 첫 임기가 끝났던 2011년까지 34억 달러로 자산 규모를 키웠다.

  은행 임원인 그녀에겐 능수능란한 외교적 수완과 인맥 친화적인 자세가 필요할 것 같다. 그러나 김 행장은 도리어 “나는 (인맥 유지를)잘 하지 못한 편”이라고 말했다.

  “승진을 하려면 업무 경험이 정말 중요하겠지만 (실상은)대인관계 기술이 더 중요합니다.”

  김 행장은 지역 기반형 영세은행에서 식료품 가게와 세탁소에 5000달러를 융자해주는 일로 커리어를 시작했다. 그때만 해도 한인타운은 한식당이 몇 군데 있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금은 한인타운의 절반이 한식당으로 꽉 들어차 있다.

  그 사이 김 행장이 대출한 액수만도 수천만 달러에 달한다. “한인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봅니다. 성공하는 모습도 보게 되죠. 그러면서 제가 그(성공)들의 일부라는 점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이 일을 계속하게 되는 것 같아요.”

  허겸 기자 khur@dongponews.net
               kyoumhu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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