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로 깨닫다>썩히다와 삭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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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로 깨닫다>썩히다와 삭히다
  • 조현용 교수
  • 승인 2015.01.26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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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현용(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우리말에는 모음의 교체에 의해 의미가 분화되는 예들이 많다. 이를 모음교체에 의한 어사분화라고 한다. 모음이 바뀜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기는 하지만 원래 의미에서 완전히 동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공통점은 유지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많은 경우에 어사분화는 의미의 강하고 약한 정도를 보여준다. 의성어와 의태어가 대표적인 예이다. 큰 소리와 작은 소리, 큰 모양과 작은 모양을 모음으로 나누어 보여주는 것이다. 주로 밝은 모음은 가볍고 작은 느낌을 주고, 어두운 모음은 무겁고 큰 느낌을 준다. ‘찰랑, 철렁, 출렁’의 느낌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또한 모음의 교체가 사람인지 아닌지를 가르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앉다와 얹다’, ‘머리와 마리’의 경우가 대표적인 예다.

  어휘에 대한 느낌이 긍정적인지 아닌지도 모음의 교체에 의해서 알 수 있다. ‘쓰레기와 시래기’를 모음교체로 보는 입장도 있는데 이럴 경우에도 모음교체는 뉘앙스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쓸모없는 것과 새로운 용도로 쓰인다는 의미가 갈라진다. 우리말에서 이런 뉘앙스의 느낌을 정확히 보여주는 예가 바로 ‘썩히다’와 ‘삭히다’이다. 썩은 것은 사용할 수 없는 것이라는 의미가 되지만 삭히는 것은 새로운 탄생을 보여주는 예이기 때문이다. 한자어로 설명하자면 썩는 것은 ‘부패(腐敗)’가 되고 삭는 것은 ‘발효(醱酵)’가 된다.
 
  단순히 모음의 교체가 일어난 어휘처럼 보이지만 의미가 피어나는 상황은 정반대다. 오래되어 썩는 것에는 사람의 관심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 한 곳에 모이고 오래 두면 그저 썩어서 사용할 방법이 없다. 물론 뒷날 거름이 되어 새 생명에 뿌리가 되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삭히는 것에는 사람의 관심이 필요하다. 단순히 오래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의미’를 가질 수는 없다. 관심에서 새로운 탄생이 일어난다.
 
  우리나라 음식 중에는 이렇게 삭히는 것들이 많다. 오래 두어 발효시키는 음식이 많은 것이다. 김치가 그러하고 젓갈이 그러하다. 홍어회의 경우에는 삭히는 정도가 상상을 초월하기도 한다. 아마 세계에서 이렇게 삭힌 음식이 발달한 나라도 많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썩는 것과 삭는 것의 차이를 잘 알고 활용한 민족이다. 삭히는 것의 미학을 한국에서는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최근 아내의 권유로 한 권의 책을 읽게 되었다. ‘시골 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와타나베 이타루 저)’라는 책인데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눈에 들어온 부분은 ‘발효와 부패’에 관한 이야기였다. 저자는 ‘다루마리’라는 시골빵집에서 좋은 빵을 만들기 위해서 천연균으로 빵을 만들고 있다. 그런데 유기 작물에 균을 배양했을 때는 썩어버리던 것이 자연 작물에서는 발효가 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즉 스스로 강한 자는 균이 들어왔을 때 발효가 되어 세상에 쓸모 있게 되고, 외부의 도움으로 강해진 자는 균이 들어왔을 때 부패하게 되는 것을 알게 되는 장면이다.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우리말 ‘썩다’와 ‘삭다’의 분화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았다.
 
  세상을 좋은 방향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 그러면 외부의 자극을 받아도 삭힌 음식이 되고 오히려 사람들의 건강을 좋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주변의 도움으로 그저 겉으로만 번지르르한 경우에는 외부의 고난이 닥쳤을 때 스스로도 지키지 못하여 썩고 만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우리는 스스로 강해지지는 못하는 듯하다. 지나친 보호 속에서 자라고 있지는 않은지 걱정이다.
 
  자신의 재능을 약한 마음속에서 썩히지 말라. 스스로 강해진다면 세상의 어떤 험한 자극이 와도 자신의 능력을 더욱 삭혀서 세상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말 썩는 것과 삭히는 것이 보여주는 세상을 기억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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