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산책] 탕평군주와 ‘민국(民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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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산책] 탕평군주와 ‘민국(民國)’
  • 이형모 발행인
  • 승인 2015.01.13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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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형모 발행인

이 글은 이태진 교수의 저서 '동경대생들에게 들려준 한국사'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영조와 정조는 붕당을 혁파하기 위하여 탕평책을 시행했습니다. 그런데 내적인 문제에서 이 시기의 조선 군주들은 절대왕권을 주장합니다. 그 절대권의 주장과 확립은 무력적인 방법보다도 유교적인 수기치인(修己治人)을 내세우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절대왕권의 근거와 명분

  이 점은 같은 시기 유럽의 계몽군주의 절대권 주장에서도 나타났던 것이어서 흥미롭습니다. 유럽의 계몽절대군주들이 누구보다도 훌륭한 인격과 학식을 절대군주권의 근거로 내세우듯이 조선의 군주들도 수기치인에서 가장 완성도가 높은 경지에 이르는 것으로서 군주절대권 발휘의 근거로 삼고자 했습니다. 이것은 청조의 강희(康熙), 옹정(擁正), 건륭(乾隆)의 3제도 유사합니다.

  이 시대의 조선 군주들은 자신이 일생 동안 쓴 글을 모아서 문집을 편찬합니다. 문집이라는 것은 지금까지 사대부들만 가지던 것이었는데, 군주 자신이 재임 중에 편찬하는 새로운 현상을 보입니다. 영조 같은 사람은 자신이 조선의 요·순(堯舜)이라고 자칭하기까지 합니다.

  절대권은 소민(小民)보호에서 명분을 찾고 있었습니다. 지배신분층인 대민(大民)들의 싸움 속에 소민들이 희생되고 있으니, 이들을 보호하는 것이 왕의 임무라고 주장하면서 지금까지 공인된 사대부들의 붕당을 혁파하겠다고 나서기까지 합니다. 탕평(蕩平)이라는 말은 요순시대의 왕정이 잘 이루어진 상태에 대한 수식적인 표현인데, 조선의 군주들은 붕당을 혁파한 상태에서 왕의 직접 정치가 이루어지는 경지를 추구하면서 이 표현을 즐겨 썼습니다.

   ‘민국’과 ‘국가’ 
 
  이 시대 군주들은 민국(民國)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합니다. 나중에는 신하들도 씁니다만, ‘대한민국’의 ‘민국’ 바로 그 글자입니다. 내용적으로는 ‘나라의 주인은 민과 왕’이라는 뜻입니다. 일본 메이지시대 때 서양의 말을, 특히 영어를 많이 번역하지 않았습니까? 그때, ‘nation, state' 같은 말을 ’국가‘로 번역했지요. 그런데 이 국가라는 말은 저 고대서부터 유교에서 쭉 사용해온 말입니다. 이 말을 따져보면, 왕가나 귀족가들이 나라의 기둥이라는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민국이라는 표현에서는 가(家)가 없어지고 대신 민(民)자가 들어갔습니다. 저는 이것이 근세 유교사상이 일으킨 변화 중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라고 평가합니다.

  이러한 사상적인 변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정조(正祖)대왕(1776~1800)이 남긴 「만천명월주인옹자서(萬川明月主人翁自序)」라는 글입니다. 이 글은 군주와 백성의 관계를 만천(萬川)과 명월(明月)에 비유했습니다. 밤하늘의 밝은 달이 모든 하천에 하나씩 담기는 것과 같은 관계가 곧 백성과 군주의 관계라는 뜻을 담은 글입니다.

  정조는 명월을 직접 ‘태극(太極)이요 군주인 나’라고 갈파했습니다. 이것은 군민일체론(君民一體論), 백성군주분신론(百姓君主分身論)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의식세계입니다. 이러한 정치사상의 변화는 물론 왕의 생각이 갑자기 그렇게 바뀐 것이 아니라 사회가 그렇게 달라지고 있었던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선비들에서 백성까지로 유교윤리 확장

  조선은 유교국가요, 유교에 의해서 모든 사회질서를 유지해 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민 곧 자기 백성에 대한 인식이 바뀌면서 유교윤리의 실행주체도 양반사족에서 서민으로 바뀌는 인식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5세기에 유교윤리를 보급할 목적에서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라는 책을 만들어 보급했습니다. 이것은 군신과 가족의 관계를 밝힌 것입니다. 16세기에 사림사회가 발달하면서 송나라에서 시작된 이륜(二倫)사상을 받아들여 「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라는 것을 만들어 보급하기도 했습니다. 이륜은 아시듯이, 붕우(朋友)와 장유(長幼)의 관계인데, 이것은 선비들, 곧 사족들이 자기들끼리의 윤리관계 지침을 밝힌 것입니다.

  18세기 말, 정조는 이 두 가지를 합쳐서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를 만들어 보급하면서 사족들뿐만이 아니라 서민의 윤리, 즉 사서(士庶)의 윤리로 실행될 것을 기대했습니다. 말하자면, 유교윤리를 통해 국가질서·사회질서가 잡히는 세계를 그리면서 백성들의 능동성을 촉구하는 뜻을 담은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태진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 전 국사편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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