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산책] 고조선의 경제적 토대를 완성한 부루단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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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산책] 고조선의 경제적 토대를 완성한 부루단군
  • 이형모 발행인
  • 승인 2014.12.30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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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형모 발행인

오행치수의 법

 

고조선의 1세 단군왕검께서는 신시의 제도와 이념을 되살려 백성을 가르쳐서 ‘국민통합’을 이룩하고 나라의 기초를 세우셨다. 그의 아들이신 2세 ‘부루 단군’의 치적은 무엇일까? 이암 선생이 고려 공민왕 치세에 편찬한 ‘단군세기’의 기록들을 살펴본다.

1세 단군왕검의 치세에 ‘부루 태자’는 치수와 농업에 탁월한 전문성을 발휘했다. 중국 요 임금이 70년 치세의 마지막 9년 동안 ‘대홍수’를 다스리지 못하고 퇴위한다. 뒤를 이어 즉위한 ‘순 임금’은 동이족 사람으로 단군왕검에게 사람을 보내어 ‘즉위신고’를 하고, 계속되는 대홍수를 다스릴 ‘치수 방책’을 가르쳐 주기를 간청한다.

단군왕검께서 회답하시기를 “내 나이가 이미 104세라 먼 길을 가서 치수법을 지도하는 것이 어렵다. 부루 태자가 이미 치수의 대가가 되었으니 그에게 치수의 도리를 배우도록 하라.” 때는 갑술67년(BC2267년), 단군께서 태자 부루를 파견하여 양자강 유역 ‘도산’에서 순 임금의 치수담당 ‘우 사공’을 만나도록 하였는데 부루 태자께서는 ‘오행치수의 법’을 전수해 주었다.

순 임금은 치수에 성공하여 역사에서 길이길이 ‘요순시대’의 칭송을 듣게 되었다. 한편 오행치수의 법을 전수받은 ‘우 사공’은 순 임금의 치세가 끝난 후에 중국의 역사시대를 개막하는 ‘하’ 왕조를 건국한다.

농업과 관개시설

2세 부루 단군은 즉위 원년(BC2240년)에 “재물을 비축하여 크게 풍부하였고 백성과 더불어 산업을 관리하셨으므로 한 사람도 배고픔과 추위에 떠는 자가 없었다.” 백성을 가르쳐 농업을 일으키고 풍년에 재물을 비축하는 제도를 시행한 것이다.

“여러 왕(汗)들의 잘잘못을 살피시고 상벌을 신중히 하였으며 도랑을 파기도 하고 고치기도 하며 농사짓고 뽕나무 심을 것을 권장하였다. 기숙사를 설치하여 학문을 일으키니 문화가 크게 발전하여 칭송하는 소리가 날마다 높아갔다.”

도량형 표준화

계묘 3년(BC2238년), “9월에 조칙을 내려 백성들의 머리를 덮은 머리카락을 땋도록 하고 푸른 옷을 입게 하였다. 됫박과 저울을 관청에서 표준을 갖추도록 하였다. 베와 모시의 시장 가격도 서로 다른 곳이 없고 백성들이 스스로 속이지 않으니 어디서나 두루 편리하였다.”

농경지 구획정리

경술 10년(BC2231년), “4월에 밭을 나누고 밭문서를 만들어서 백성들로 하여금 사사로운 이익을 구하지 않도록 하였다.”

부루단지

무술 58년(BC2183년), “부루 단군께서 돌아가셨는데 이날 일식이 있었다. 뒤에 나라사람들이 제사를 갖추었는데 집안에 터를 잡아 제단을 설치하고 토기에 쌀과 곡식을 채워 단 위에 놓고 '부루단지'라 일컬었다.”

부루단군께서는 조상 전래의 ‘오행치수의 법’을 전수받아 치수, 관개, 농경지 구획정리, 도량형 표준화와 공정거래, 풍년에 재물비축제도 등등을 시행하여 ‘농업혁명’을 성취하였다. 의복을 개량하고 머리를 땋게 하여 청결한 위생관리를 가르쳤다.

농업생산 기술혁신을 이루고, 기반시설과 제도를 완비하고, 유통을 원활하게 하였다. 이렇듯 국가경제를 일으켜서 고조선이 1908년 간 이어갈 수 있는 경제적 토대를 쌓으신 것이다. 지금까지도 우리네 부엌에는 조상 전래의 오래된 기억으로 ‘부루단지’가 놓여 있어서, 치수와 농업의 대가로서 부루단군의 크신 업적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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