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산책] 북부여와 고구려의 특별한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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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산책] 북부여와 고구려의 특별한 관계
  • 이형모 발행인
  • 승인 2014.12.18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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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형모 발행인

해모수와 고주몽

 

만주 땅 ‘집안’에 가면 광개토태왕릉비가 있다. 지금으로부터 1600년 전에 아들 장수왕이 광개토태왕의 치적을 추모하는 비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옛일을 생각하건대 시조 추모왕께서 나라를 여시었다. 북부여 황손의 혈통으로서 하백의 따님이신 어머니가 잉태하여 세상에 나시니 성스러운 덕을 지니셨다.”

추모왕은 고구려를 창건한 고주몽이다. ‘북부여 황손의 혈통’이란 고주몽이 북부여를 창건한 ‘해모수단군’의 둘째아들 고구려후 ‘고진’의 증손자로서 북부여의 법통을 계승했다는 것이다.

해모수의 역사적 중요성은 무엇일까? 단군조선(1908년간) 치세를 이어받은 대부여(188년간)는 중국 연나라와 ‘80년 전쟁’을 치르느라 국력이 피폐해졌다. 쇠약해진 연나라도 진시황과 7년 전쟁 끝에 무너져 중국은 통일제국이 되었다.

무기력해진 대부여를 대신해서 일어난 북부여의 해모수단군(BC239-BC195)은 진시황의 통일(BC221)과 진왕조의 멸망(BC207) 그리고 한고조 유방이 통일국가를 장악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격변기에 나라를 지킨 큰 임금이다. 북부여 181년 치세는 한민족의 고대역사(단군조선과 대부여)와 고구려로 시작되는 ‘한반도 역사시대’를 잇는 과도기를 지켜냈다.

고주몽의 아버지 ‘불리지(고모수)’와 하백의 따님이신 어머니 ‘유화부인’의 연애사건은 태백일사 고구려국 본기 앞부분에 기록되어 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고주몽은 해모수의 아들'로 사실과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고주몽은 졸본에서 북부여로 남하하여 6대 고무서단군의 사위가 되어 북부여를 계승했다.

해모수와 광개토태왕

광개토태왕은 고구려 19대왕이고, 비문에는 ‘17세손’이라고 적혀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13세손’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실제로 추모왕으로부터 13세손이 맞다. 그렇다면 비석에는 왜 ‘17세손’으로 기록했을까? 해모수단군으로부터 고추모대왕 이전까지 4세대를 포함해야 하는 것이다. 왜 그렇게 기록해야 했을까?

통일신라시대 승려 안함로가 편찬한 ‘삼성기전 상편’ 끝부분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계해(BC58)년에 이르러 봄철 정월에 역시 천제의 아들인 고추모가 북부여를 이어 일어났다. 단군의 옛 법을 되찾고 해모수를 제사하여 태조로 삼고 처음으로 연호를 정하여 다물이라 하니 바로 고구려의 시조이다.”

고추모대왕은 고구려를 창건하면서, 자신의 ‘고조부’ 북부여 해모수단군을 ‘태조’로 모심으로 고구려 역사의 출발점을 삼은 것이다. 이러한 역사인식은 그대로 후대에 이어져 광개토태왕이 해모수단군의 ‘17세손’으로 비석에 기록된 것이다.

당 고종의 고구려 역사인식

다른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 당 태종의 40만 대군을 물리친 연개소문이 죽고 나서 보장왕 27년(AD668년)에 나당연합군이 고구려를 침공해 왔는데 이때 당나라의 사령관은 80세의 이적이었다. 그는 당 태종(이세민)이 고구려를 침공해 왔을 때 수행해서 패전경험을 가진 장수로서 고구려 사정에 밝은 자이다. 본명은 ‘송세적’인데 당 태종이 ‘이’씨 성을 하사해서 ‘이세적’으로 바꿨다가 다시 ‘이적’으로 바꿨다.

당시의 전쟁 상황을 당나라 고종에게 보고한 시어사 ‘가언충’은 말하기를 “고려비기 라는 책에 <고구려가 창건 9백년이 채 못 되어 80 먹은 대장에게 멸망될 것이라>고 했는데 고구려가 한나라 때부터 건국하여 지금(AD668년)이 꼭 9백년 되는 해이고 이적 장군이 마침 80세입니다. 그러니 <고려비기>의 예언과도 일치하니 이번에는 고구려가 꼭 망합니다.”

AD668년으로부터 9백년 전이면 BC232년이다. 그 해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해모수가 북부여를 창건한 것은 BC239년이고, 그 다음해에 고조선을 이은 대부여의 마지막 단군인 ‘고열가’가 퇴위한 후, 대부여는 6년 동안 오가의 장관들이 '공화' 통치했다.

해모수는 오가의 장관들을 설득해서 대부여의 ‘공화정치’를 해체하고 그들의 추대를 받아 BC232년에 정식으로 ‘북부여의 단군’으로 즉위했다. 당 고종과 그의 신하 가언충도 ‘해모수단군의 즉위년을 고구려 역사의 원년으로 본 것이다.’

역사는 사실과 더불어 그 시대를 살았던 인물들의 역사인식과 기록이 모두 중요하다. 삼국역사의 뿌리가 되는 고구려 역사의 출발을 기록함에 있어, 고추모대왕이나 광개토태왕 그리고 당나라 고종의 고구려 역사인식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안타깝다. 더구나 고주몽이 해모수의 아들이라고 기록한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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