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률칼럼> 아프리카 난민, 대한민국 국민이 되다…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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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칼럼> 아프리카 난민, 대한민국 국민이 되다…①
  • 차규근 변호사
  • 승인 2014.12.04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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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규근 변호사(법무법인 공존)

“귀하는 국적법 규정에 의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자격이 인정되었기에 귀하에게 대한민국 국적을 부여합니다.”

2010년 3월 19일 처음으로 난민 출신 한국인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귀화증서를 손에 쥔 씨쎄(가명)의 머리 속으로 지나 간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씨쎄의 집안은 본국 에티오피아에서 매우 부유한 편이었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는 땅을 많이 가진 지주로서 상류층에 속했다. 그러나 1973년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면서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씨쎄가 태어난 다음 해였다. 사회주의 정권이 아버지의 재산과 토지를 강제로 몰수하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어려움 속에서도 아버지는 5남 1녀의 자식들의 교육을 소홀히 하지 않았고 자식들을 은행원, 초등학교 교사 등으로 잘 키워냈다. 씨쎄는 5남 1녀 중 막내로 형들과 누나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자랐다.
 
에티오피아는 80여 개의 다양한 부족으로 구성되어 있고 제각각의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정부의 독재에 단합하여 대항하기가 힘든 실정이다. 에티오피아 독재 정부는 이를 부당하게 악용하여 국민의 재산을 빼앗고 야당과 학생들의 민주주의 활동을 탄압하고 소수 종족만을 우대하는 차별정책을 시행하고 있었다. 씨쎄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에도 대학생들의 반정부시위가 활발하였다.
 
씨쎄는 에티오피아에서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중학교 교사를 하던 중 화학을 전공하고자 다시 아디스아바바국립대학 화학과에 입학하였다. 아디스아바바국립대학은 에티오피아 제1의 대학이다. 한 마디로 출세와 성공이 보장되는 길이었다. 씨쎄는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과 개인적 성공에 대한 욕망 사이에서 고민과 갈등을 거듭하였다. 눈 딱 감고 현실을 외면하면 에티오피아에서 크게 어려움 없이 편하게 생활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같이 공부하던 친구들이 하나씩 하나씩 곁을 떠나고 죽거나 실종되거나 하는 것을 보면서 도서관과 실험실 안에서만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다. 씨쎄는 출세와 명예를 뒤로 한 채 민주주의를 위한 걸음을 떼기로 결심하였다. 야당인 에티오피아 민주당에 가입하였고 반정부 시위에도 적극적으로 참가하였다.
 
반정부시위가 격화되던 2001년 4월 대학생들과 시민 등 천여 명이 아디스아바바대학 내에서 시위할 때 경찰과 군인들이 학내로 진압하여 시위학생들을 체포했으나, 씨쎄는 당시 대학을 다니면서 대학교 조교로 근무하고 있어서 체포를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위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비밀정보원이 집으로 전화해 살해위협을 하는 등 신변이 불안하여 친구 집에 숨어서 한 달 정도를 숨어 지냈다.
 
씨쎄가 친구 집에 숨어 있는 동안에도 계속 자신의 집으로 협박전화가 걸려온다는 가족들의 말을 듣고 더 이상 에티오피아에 있기가 어려워졌다. 평소에 잘 알고 있던 선교사의 도움으로 어학연수 비자를 발급받아 2001년 8월 한국으로 도피하였다. 그 후 국내 모대학교 어학당 기숙사에 생활하며 한국어를 배웠다. 기숙사에는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친구들이 많은 것을 알려주고 도움을 주었다. 친구들의 도움으로 외로움도 덜 수 있었고 적응도 쉽게 할 수 있었다. 한국 학생들도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한국은 인종차별이 없는 순수한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것도 없이 몸만 피한 곳이었지만 한국이 자신의 제2의 ‘고향’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한편, 씨쎄가 한국에 입국한 후에도 고국에서는 비밀정보원이 자신을 계속 찾고 있다는 소식을 가족들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에티오피아에는 돌아갈 길이 없었고, 안전이 보장되고 신념대로 복종 없이 살 수 있는 한국에서의 생활이 너무 행복했다. 식민통치를 받았으면서도 이를 극복하고 세계적 경제 대국으로 성장한 나라! 아무런 자원이 없으면서도 근면과 성실로 경제 기적을 이루어 낸 나라! 민주주의를 이룩한 나라! 씨쎄의 눈에는 한국이야말로 자신이 이상향으로 생각하던 그런 나라였다.
 
그러던 중, 씨쎄는 학교 내 기숙사에 있는 TV를 통해 한국에 난민 제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난민 신청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되었다. 2002년 7월 유엔난민기구(UNHCR)의 연락처를 알게 되어 상담을 받고, UNHCR 직원의 안내로 2002년 9월 출입국관리사무소의 문을 두드렸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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