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마음 하나 지니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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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마음 하나 지니는 일
  • 재외동포신문
  • 승인 2014.11.17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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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겨울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시드니 공항을 이륙한 뒤 한동안 구름만 두텁게 보여 어느 상공을 지나치고 있는지 가늠할 길이 없었다. 첫 번째 기내식을 먹으며 호주 대륙을 통과해 대서양 어디쯤에 떠있다고 생각할 때였다. 안과 밖의 오리무중 속에 아이의 울음소리만이 확실하게 들려왔다. 저 아이의 울음은 언제쯤 끝날까.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조금 전 마신 레드와인의 취기를 빌어 아이의 볼을 한 번 꼬집어 주고도 싶었다. 바로 뒷자리에 앉아 벌써 두어 시간 째 칭얼거리고 떼를 쓰다가 가끔은 화들짝 놀랄 만큼 소리를 지른다.

그러나 울음소리는 아이의 탓만은 아닐 것이다. 세 살 남짓 되었을까, 서양인 남편과 동양인 아내 사이에서 태어난 연갈색 눈동자의 노랑머리 어린 아이는 흔히 동양 엄마들이 그러듯 머리가 고무줄로 바싹 당겨 올려 있었다. 묶은 머리 탓에 치켜 올라간 눈을 보면서 저렇게 하면 머리끝이 아플텐데…. 아이의 울음이 머리묶음 탓은 아닐 텐데 불현듯 어릴 때 경험이 떠올랐다. 어린 시절 나는 머리를 감으면 세숫대야에 검은 머리카락이 한 가득이었다. 린스도 없던 시절 잘 빗겨지지 않는 머리를 가지런히 다듬느라 머리끝이 쭈뼛거리고,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혼이 난 뒤에야 정수리에 말총 같은 머리묶음이 올라붙었다. 엄마 욕심에 곱게 참빗으로 빗어 넘기는 날은 머리카락이 한 주먹 쯤 빠지고서야 단장이 끝났다. 엄마는 꽁꽁 묶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늘 그러셨다.

“넌 머리를 올려야 이뻐야” 저 세 살 박이 아이의 칭얼거림 끝에 지난 날 엄마의 젊은 목소리가 아련하게 따라왔다. 언젠가 스무 살 먹은 조카가 호르몬 과다분비로 피부과를 다니던 때였다. 목둘레와 등의 엄지만 한 피지덩어리를 본 의사 말이 “장가를 빨리 보내야겠어요” 였단다. 그 말을 들은 애들 고모부가 “부럽다 저 나이” 했다더니 세 살 박이를 보며 엄마를 떠올리기도 하고 이제 나로서는 영 돌아갈 수 없는 저 아이의 막무가내 시절이 부럽기도 했다. 그런 소란 속에 엄마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엄마는 4년째 요양원에 누워 계신다. 점점 물기가 마르고 11월 스러진 낙엽 한 장 같은 엄마의 피부를 내려 보다 난 한동안 그저 창밖을 내다 볼 뿐이었다. 악성건조로 껍질이 하얗게 일어나고 긁지 못하게 묶어놓은 팔목 때문에 칫솔질을 제대로 못해 잇몸이 다 부었다고 한다. 엄마를 핑계로 나선 여행길이 정작 엄마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길이란 것도 모르는 바 아니다. 위로는커녕 엄마 곁을 빙빙 돌다가 죄스런 마음을 그대로 싸가지고 돌아오기 일쑤였다.

모니터로 보이는 항로가 케언즈를 지나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밥을 먹고 화장실을 다녀오고 아이의 칭얼거리는 소리를 견디다 못해 맨 뒤 빈자리로 피난을 간 동안에도 비행기는 아직 호주 공해상을 벗어나지 못했나보다. 하늘의 시간이란 것이 땅을 딛고 사는 시간보다 한참은 더디 흐르는 것만 같았다. 촘촘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레드 와인 한 잔을 더 부탁했다. 언제부턴가 한 잔의 와인은 술이 아니라 커피와 같은 피로회복제가 되었다. 포도가 지천에 넘칠 때가 되면 엄마는 단내가 진동 하는 새까만 포도송이를 골라 술을 담그셨다. 한 알씩 일일이 뜯어 소쿠리에 받쳐 씻을 때 엄마의 얼굴은 이미 발그레한 빛으로 풀어지곤 했다. 이럴 땐 무슨 말을 해도 야단맞을 것 같지 않아 감추고 있던 뭔가를 고백하고 싶은 충동에 쌓이곤 했다.

하나씩 주워 먹을 때마다 “다냐?” 하고 물으시면 약간 코 먹은 소리로 “어” 하고 엄마 턱 밑에 앉아 오랜만에 달콤한 분위기를 나누던 생각이 난다. 아무래도 자주 지방에 가시는 아버지를 기다리는 두 모녀가 서로 필요할 때만 결탁하는 어떤 외로움 같은 것이 녹아났는지도 모른다. 전화가 귀하던 시절, 지방에 살던 우리 집에는 까만색 전화기 한 대가 있었다. 한손으로 전화기를 붙들고 다른 손으로 손잡이를 몇 바퀴 힘주어 돌리면 교환원이 나와 수신자 번호로 연결해주었는데 엄마는 가끔 전화교환원과 말다툼을 했다. 들어보면 별 것도 아닌데 퉁명스럽다는 것이 엄마의 불만이었다, 때때로 엄마의 벌통 같은 욕 한마디가 떨어지고 수화기를 꽝 내려놓으면 득달같이 전화벨소리가 다시 울린다. 억울하다 생각한 교환원이 말꼬리를 물고 다시 걸어온 것이다.

몇 마디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숨이 턱에 차도록 목소리가 높아지던 어느 날, 퇴근시간에 한 아가씨가 눈에 불을 켜고 우리 집을 찾아왔다. 약이 잔뜩 오른 얼굴로 엄마에게 얼굴을 들이밀자 엄마는 왠지 금세 목소리가 가라앉으며 오히려 차분해졌다. 그리곤 흥분한 아가씨를 방에 앉히고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셨다. 난 하릴없이 너덜거리던 벽지 한쪽을 붙여보려고 풀도 없이 손가락으로 몇 번이고 눌러보았다. 내일 학교에 가져갈 준비물은 없나 책가방 정리를 하고 있을 때 화가 풀린 아가씨는 몸을 일으키고 엄마는 아가씨 등짝을 토닥토닥 두드리시다가 화들짝 생각난 것처럼 김치 한 보시기를 가져가라 한다.

손사래 치는 아가씨에게 기어이 노란 양푼에 김치 두어 포기를 담아서 분홍색 보자기에 싸 건넸다. 나중에 언제든 생각나면 그릇을 갖다달라고 대문까지 따라나선다. 정다운 자매지간처럼 챙겨주고 돌아서는 순간 곧 다시 쓸쓸해진 엄마 모습은 늦가을 감나무 꼭대기에 남아있는 까치밥 같기도 하고 미루나무 꼭대기에 걸려있는 빈 둥지 같기도 해서 말도 못 붙이고 나는 괜히 숙제하는 척만 했다. 그것도 아버지의 잦은 부재 탓이었을 것이다. 엄마의 고향은 아버지였을까.

열 시간의 비행이란 어느 때는 즐거운 소풍 같고 어느 때는 견디기 어려운 고행의 시간이다. 짧으면 짧고 길면 길다고 할 뭔가와 같다. 배처럼 하늘바다를 항해하는 비행기 속에서 나는 발목이 출렁거려 슬며시 멀미가 일었다. 여승무원에게 물 한 잔 더 부탁했다. 벌써 네 잔째다. 무거운 너울이 겹겹이 차오르는 꿈길 속에 꾸벅꾸벅 졸다가 깨면 책을 읽든지 물을 마시든지 아니면 모니터를 켜서 얼른 소통의 끈을 쥐었다. 앞좌석에 붙어있는 작은 화면에는 오래된 베트남 전쟁영화가 한창이다. 억지로 남의 고향을 빼앗아가면서 일으킨 저 전쟁은 이 시대에 무엇을 남겼는가. 한 번의 비행은 전쟁조차 남의 일 같지 않게 만들며 허공 속을 흘러간다.

고향을 등지고 이국땅에서 살다가 다시 고향으로, 어머니에게로 달려가는 나의 전쟁은 이제 시작인가 끝인가. 좁은 좌석에 앉아 이런 저런 상념에 휘둘리다 몸을 일으켰다. 그야말로 구름 위의 산책인 것이다. 비록 앞마당만한 여객기 안이지만 어슬렁어슬렁 두세 바퀴를 도니 얼굴색이 다르고 언어가 다른 꽃밭 속을 걷는 기분에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비행기가 착륙하면 저들도 뭔가 그리운 것을 킁킁거리며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하겠지. 영화 속에선 하얀 아오자이의 예쁜 베트남여인이 눈물이 그렁그렁 한 채 사랑하는 이를 보내고 있다. 자라온 곳을 떠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엄마는 여름이든 겨울이든 평생 아버지바라기로 타향생활을 마다하지 안했다. 엄마의 고향은 정말 아버지였을까.

윤희경 시인(한국문학협회 회원)
(시인은 전남 나주에서 출생하여 1996년 호주로 이민, 현재는 시드니에 거주하고 있다.)

<※외부 필진의 기고/칼럼은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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