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파원>혼란을 일거에 정리한 위대한 국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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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파원>혼란을 일거에 정리한 위대한 국민
  • 김진이기자
  • 승인 2004.04.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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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폐인들의 총선, 그 뒷이야기
“누가 우리당이 좋아서 찍겠다는 건가. 일단 탄핵이라는 위기 상황을 돌파해야 하니까.”
“노희찬이 국회들어가야 돼. 8번이잖아. 당은 12번, 후보는 3번이야.”
“우리 아버지가 어제는 나를 불러다 앉혀놓고 그러시는 거야. 절대 3번은 찍으면 안된다고. 정히 1번을 못찍겠으면 차라리 12번을 찍으라고.”
4월 14일, 총선 하루전 술자리의 안주는 물론 총선이었다. 같은 술집의 이곳저곳 삼삼오오 모인 이들도 이런저런 주제를 넘나들다 대부분 총선으로 마무리를 하는 분위기였다.
30~40대, 직장인들이 모인 자리여서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 지지파로 갈렸다. 그 중에서는 각 당을 열성적으로 지지하는 이들과 상황의 불가피성을 외치는 ‘회색분자’들로 다시 나뉘었다.
15일, 드디어 선거가 끝나고 TV 앞에 앉았다. 지금까지 어떤 드라마나 오락프로가 이렇게 흥미진진했을까.
“출구조사 발표가 하나도 안맞잖아.” “부산, 대구는 정말 너무 하는 거 아냐?” “뭐 광주나 전남도 마찬가지지.”
시청률 40%대를 기록한 개표방송 앞에서 많은 국민들이 자신들의 한표의 위력을 실감하며 통쾌해하고 애통해 했다. 총선을 안주삼아 새벽까지 마신 술이 안 깬 상태에서 ‘음주 투표’를 하고 제대로 표를 찍었는지가 기억나지 않아 머리를 쥐어뜯었다는 얘기도 들린다.
새벽녘 거대여당, 진보진영 대거 진출, 탄핵세력에 대한 심판. 그렇게 선거는 끝났다. 탄핵이후 한달여를 일상을 전폐하고 촛불집회 현장과 인터넷 앞을 죽치고 살았다는 ‘총선 폐인’들도 일상으로 돌아갔다. “시위세력들이 국회들어가게 됐으니 더 시끄러워질 것”이라며 ‘예언’을 남기고 탄핵 지지파들도 무대에서 사라졌다.
탄핵, 촛불 집회, 감성정치 등 이번 총선은 역사에 기록될만한 사건과 현상, 신조어를 남겼다. 정치인들이 다들 종교인이라도 된 양 거리에서 삼보일배에 큰절을 했다. TV에는 연신 눈물을 흘리는 정치인들을 비쳐주어 굳이 남자 여자를 따지지 않더라도 다 큰 어른이 저렇게 눈물이 흔할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표를 줄테니 하루종일 울어보라고 하면 그들은 아마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만큼 이번 총선은 코앞이 예측 불가능해 보였고 어느 당도 승패를 장담하지 못했다. 그러나 의외로 민심은 모범답안을 내주었고 패자에 대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지역주의를 깨야한다는 외침에는 별 화답을 하지 않았지만 변화에 대한 기대는 힘을 발휘했다.
한 주간지는 이번 총선의 ‘Winner’로 민주노동당을 ‘Loser’로 민주·자민련을 꼽았다. 크게 이견이 없어보이는 분석이다. 우리당과 한나라당은? 다들 입장에 따라 상대당에 의석수가 너무 많이 갔다며 안타까워하는 모양이다. 총선결과를 애써 황금분할이라 고집할 필요는 없겠다. 그러나 정치인들이 마구 휘저어놓은 정국을 하루만에 차분하고 정연하게 정리해낸 국민들의 힘에는 기립박수가 아깝지 않다.
정치인들이 정작 큰절과 삼보일배를 해야할 때는 지금이 아닐까. 고마움의 의미에서, 그리고 민의를 잊지 않겠다는 다짐의 뜻에서.
김진이 기자 tippling@freech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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