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박근혜는 정수장학회에서 손을 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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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박근혜는 정수장학회에서 손을 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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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4.04.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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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박근혜는 정수장학회에서 손을 떼라

“한국의 현대 기업사는 김지태라는 한 출중한 인물을 가지고 있다. 1908년에 태어나 1982년에 세상을 떠난 그는 스물네살 청년기부터 말년까지 50년을 기업가로서 활동했다. 또 기업 활동에 더하여 정치인으로, 언론인으로도 활약했다....그는 기업가로서 성공한 사람이었고, 동시에 실패한 사람이었다. 성공했다는 것은 피폐한 환경에서 혼자 힘으로 기업을 시작하여 손꼽히는 재벌로 성장하였다는 것이다. 그 속에는 한국생사를 산업 기반이 취약한 일개 지방에서 시작하여 그 분야에서 세계적인 명성을 누린 기업으로 키워낸 것이 포함된다.

부산일보라는 지방 신문을 누적된 적자 속에서도 애정을 다해 성숙한 언론 매체로 가꾸어 낸 것도 그의 성공의 중요한 부분이다. 부산일보는 특히 사일구혁명을 점화한, 우리 정치사에 의미 있는 기여를 한 신문이다.

그는 또 우리나라 민간 상업 방송의 개척자로서 일찍이 부산문화방송을 경영하고, 서울에 한국문화방송을 설립하여 오늘에 거대한 매체로 자리잡은 문화방송의 기틀을 닦았다. 이 또한 그의 성공에 속한다.

그가 실패했다는 것은 그와 같은 화려한 위상을 끝까지 이어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의 기업들은 1970년대 후반에 이르러 정수를 잃게 되었고, 부산일보와 문화방송은 그보다 앞서 1960대 초 박정희 군사 정권 밑에서 국가에 헌납되는 형식으로 그의 손을 떠났다. ...... 김지태는 젊어서 일찍 야학교를 차렸고, 기업으로 돈을 벌어서는 가난한 학생들의 장학에 힘을 쏟았다. ...... ”

- 자명 김지태 선생 전기간행위원회를 대표하여 권근술

김지태라는 이름 석자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이제 썩 드물다. 그가 부산일보 사장으로 왕성한 언론 활동을 펼쳤던 50년대 말에 부산일보 견습기자로 입사했던 이들도 이제는 70대 후반에 접어들었으므로 김지태를 기억할 사람이 많지 않은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는 이제 잊혀진 인물에 가깝다. 그러나 한동안, 적어도 부산 사람이라면 김지태 이름 석자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을 만큼 한 시대를 누렸던 인물이었다.

지난 4월 9일은 그가 가슴 깊이 맺힌 한을 풀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지 22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리고 4월 12일은 사일구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던 세계적인 특종 사진 -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김주열의 주검 사진을 부산일보가 보도한 지 44년이 되는 날이다.

그의 70여 일생은 우리 현대사에 나름대로 획을 그을 만한 몇 편의 드라마를 연출하였다. 그 가운데에서도 이승만과 박정희라는 희대의 독재자와의 조우하지 말았어야 할 만남이 더욱 극적이다. 비록 당사자 모두 이 세상 사람은 아니지만, 마치 천당과 지옥을 오고간 것과도 같은 박정희와의 만남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김지태와 두 전직 독재자 사이에서 빚어진 격돌의 중심에는 독재자들이 절박하게 필요했던 돈뭉치가 자리잡고 있다. 하나는 이승만이 자유당을 만드는 데 필요한 정치 자금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박정희가 오일륙 쿠데타를 일으키는 데 필요한 거사 자금이었다.

임시수도 부산으로 다시 밀려난 이승만은 국난을 극복하기보다 자신의 재집권 여부가 더 급선무였다. 제2대 국회의 원내 세력 판도로 보아서 그의 재선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제2대 국회에 초선으로 등원한 김지태는 이승만에게는 눈에 가시와 같은 무소속 원내 교섭단체인 민우회의 핵심이었다. 그도 물론 이승만의 재선에 반대했다.

절대 권력과 맞서 굴하지 않았던 재벌 기업인이 있었다면 우리 주변에서 몇 사람쯤이 그런 사실을 믿으려고 할까. 더욱이 뒤따르는 리베이트가 결코 만만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쉽사리 외면할 수가 있을까. 그러나 우리 역사에 분명히 그러한 사실이 있었다. 파란만장이라는 수식어를 빠뜨릴 수 없는 그 역사의 주인공은 바로 조선견직과 한국생사 그리고 주식회사 삼화를 거느렸던 실크 재벌 김지태이다.

1951년 2월, 이승만이 재집권을 노리며 신당(자유당)을 구상할 때였다. 이승만은 그의 측근을 불러 김지태를 찾아가도록 했다. 대통령이 보내서 왔다고만 하면 알아서 할 것이라고 일렀다. 말인즉 알아서 할 것이라고 했지만, 그때 이승만은 자유당 창당 자금으로 쓸 3억 원을 요구했다. 내로라 하는 기업인들도 대부분 빈손으로 내려와 있던 임시수도 부산에서 거액을 내놓을 돈줄은 김지태와 이연재 같은 지역 기업인뿐이었다. 김지태는 이미 거액의 사재를 털어 육군 참모총장 이종찬 등과 함께 승리공사를 설립하여 국군을 지원하고 있었다. 그런 일로 이승만은 국회의원인 김지태를 관련 국무회의에 참석시킬 만큼 김지태에 대한 기대가 컸다.

그러나 김지태는 이승만의 요구를 묵살했다. 율사 출신의 소장파 무소속 의원들을 중심으로 원내 교섭단체 민우회를 결성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일 때였다. 그로부터 한 달쯤 지난 3월 16일, 조선방직의 임직원 50여 명이 당시 악명 높던 특무대장 김창룡 휘하의 군검경 합동수사본부에 체포되었다. 이른바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조방낙면(朝紡落綿) 사건이었다. 김지태도 군법회의에 기소되었다. 그는 국내 굴지의 적산 기업인 조선방직을 불하받기로 사실상 확정된 조선방직의 실질 경영주였다. 혐의는 이적 행위였다. 광목을 만드는 데 순면만 사용하지 않고 재생면인 낙면을 5% 혼합된 광목을 생산했다는 것이었다.

“군복을 만들 옷감에 낙면이 들어가면 그만큼 군복의 품질이 떨어지고, 군복의 품질이 떨어지면 국군이 작전을 수행하는 데 중대한 차질을 빚게 된다. 따라서 그런 불순한 사상으로 공산당에게 유리한 짓을 했을 뿐만 아니라, 일부러 생산률마저 낮춤으로써 전쟁을 수행하는 데 막대한 지장을 초래했다. 이것이 곧 이적 행위이다.”
여론이 빗발친 것은 당연했다. 동아일보는 그 사건을 빗대어서 “이대로 가다가는 낮잠 자는 농부도 이적 행위자가 되겠다”고 꼬집었다. 그런데 광목에 낙면을 5% 정도 혼합하는 것은 방직 기술의 상식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 사건은 대구고등법원에서 무죄로 결론이 났다.

그러나 김지태가 불하받기로 되어 있던 조선방직은 이승만의 양아들로 자처하던, 서울 종로 깡패 출신의 강일매에게 불하되었다. 이승만의 요구를 거부한 대가였다. 또 한편으로는 이승만을 반대하는 진영의 정치 자금은 거의 대부분 김지태한테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조선방직은 허무하게 무너졌다. 정략적으로 불하된 데다가 건달 출신 사장의 방만한 경영을 이겨낼 되리가 없었다. 일제 시대에 일본의 유수한 재벌들이 참여하여 설립한 국내 최대 기업 조선방직은 끝내 경쟁력을 잃고 1968년에 부산의 지도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다만 부산 사람들은 여태껏 ‘조방 앞’이라는 옛 지명을 버리지 않고 쓰고 있다. 조방이 부산을 대표하던 기업이었기 때문이겠다.

조방낙면 사건 이후에도 이승만은 간단없이 김지태를 회유했다. 선심 공세도 마다하지 않았다. 야권과 닿아 있는 김지태의 자금줄을 차단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뒷날 신익희가 대통령에 출마했을 때, 김지태는 신익희 캠프의 재정을 맡았다. 이승만은 김지태가 기업 경영에 천재적인 소질이 있다고 추켜세우고, 민우회에서 손을 떼면 중석불 100만 달러를 불하해 주겠다고 제의하기도 했다.

중석불은 당시 우리나라의 효자 수출품이던 텅스텐을 수출하고 벌어들인 달러를 가리키는데, 당시 1달러의 공정 환율은 6천 원이었지만 시중 시세는 2만 원이었다. 따라서 100만 달러를 불하받으면 앉은자리에서 140억 원의 시세 차익을 거둘 수 있었다. 자유당 창당 자금을 조달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이른바 중석불 사건은 그와 같은 외화 시장 구조를 기가 막히게 악용했다가 들통난 사건이다.

김지태는 이승만의 달러 공세도 거절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초대 대통령에 한해서 중임 제한을 철폐함으로써 이승만의 종신 집권을 터주는 이른바 사사오입 개헌이 모의되던 과정에서 김지태는 당시 자유당 정권의 제2인자이던 이기붕의 러브 콜도 받았다.

이기붕은 서대문에 있던 자신의 집으로 김지태를 정중하게 초대하여 정치 자금을 제공하는 대가로 모직 공장을 배정해 주겠다고 제의했다. 조선견직이라는 굴지의 견직물 제조업체를 경영하고 있던 김지태로서는 대단히 매혹적인 이권이 아닐 수 없었다. 이기붕은 김지태가 결코 피해 갈 수 없을 것이라고 믿었을 터이다. 또한 김지태는 이승만의 3선 개헌을 반대하는 진영의 자금줄이었다. 그러나 김지태는 면전에서 이기붕을 타박하고 숟가락을 던지고 나와 버렸다.

이기붕이 김지태한테 미끼로 내놓은 모직 공장은 그 뒤 삼성의 이병철에게 돌아갔다. 삼성그룹의 오늘을 가능하게 한 제일모직이 바로 그것이다. 김지태에게는 보복이 뒤따랐다. 조선견직의 임직원 10여 명은 서대문형무소에 구금되었다. 이른바 조선견직 탈세 사건이었다. 치안국과 국세청이 한 달 넘게 뒤졌지만 아무런 혐의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 뒤로도 조선견직은 여러 차례나 세무 사찰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한번도 말려들지 않았다. 부산상고 우등생 출신 김지태는 절세할 줄은 알았을지언정 탈세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털어도 먼지 하나 나지 않았던 김지태의 금고와 장부는 세무 공무원 사이에서도 정평이 날 정도였다.

4.19 혁명과 언론인 김지태

1956년 5월 5일, 제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민주당의 신익희 후보가 유세 도중에 급서함으로써 이승만에 대한 3선 저지는 실패로 돌아갔다. 김지태에게는 엄청난 정치적 손실이었다. 부산 임시수도 시절, 당시 국회의장 신익희는 김지태의 저택 별채에서 지냈을 만큼 인간적 관계도 돈독했다. 자유당의 탄압과 방해를 피할 수 없었던 김지태 역시 1958년 제4대 민의원 총선거에서 3선에 도전했으나 실패했다.

그 길로 그는 정치와 완전히 결별했다. 기업 경영에 전념하는 한편 민주 언론을 창달함으로써 이승만 독재 정권과 투쟁하는 것이 자신의 소임임을 확인했다. 사일구 혁명이 일어난 뒤에 다시 출사표를 던지라고 종용하는 이들이 수두룩했지만 그는 끝내 말을 타지 않았다. 심지어 민주당 정부인 장면 내각의 상공부 장관 입각 제의도 고사했다.

정계를 떠나 본업에 복귀한 김지태는 이승만 독재를 종식시키고 민주 사회를 건설하는 첩경은 민주 언론을 창달하는 것이라고 확신하고 부산일보에 대해 창업 수준에 버금가는 투자를 단행했다. 특히 부산과 서울을 연결하는 무선 텔레타이프 송수신기와 사진 전송기는 당시 중앙전신전화국에서도 도입하지 못한 국내 최초의 첨단 통신 설비였다.

그는 사설과 칼럼의 기능을 중요시하여 인적 투자에도 과감했다. 그가 부산대학교에 출강하던 황용주를 주필 겸 편집국장에 기용한 것은 보기 드물게 파격적인 발탁 인사로 꼽힌다. 박정희와 대구사범학교 동기생인 황용주는 진보적인 지식인으로서 이승만 정권에 대한 투쟁 성향이 매우 강렬했다. 김지태 사장과 황용주 주필 체제는 부산일보의 반독재 투쟁 전선이 구축되었음을 의미했다.

김지태가 독려한 부산일보의 반독재 투쟁은 삼일오 의거와 사일구 혁명으로 거대한 분수령을 이룬다. 마산 시민들이 삼일오 부정선거를 규탄하고 봉기하자 김지태는 즉시 중계차를 동원해 부산문화방송의 주조정실 기능을 부산일보 사장실로 옮겼다. 그리하여 마산 현지에서 부산일보 기자가 취재해 보내는 시위 상황은 곧장 부산문화방송을 통해 보도되었다. 통신 장비가 열악했던 당시였지만, 최선을 다한 일종의 생중계 방송이었던 셈이다. 문화방송의 마산의거 제1보가 방송되자 곧바로 일본의 NHK가 이를 받아서 보도했다. 이어서 AP통신도 이를 인용해 한국 상황을 세계에 타전했다.

이승만은 내무부 장관 최인규를 해임하고 진상조사단을 마산에 보내 사태를 수습하려 했다. 시간이 흐르면 가라앉을 것이라고 요량했다. 그런데 부산일보가 기어코 거대한 폭발물의 뇌관을 건드리고 말았다. 1960년 4월 12일자 부산일보 조간 1면은 충격적인 사진으로 도배되었다. 눈에 최루탄이 박힌 참혹한 김주열의 주검이었다. 세계적인 대특종 사진이었다.

제2의 마산 사태가 폭발했다. 진주, 하동, 창원 등지로 번지기 시작한 부정 선거 시위는 부산과 서울로 번져 나갔다. 경찰의 발포로 사상자가 늘었다. 4월 18일 고려대 학생 3천여 명이 노도와 같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마침내 4월 19일, 전국의 학생들이 총궐기하였다. 사일구 혁명은 그렇게 완성되었다.

사일구 혁명을 점화하는 과정에서 부산일보와 부산문화방송의 역할은 실로 지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당시 부산문화방송이 방송한 테이프에는 군중들이 외치는 구호와 함성 그리고 ‘탕탕!’ 터지는 총포 소리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기자가 시위대를 따라가며 생중계하던 상황이 ‘소리’를 통해 그대로 전달되었다. 방송을 듣는 청취자들이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부산문화방송의 활약상을 “자유당 정권을 무너뜨린 꼬마 방송의 분투”라고 이야기했다.

5,16 거사 자금 오백만 환이 화근이었다

박정희와 김지태는 서로 잘 아는 편이었다. 박정희는 초대 군수기지사령관으로 부산에 오면서 부산일보 사장 김지태와 자리를 함께 하는 일이 잦았다. 특히 박정회와 대구사범 동기생인 황용주를 부산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에 발탁한 장본인이 김지태였으므로 황용주를 매개로 하여 박정희와 김지태는 술자리도 자주했다. 황용주는 박정희의 싱크탱크에서도 우두머리에 해당하는 박정희의 브레인이었다.

당초 박정희가 작정한 거사일은 1960년 5월 8일이었다. 당시 육군 참모총장 송요찬이 미국으로 건너간 틈을 타서 쿠데타를 일으키기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박정희의 1차 거사는 사일구 혁명으로 무산되었다. 박정희는 학생들 때문에 자신의 거사가 물 건너 간 것을 통탄했다. 그리고 사일구혁명이 일어난 지 1년 뒤, 박정희는 민주당 정부의 분열상을 악용해 기어코 쿠데타를 감행했다.

박정희는 김지태를 매우 신뢰하는 편이었다고 말해도 틀리지 않는다. 오일륙 쿠데타를 모의하면서 박정희는 황용주를 통해 김지태에게 거사 자금으로 5백만 환을 요청하였다. 박정희는 김지태를 쿠데타 동지의 범주에 포함시켜 두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사 자금 5백만 환은 끝내 박정희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것이 곧 박정희와 김지태의 관계를 파국으로 몰고 간 빌미가 되었다.

1962년 3월 27일, 국내 신문에 “국내 재산 해외 도피 등의 혐의로 김지태 사장 입건”이라는 기사가 보도되었다. 김지태가 경영하는 기업체 간부 10여명이 중앙정보부 부산지부에 체포되었다. 그의 아내도 다이아몬드 반지를 밀수한 혐의로 구속되었다. 그때 김지태는 인견사 공장을 건설할 시설 도입 문제를 처리하고 신병 치료를 위해 일본에 머물고 있었다.

한 달쯤 일본에서 머물며 사태 추이를 관망하던 김지태는 자신의 부하들이 대거 구속된 마당에 자신이 직접 사태를 수습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귀국했다. 중앙정보부에 체포된 그는 군법회의에 회부되었다. 그는 자신에게 씌워진 혐의가 성립되지 않음을 주장했다.

1만 달러를 해외에 도피한 혐의가 우선 그러했다. 당시의 외환관리법은 내국인이 해외 여행을 할 경우 하루 15 달러 이상은 사용할 수가 없도록 제한하였다. 그래서 해외 여행을 하는 기업인은 물론이고 공무원들도 여행 경비를 조달하기 위해서 편법을 동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묵시적인 관행이었다. 법대로 하자면 해외 여행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었다. 또한 그의 아내의 밀수 혐의도 재판 과정에서 세관 당국의 진술로 무죄로 판명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법회의는 김지태에게 징역 7년을 구형했다.

군사 정권은 그들의 속내를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부산일보와 문화방송에서 손을 떼라는 것이었다. 김지태는 자신이 석방된 뒤에 처리하겠노라고 하였지만 군사 정권은 막무가내였다. 1962년 5월 24일, 김지태는 수갑을 찬 손으로 군사 정권이 작성해 온 양도각서에 강제 날인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그는 끝까지 부산일보만큼은 놓지 않으려 했지만 도리가 없었다.

김지태가 부일장학회의 기본 재산으로 내놓은 서면 일대의 토지 10만여 평과 부산일보 주식 100%, 한국문화방송 주식 100%, 부산문화방송 주식 100%가 강탈당했다. 당시 시가로 100억 환이 넘는 재산이었다. 그리고 1 주일 뒤에 마침내 오일륙장학회가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김지태의 재산을 강탈하기 위해 기획된 그 사건의 단초는 다소 엉뚱했다. 당시 국제신보 사장 김형두가 국제신보 경영권을 놓지 않으려고 당시 중앙정보부 부산지부장 박용기 대령을 매수함으로써 빚어진 것이었다. 국제신보는 1946년 김지태가 부산상공회의소 초대 회두로 취임하면서 창간한 산업신문의 제호를 바꾼 것이었다.

김지태는 1948년에 경영난에 몰린 부산일보를 인수하면서 국제신문을 김형두에게 경영을 맡겼다. 그런데 김지태가 정치 활동을 하는 한편으로 부산일보에 전념하는 동안에 김형두는 교묘하게 자신의 지위를 보강해 나갔다. 김형두의 행태를 보다 못한 김지태가 국제신보의 경영권을 확보할 움직임을 보이자 김형두가 중앙정보부를 동원하여 일을 꾸민 것이었다.

사사로운 갈등에서 촉발된 그 사건은 김지태가 오일륙 거사 자금을 내놓지 않았던 괘씸죄와 결부되면서 걷잡을 수 없이 증폭되었다는 것은 이내 밝혀졌다. 김지태를 구속해 군법회의에 회부한 중앙정보부 부산지부장 박용기가 자신의 만용을 용서해 달라며 김지태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을 조종한 세력이 있었음을 고백했다.

놀랍게도 그 핵심에 황용주가 자리하고 있었고, 박정희의 동의 아래 부일장학회와 부산일보 그리고 문화일보 강탈 사건이 진행되었음이 드러났다. 나름대로 언론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고, 이승만 정권의 눈치만 살피던 언론에 대해 노골적으로 불만을 토로하던 박정희도 권력을 쥐고 난 다음에는 마음이 바뀌었던 것이다. 더구나 이승만 정권과 정면 승부를 마다하지 않던 부산일보의 논조와 김지태의 언론관을 익히 알고 있던 박정희로서는 황용주가 제시한 강탈 계획서를 수용했을 터이다.

정수장학회 재산은 장물이다

“...... 위로 황천(皇天)과 조종선열의 도움을 받으며, 혁명 과업이 완수되어 국민 혁명의 빛나는 결실에 참여하여, 혁명의 봉화 시점이었던 1961년 5월 16일을 영구히 기념하며, 그 정신을 길이 살리고자 이름을 5.16장학회라 하고, 국가 재건, 인간 개조의 혁명 정신이 세대를 이어가며 청소년의 가슴에서 가슴으로 전해 흐르는 장학 사업을 범국민적이고 거족적으로 추진하는 중심 기구가 되고자 5.16장학회를 만든 것이다.”(5.16장학회 설립 취지문 중에서)

김지태의 재산을 강탈한 군사 정권은 한 달이 못되어 오일륙장학회를 발족했다. 오일륙장학회는 김지태가 설립한 부일장학회를 벤치 마킹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부일장학회는 “향토의 인재를 발굴하여 향토의 발전과 조국의 앞날에 기여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겠다”는 김지태의 애향심과 부산일보에 대한 끝없는 애정의 소산이었다. 장학회의 이름에 자신의 이름이나 아호 대신에 부산일보를 붙인 데서도 그가 부산일보를 얼마나 애지중지하였는지 잘 엿볼 수 있다.

“취학의 기회가 경제적 제한을 받을 수 없다 함은 오늘날 사회 체제에 있어서 당연히 보장되어야 할 사회 정의입니다. 본사는 이 정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부일장학회를 창설하였습니다. ...... 본사는 시내 및 경남 일원에 있는 국민교, 중고교, 대학에서 현재 고학을 하고 있거나, 신학년도에 상급 학교에 진학하려는 학도 중 애독자 여러분의 추천을 얻어서 본회 정관에 의하여 대상자를 선정할 것입니다. 따라서 애독자 여러분의 친근한 주변에서부터 여러분과 더불어 장학의 사업을 추진, 성공케 하자는 것입니다.”(부일장학회 설립 취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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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태가 자신의 재산을 출연하여 설립한 부일장학회는 시민들이 추천한 소외 계층의 학생들을 위시하여 독립 유공자 자녀들에게도 장학금을 지급했다. 시행 첫해인 1959년에는 장학생 1,665명에게 3천7백3십여만 환을, 그리고 그 이듬해에는 4,925명에게 5천5백5십여만 환을 지급했다. 부일장학생 중에는 당시 중학생 노무현도 있었다. 또한 김지태는 부일장학회에 이어서 모교인 부산상고에도 장학회를 만들었다. 부산상고에 다녔던 노무현도 그 장학금으로 학업을 마칠 수가 있었다. 부일장학회를 강탈한 것은 곧 부산과 경남의 소외 계층의 자녀와 학도들로서는 면학의 길을 박탈당한 격이었다. 더구나 장학회를 갈취한 일은 전무후무할 것이다.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탄에 숨을 거두고 역사의 저 편으로 사라지자 더 이상 5.16의 신화는 존속될 수가 없었다. 1980년 신군부도 쿠데타를 일으킨 뒤로 5.16을 털어내기 시작했다. 오일륙 광장이 여의도 광장으로 바뀌었다. 오일륙장학회는 정수장학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박정희의 ‘정’과 육영수의 ‘수’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오일륙 쿠데타를 영원히 기념하겠다고 세운 장학회가 이제 박정희와 육영수를 영원히 기념하자는 장학회로 바뀐 셈이었다.

또 다른 변화도 있었다. 5.18 쿠데타 신군부는 오일륙장학회가 소유하고 있던 문화방송 주식 100% 가운데 70%를, 일찍이 오일륙 군사 정권이 그랬던 것처럼, 국가 헌납 형식으로 빼앗아 방송문화진흥회를 만들었다. 문화방송의 지배권은 새로 등장한 권력의 손아귀로 들어간 것이다. 그러나 부산일보의 주식 100%는 여전히 정수장학회의 재산으로 남아 있다.

유월 민주화 항쟁의 결과로 민주화 요구가 빗발치던 1988년 7월, 부산일보 노동조합은 편집권 독립을 요구하며 장기 파업 사태를 빚었다. 그 당시 부산일보와 문화방송이 오일륙 쿠데타 정권에 의해 강탈당한 사실이 각 신문에 요란하게 재조명되었다. 김영삼을 위시하여 부산 출신 야당 의원들은 정수장학회 문제를 정치 쟁점화할 의사를 비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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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1988년 7월 1일자 한겨레신문은 주목할 만한 기사를 실었다. “부산일보의 파업이 장기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는 가운데 이 신문사 주식 전부를 소유하고 있는 정수장학회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 박정희 전 대통령은 5.16 쿠데타 이듬해인 1962년에 장학회를 만든다는 명목으로 당시 삼화고무 사장이었던 김지태 씨로부터 부산일보, 문화방송, 부산문화방송을 빼앗아 이 재단을 설립했다. ...... 정수재단의 한 관계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큰딸 박근혜씨가 이 재단의 실세라는 세간의 소문을 부인하고, 이 재단은 어느 개인이나 정부와 전혀 무관하게 장학 사업만을 하고 있다고 강조한 뒤, 재단이 해체되면 재산은 국고에 귀속된다고 덧붙였다.”

그런데 지금 정수장학회 이사장은 박근혜이다. 그는 1995년 이사장에 취임한 이래 지금까지 줄곧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박근혜가 실세였다는 소문은 그대로 입증된 셈이다. 따라서 박근혜는 무슨 연유로 이사장에 취임하게 되었는지 설명해야 할 이유가 있다.

더구나 1962년 5월 24일, 공갈과 협박으로 강제 날인하게 하여 갈취한 김지태의 재산은 사실상 범죄 행위로 부당하게 얻은 남의 물건이었다. 장물인 셈이다. 따라서 박근혜 이사장은 장물을 가지고 장학 사업을 계속하고 있은 부분에 대해서도 마땅히 설명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박근혜 이사장은 지금이라도 선대의 허물에 대해 부산 시민과 김지태의 유가족들에게 사죄하는 일이다. 아울러 더 늦기 전에 장물에서 손을 떼는 것이 책임 있는 공인의 도리라고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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