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속에 한민족 긍지심튼 동포들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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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속에 한민족 긍지심튼 동포들의 삶
  • 김정희기자
  • 승인 2004.04.2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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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6학년 교과서에 실린 재외동포 이야기(3)
중국에서 온 친척

"수빈아, 준비 다 됐니? 어서 서둘러라."
좀처럼 급하게 행동하지 않는 수빈이 할아버지께서 수빈이를 재촉하십니다. 오늘은 중국에 사시는 고모 할머니와 친척들이 배를 타고 인천항에 도착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수빈이는 할아버지를 따라, 중국에서 오는 친척들을 마중하러 인천에 가기로 하였습니다. 수빈이는 중국에 살고 있다는 친척이 무척 궁금하였습니다.
그 동안 할아버지께서는 중국에 살고 있는 친척들과 편지로 소식을 주고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고향에 와 보고 싶다는 고모 할머니의 부탁을 듣고 초청을 하게 된 것입니다.
차를 타고 가는 동안, 할아버지께서는 바깥을 내다보며 아무 말 없이 생각에 잠기셨습니다. 아마도 곧 만나게 될 고모 할머니를 생각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주머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어 찬찬히 살펴보셨습니다. 그 사진은 중국에서 온 편지에 들어 있던 것입니다. 수빈이는 궁금했던 것을 할아버지께 여쭈어 보았습니다.
"할아버지, 오늘 오시는 고모 할머니를 잘 기억하세요?"
"글세, 너무 어릴 때 헤어졌기 때문에 기억이 잘 나지 않는구나. 보내 온 사진을 보니 얼굴은 어머니를 꼭 닮으셨더구나."
"그런데 고모 할머니께서는 왜 중국에서 사시게 된 거예요?"
"그게 다 먹고 살기 힘들어서 그렇게 된 거지. 수빈아. 너는 잘 모르겠지만 할아버지가 어렸을 때에는 양식이 없어 굶거나, 일본 사람들이 탄압을 해서 중국으로 간 사람이 많았단다. 중국에 가서 농사를 짓거나 독립 운동을 했지."
할아버지께서는 다시 사진을 들여다보셨습니다.
여객선 터미널에 도착하여 한참을 기다리니, 배에서 내린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수빈이는 준비해 간 커다란 종이를 펼쳐 들었습니다. 그 종이에는 중국에서 오시는 고모 할머니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이윽고, 할머니 한 분과 남자 어른 두 분이 수빈이와 할아버지 쪽으로 다가왔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그분들을 한참 동안 바라보시더니,
"누님, 금순이 누님 맞지요?"
하며 할머니를 껴안았습니다.
수빈이 할아버지와 고모 할머니의 눈에 눈물이 고였습니다.

(1) 수빈이 할아버지와 고모 할머니의 눈에 눈물이 고인 까닭은 무엇일까요?
(2) 외국에 살고 있는 우리 동포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하는 까닭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사할린 귀국 동포들의 쓸쓸한 '고향의 봄'

다음 글을 읽고, 귀국 동포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봅시다.

어느 날, 경기도 안산시에 있는 사할린 한인 아파트.
"꿈에도 그리던 고향 땅을 살아서 밟게 되어 마냥 좋아했는데...... 하지만, 이미 각오한 일이니 어쩔 수 없잖아."
박씨 할아버지는 사할린에 남겨 둔 자식과 손자들의 사진을 꺼내 보며 체념한 듯 말했습니다.
박씨 할아버지를 비롯한 '사할린 한인 1세대' 900여 명은 일제에 의해 강제 징용되었다가 광복 이후 일본측이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막아서 이역 만리 낯선 땅에 버려진 뒤 반 세기가 지나서야 귀환의 꿈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주위의 환영을 받으며 고국을 찾은 기쁨도 잠시, 대부분 70,80대로 나이가 많은 이들은 귀향의 대가로 치른 가족과의 생이별, 오랜 타향살이로 얻은 지병, 빠듯한 살림살이와 낯선 환경에 대한 적응 문제 등 3중,4중의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아파트 앞 공터에 모인 노인들의 대화 속에는 사할린에 두고 온 가족들에 대한 짙은 그리움이 배어 있었습니다.
"지난 밤 꿈에 손녀딸이 보였어. 녀석 재롱을 한번 봤으면 원이 없겠는데......."
"아들 내외가 다니던 공장이 문을 닫았다는데 어떤지 걱정이 돼."
죽어서나마 고국 땅에 묻히겠다는 일념으로 '영구 귀국'을 결정한 이들은 그 대가로 가족들과 헤어지는 또다른 이산 가족의 아픔을 겪고 있습니다. 귀국 요건이 65세 이상인데다가 한 명의 가족만 동반할 수 있기 때문에 대부분 자식들과 헤어져 노부부만 귀국길에 오른 것입니다.
한 달 전에 이 곳에 입주한 김씨 할아버지는
"함께 왔다가 돌아가는 자식들을 바라보며 '이것이 마지막이구나.'하는 생각에 눈물을 참을 수 없었어. 늙고 병든 내외가 쓸쓸히 여생을 보낼 생각을 하니 안타까울 따름이야."
라며 한숨지었습니다.


터키에 간 한국 구조대

1999년 8월, 터키에서는 진도 7이 넘는 지진이 발생하여 수많은 사상자가 생겼고, 건물과 도로가 파괴되었습니다. 우리 나라는 119 구조대와 의료 봉사단을 터키 지진 피해 현장으로 파견하였습니다.
한국 구조대는 지진 피해 지역의 아파트 붕괴 현장 등에서 생존자 구조 작업을 하였습니다. 구조대는 갈수록 심해지는 악취와 전염병에 대한 위험으로 작업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이 지역은 낮에는 기온이 섭씨 40도까지 올랐다가 저녁에는 섭씨 영하 10도까지 떨어지는 등 일교차가 매우 컸으며, 폭우까지 내려 작업 현장의 건물이 무너질 위험도 매우 컸습니다.
이스탄불의 한국 교민들과 한인 교회, 한국 식당은 악조건 속에서 발굴 작업을 강행하고 있는 우리 구조대에 불고기와 김밥 등 한식을 제공하며 도움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한편, 경기도 수원시는 지진 피해를 입은 터키의 자매 도시 얄로바 시에 파견한 의료 지원 봉사단의 활동 기간을 며칠 더 연장하였습니다. 얄로바 시 지진 피해자들의 진료 요청이 줄지 않는데다가, 대부분의 외국인 의료 봉사단이 주말에 쉬기 때문에 귀국할 경우에는 주말에 진료를 할 사람들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터키의 한인 교포들은 의료단을 방문하여 한국인의 따뜻한 마음에 감사를 표시했고, 이스탄불의 교민들은 된장국과 밥을 날라다 주며 의료 봉사단의 사기를 붇돋웠습니다.
얄로바시의 시장과 주지사, 그리고 지역 국 부대 관계자들도 봉사단을 방문하여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습니다.

(1)터키의 한인 교포들은 한국 구조대의 활동 모습을 어떠한 마음으로 지켜 보았을지 생각해 봅시다.


재외 동포들의 조국 사랑

우리 나라의 재외 동포 수는 약 570만 명에 이르고, 재외 동포들이 살고 있는 나라의 수는 150개국이 넘습니다. 이렇게 많은 우리 동포가 다른 나라에 가서 살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우리 동포들이 주로 살고 있는 지역은 어디일까요?
중국에는 200여만 명의 우리 동포가 살고 있습니다. 우리 동포들이 중국으로 가서 살게 된 까닭은, 중국 만주 지방이 원래 우리 민족의 활동 무대였던 곳이라 전부터 우리 민족이 정착하여 농사를 짓고 있었으며, 특히 일제 강점기에 일제의 탄압을 피하여 많은 사람이 건너갔기 때문입니다. 또, 독립 운동을 하기 위해 그 곳으로 간 분들도 있었습니다.
일본에는 주로 일제 강점기에 징용이나 징병을 갔던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고, 최근에는 유학이나 일을 하기 위해 간 사람들이 남아서 살고 있습니다. 오늘날, 오사카 등 일본에는 60만 명이 넘는 동포가 살고 있습니다.
사탕수수 농장의 인부로 하와이에 갔던 사람들로부터 시작된 미국 이민은 오늘날까지도 계속되어, 현재 200여만 명에 이르는 동포들이 미국에 살고 있습니다. 로스엔젤레스, 뉴욕, 시카고 등지에는 한국인 거리도 있습니다.
아프리카에도 4천여 명에 이르는 우리 동포들이 살고 있습니다. 우리 동포들은 무역업자, 의사, 선교사, 농업 기술자로서 그 곳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은 1960년대부터 남아메리카에 농업 이민을 갔습니다. 처음에는 고생을 하엿지만, 부지런한 우리 민족은 곧 성공적으로 정착하여 그 곳 사회에 한국인의 우수성을 보여 주었습니다.

(1) 우리 동포들이 다른 나라에 가서 살게 된 까닭과 그 곳에서의 어려웠던 생활에 대하여 더 조사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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