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산책] 고종황제의 밀사 - 호머 헐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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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산책] 고종황제의 밀사 - 호머 헐버트
  • 이형모 발행인
  • 승인 2014.08.14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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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형모 발행인

헐버트 박사는 1886년 7월 4일 육영공원의 영어교사로 조선에 첫발을 디뎠다. 조선의 관리들에게 영어와 선진문물을 가르치고자 고종황제의 지시로 초청된 미국인 교사 3인 중에 하나였다. 미국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1863년에 버몬트에서 태어난 헐버트는 다트머스 대학을 졸업하고 유니언 신학교를 다니다가 24세에 조선의 엘리뜨 관리들을 가르치는 교사로 입국한 것이다.

입국 4년차에 사민필지(최초의 한글교과서/ 세계사회지리총서)를 집필, 출간해서 가르쳤는데 당시에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듬해 1891년 미국으로 귀환했다가 1893년 10월, 감리교 선교사로 내한해서 삼문출판사의 책임자가 되었다. 그 이후 조선에 대한 그의 봉사활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1897년 한성사범학교 교장을 시작으로 1900년 관립중학교(현 경기고등학교) 교관이 되었다. 1903년에는 YMCA 창립총회 의장으로 기여했고, 1905년에는 영문으로 한국사(The History of Korea)를 상하권으로 출간했다.

1905년 10월 고종의 밀사로 미국을 방문해서 씨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고종의 친서전달을 시도하였으나 면담을 거절당했다. 조선이 타국의 침략을 받을 때 성실하게 돕는다는 ‘조미수호조약의 내용’ 실천을 촉구하는 것이었는데, 고종황제는 미국의 도움으로 일본의 을사늑약 강박을 저지하고자 한 것이다.

1904년 8월 22일 제1차 한일협약이 체결되었는데 이것은 조약이 아니고 각서(Memorandum)였다. 이것을 일본정부가 영어로 번역할 때, Agreement라고 제목을 바꿔서 외교조약으로 가장하고 번역본을 미국과 영국에게 보냈다. 원래 각서는 외교조약이 아니므로 당사자 사이에만 효력을 미치는데 이것을 악용해 일본정부가 외교적 사기행각을 벌인 것이다.

그러나 이 사기극의 영향으로 1905년 6월 미국은 일본과 가쓰라-테프트 밀약을 맺어, 미국이 필리핀을 점령하는 대신 일본의 조선 침략을 양해하는 비밀협약을 맺는다. 그러니 10월에 도착한 고종의 밀사 헐버트의 면담 신청을 미국대통령이 거절한 것이다.

“2차 한일협약(을사늑약)이 강제된 뒤에 대한제국 정부는 미국정부에 대해 이것은 강제된 것으로 대한제국 황제가 승인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통지했다. 그때 미국정부의 답변은 ‘무슨 소리냐? 작년 8월 22일자 협약에서 대한제국은 일본에게 외교권을 이미 넘긴 것으로 되어 있었다.’고 답변했다.” 각서를 외교조약(agreement)로 바꿔치기한 일본정부의 사기극이 성공한 것이다.

1904년 2월부터 1910년 8월까지 대한제국의 국권을 일본이 탈취하는 5개의 조약들은 모두 정식조약이어야 하는데 마지막 병합조약을 제외하고는 모두 약식을 취했다. 약식인 4개 조약은 비준마저 없는 상태로 되어 있다. 일본정부도 최종의 병합조약 때는 모든 것을 제대로 갖추려고 했으나, 이 조약에도 비준서에 해당하는 대한제국 황제의 서명이나 옥새 날인이 없다. 이러한 모든 결함들은 곧 대한제국 정부가 저항한 흔적으로 남겨진 것이다. 따라서 일제 35년은 병합이 아니고 명백히 ‘일본의 강제점령’인 것이다.

1906년 6월에 헐버트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 3인과 함께 고종의 특사로 임명되어 평화회의에서 ‘1905년 11월의 조약은 무효’라고 선언하려고 했다. 일본은 고종황제가 그곳에 대표를 보낸 것 자체가 1905년 조약 위반이라고 하여 1907년 7월 22일자로 고종황제의 강제퇴위를 강행한다. 황제와 황태자가 응하지 않으니까 두 사람을 대역하는 환관 둘을 세워 양위식을 치렀다.

이틀 뒤인 7월 24일 3차 한일협약으로 대한제국 정부의 내정에 대한 감독권을 통감부가 확보한다. 이토 히로부미 통감과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이 황제의 권한 위임 없이 약식조약으로 체결했다. 그리고 일주일 뒤인 7월 30일에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이 있게 된다. 군대해산에 관한 조칙도 순종황제와 전혀 무관한 상태에서 나온 것으로 밝혀졌다. 순종황제는 고종황제가 11월 15일 종묘에 퇴위를 고한 사흘 뒤 11월 18일에 종묘에 가서 황제위에 오르겠다는 신고를 한 후에 집무를 시작한다.

고종황제의 퇴위와 더불어 헐버트는 1907년 7월 미국으로 쫓겨나고 스프링필드에 정착한다. 1909년 8월 일시 방한하여 헐버트는 비밀리에 태황제(고종)으로부터 상하이 덕화(독일)은행에 예금한 예치금 관련서류를 받고 내탕금 인출을 위한 전권을 수임한다. 상하이 독일은행으로 달려가 고종황제의 위임장을 내놓고 예금인출을 요구했으나, 이미 인출되어 내어줄 것이 없다고 거절당했다.

1908년 4월22일 독일공사 크루거와 덕화(독일)은행은 고종황제가 가지고 있던 예치금 증서는 받지 않은 채 일본이 날조한 서류만으로 예치금 52만6천 마르크를 2차례에 걸쳐 지급했다. 궁내부대신 이윤용(이완용의 형)을 수취인으로 한 다이이찌은행 서울지점 수표를 크루거 독일공사가 통감부로 전달하고 통감부 나베시마 외무총장이 영수증을 써 주었다. 독일공사와 독일은행이 예금주인 고종황제 몰래 거금을 통감부에 내준 것이었다. 고종황제는 독일공사 입회하에 상하이 덕화은행에 비밀예금한 독립운동자금을 도둑맞은 것이다.

1919년 삼일운동 직후, 헐버트는 미국 상원 외교관계위원회에 일본의 잔학상을 고발하는 진술서(Statement)를 제출한다. 그리고 미국 주요 언론에 ‘일본 강점의 부당성과 대한의 독립’을 선전하는 기고 활동을 계속한다.

1906년 런던에서 출간한 영문판 ‘대한제국멸망사’ 서문에 대한제국과 한국민들에 대한 그의 생각이 나타난다.

<헌사>

비방이 그 극에 이르고 정의가 사라지고 있는 이때에 
나의 지극한 존경의 표시와 흔들리지 않는 충성의 맹세로서  
대한제국의 황제 폐하에게... 그리고

지금은 자신의 역사가 그 종말을 고하는 모습을 목격하고 있지만 
장차 이 민족의 정기가 어둠에서 깨어나면
  
잠이란 죽음의 가상이기는 하나 
죽음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게 될 
한민족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호머 헐버트.

을사늑약이 대한제국을 목 조르던 시기에 헐버트는 장차 ‘한민족이 광복을 쟁취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정부수립 1주년 기념식에 독립유공자이며 정부수립을 축하하는 귀빈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을 받고 1949년 7월 29일 인천항에 도착한 헐버트 박사는 86세의 노구로 긴 여행의 여독을 이기지 못하고 8월 5일 청량리 위생병원에서 별세한다.

 미국을 떠날 때, 소감을 묻는 <AP통신> 기자에게 담담히 말했다. “나는 일찍부터 (한국에 가기를) 소원해왔소.”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합니다.”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고종황제의 밀사 호머 헐버트, 그리고 평생을 한국 독립을 위해 헌신한 그는 지금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원에 고이 잠들어 있다.

2014. 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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