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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산책] 8월의 기억 -한일합방, 해방, 정부수립
이형모 발행인  |  dongpo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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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7.29  15:0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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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형모 발행인

전 국사편찬위원장 이태진 교수가 쓴 ‘동경대생들에게 들려준 한국사’는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치열한 개혁 개방 노력과 일본정부의 노골적인 방해공작과 무력침략으로 인한 좌절 그리고 망국의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고종황제는 정조대왕을 흠모하여 못다 한 그의 꿈을 실현하고자 했다. 12세에 임금이 되고, 흥선대원군의 9년 섭정기간 동안 ‘개방’이 늦춰진 것을 안타깝게 여겨 ‘친정체제’가 되자마자 일본과 국교수립 하는 등 개국, 개화를 적극 추진한다. 기독교 선교사들을 개화의 선생으로 적극 활용하고 ‘양반들도 상공업에 종사하라, 평민자제도 학교에 다니게 하라’는 교서도 발표했다.(1882년)

당시는 서구열강의 침략시대로 고종황제는 조미수호조약을 맺고 열강의 침략에 대한 방패막이로 미국의 역할을 크게 기대했다. 그리고 상비군 5만을 양성하여 국방을 강화하고 국제사회에서 영세중립국으로 인정받고자 노력했다.

청나라는 1880년, 원세개를 보내 조선을 속국화 하고자 했고, 청일전쟁(1894)에서 일본에 패하여 ‘조선은 청의 속국이 아니다.’ 라고 물러났다. 필리핀을 식민지화 하려는 미국이 일본의 조선침략에 동조해주어(가쓰라-태프트 밀약), 조미수호조약은 휴지조각이 되고 일본의 조선침략 행보는 거칠 것이 없어졌다.

고종황제의 근대화정책은 전기, 전신, 철도, 광산 등의 산업인프라를 건설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국토개발계획과 서울도시개조사업을 망라했다. 고종의 지시로 한성판윤 이채연이 철도규칙 6개조로 오늘날의 표준궤를 결정하고(1896), 영국인 맥레비 브라운에게 전국철도노선을 조사(1898), 보고토록 하여 오늘날의 철도노선의 기초 안을 만들었다.

서울 도시계획으로 종로대로를 넓히고 1899년 5월 전차를 개통했는데 일본 동경보다 3년 먼저 건설되었다. 경성철도정거장을 만들고(1901), 프랑스-벨기에 자본과 기술진으로 서북철도건설을 착공했다. 고종황제의 근대화 작업은 1904년 2월 러일전쟁으로 일본군이 서울에 진주하면서 중단되었다. 일본은 부족한 전쟁자금을 미국, 영국 차관으로도 메꿀 수 없어 조선의 국가재정을 강탈하기 시작한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은 해체를 강요당한다. 오늘날까지도 대학 강단의 식민사학자들과 일부 몰지각한 지식인들이 ‘식민지근대화론’을 읊어대는데, ‘기회박탈론’으로 제목을 바꾸는 것이 맞다. 전쟁하느라 동경에 전차 건설도 어려운 국가재정형편에 일본이 어떻게 조선의 근대화를 돕겠는가?

근대화를 방해하는데서 나아가, 1894년 7월 23일 일본군 1개 대대가 ‘민비일족을 제거하라’는 작전명령을 받고 경복궁에 침입하여 3시간 심야교전 끝에 왕과 왕비를 찾아냈으나, 고종황제가 직접 나서서 강하게 대응하여 '명성황후 시해작전'은 실패했다.

이듬해 1895년 10월 8일 일본정부는 또다시 대본영 참모본부 가와까미 참모차장의 지시로 미우라 일본공사가 지휘하여 미야모토 다께이찌로 소위를 포함한 장교 10인이 경복궁을 침입하여 명성황후를 무참하게 살해했다. 그들은 낭인쓰레기가 아니라 일본정부의 명령을 수행한 정예장교들이었다. 일본정부가 직접 저지른 범죄행위에 대하여 한국정부는 아직까지도 말이 없다...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 3인을 보낸 것을 빌미로 1907년 7월 고종황제를 강제 퇴위시킨 초대통감 이등박문은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대한제국 참모중장 안중근에게 피격, 사망한다.

당시 일본 육군대신 데라우찌는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를 태황제(고종)가 지원한 사실을 확인하고 안중근 의사를 처형한다. ‘하얼빈 의거’에 앞서 고종황제는 연해주로 3십 만원의 군자금을 보냈다. 당시에 양곡 10만석을 구매할 수 있는 거금이었다.

3대통감이 된 데라우찌는 1910년 8월 29일 조선을 병합하고 초대 총독이 된다. 그 후 일본총리(1916)가 되어, 미국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선언(1918)으로 태황제(고종)가 다시 움직일 것을 우려하여 독살을 추진했다. 태황제는 1919년 1월 21일 의문사했다.

1919년 3월 1일 고종황제의 장례행렬<대여>가 떠나는 날, 대한문 앞에 모인 백성들은 태황제의 죽음을 슬퍼했을 뿐만 아니라, 44년 재위기간과 퇴위한 이후 12년 동안 불굴의 투지로 애국 애민한 태황제에게 충성을 표하고 그의 유지를 받들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것이다.

1919년 4월 10일 상해임시정부 준비위원회는 신석우 위원의 제안으로 국호를 조선공화국(초안)에서 대한민국으로 변경하면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1919년 3.1 만세 함성의 힘으로 임시정부를 세운다. -(대한독립) 만세함성은 독살된 고종황제에 대한 애도와 충성의 소리 - (국호는) 대한제국을 계승하는 민국으로서 대한민국이어야 한다."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 1945년 8월 15일 조국 광복,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8월의 기억이다. 광복 69년이 지났어도 조국은 통일되지 않고, 고종황제의 나라사랑하는 마음은 8천만 한인의 가슴에 복권되지 않았다.

2015년 8월이 오면 광복 70주년이다.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하자. ‘한국인의 열등의식과 자기모멸’을 목표로 1922년부터 1938년까지 총독부 산하 ‘조선사 편수회’가 각색 조작한 ‘식민사학<조선사>’를 폐기하고, 이제는 고종황제와 선열들의 애국애민을 바로 기억하자. 올바른 우리 역사를 되찾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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