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뽀>한 끼의 식사로 전해지는 따뜻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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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뽀>한 끼의 식사로 전해지는 따뜻한 사랑
  • 재외동포신문
  • 승인 2014.05.09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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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재외기자, 조지은 집사 부부를 만나다

남미의 중심 브라질. 이 곳의 태양은 언제나 뜨겁다. 일 년 날씨의 대부분이 더운 편이며 길거리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풍경이라면 짧고 얇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바쁘게 하루를 살아가는 모습이다. 하지만 그런 브라질에도 겨울은 찾아온다.
 
4월 중순부터 5월 까지 짧은 환절기를 거쳐 6월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섭씨 20도 정도의 온도를 유지하는 겨울. 한국 혹은 다른 나라였다면 크게 불편하지 않을 온도이지만 이 나라에선 거세고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옷깃을 단단히 여미게 만든다. 낮에는 덥고 밤에는 쌀쌀한 알 수 없는 날씨의 환절기. 아늑한 공간에서 가족과 함께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는 대부분의 교민들 역시 불편함을 토로하는 가운데 잠시 거리로 눈을 돌리면 그것조차 허락되지 않은 채 얇은 담요를 두르고선 마른 몸을 떨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그런 수많은 거리의 사람들을 위해 따뜻한 밥주걱을 든 한 브라질 교민 부부가 있다. 바로 조지은 집사 부부다. 지난 5월 6일 코리아포스트는 그녀가 걸어온 발자취와 헌신에 대해 더욱 깊은 이야기를 듣기 위해 조지은 집사를 직접 방문했다.

“어머니 말씀이 저를 이렇게 타인을 위해서 봉사하는 사람으로 만든 것 같아요. 아직도 그 말씀이 잊혀지질 않아요.”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녀는 이내 지나온 세월을 기억해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3대째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온 그녀는 오래 전 어머니가 그녀에게 들려준 이야기가 그녀의 삶을 바꿨다고 말했다.

“하루에 먹을 빵이 2개 밖에 없다고 합시다. 근데 주변에 빵을 하나도 가지지 못한 이가 있다, 그럼 그에게 하나를 나눠주어라. 어머니는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60여 년 전 전쟁 이후 어려운 보릿고개를 겪던 시절을 회상하며 그녀는 말했다. 나름 안정적인 생활을 누리던 그녀의 가정. 그녀의 어머니는 항상 다른 이웃들 몫의 쌀까지 함께 장만하여 집으로 찾아온 어려운 이웃에게 쌀 한 가마니를 들려 보내기도 하고, 또 어려웠던 전쟁 직후의 시절 각설이들이 집 문을 두드리면 집 안으로 들어오게 해 가족들이 먹는 것과 똑같은 상을 차려주기도 하셨다.

그런 그녀의 어머니를 비롯해 그녀의 삶을 바꾼 인물로 그녀는 ‘꽃동네’ 최기동 씨와 오웅진 신부를 꼽았다. 본인이 걸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얻어온 밥으로 다른 걸인을 먹이던 최기동 씨의 ‘얻어 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그것은 주님의 은총’ 이라는 간증과 그 정신을 기반으로 꽃동네를 설립한 오웅진 신부에게 감명을 받아 지금의 헌신을 다짐할 수 있었다고 그녀는 얘기했다.

“어쩌면 주님의 뜻이 아니었을까…”

이야기가 진행되며 조지은 집사는 처음 이민을 왔던 당시의 배경을 설명했다. 한국에서 사업을 하던 그녀의 남편 이병석 집사 가정. 그러나 사업에 실패하여 20여 년 전 브라질 땅으로 이민을 오게 되었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처음 이곳에 발을 내디뎠을 때 깔끔하던 한국과 달리 어딜 가도 보이는 수많은 길거리의 사람들이 익숙하지 않았음을 말했다. 그런 그들을 보며 마음이 아팠던 그녀는 그들이 굶지 않을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를 했고 그 이후 정말로 그런 헌신을 시작하게 된 것이 참 놀라운 일이라고 말했다.

“사업도 했었죠. 원단 가게였어요. 잘 될 때도 있었는데, 결국에는 그것 역시 정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사업을 하던 지난 20여 년 전을 떠올리며 어쩌면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런 일을 겪은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내 그녀는 처음 급식 봉사를 시작하려던 당시를 떠올리며 그 때의 상황을 이야기했다. 본격적으로 이러한 봉사를 계획하던 당시 그녀의 가정 외에 다른 몇 가정들과 함께 뜻을 같이 하기로 했지만 경제적인 부담을 이유로 모든 가정이 봉사를 포기했고 그 때문에 한동안 낙심하여 봉사에서 손을 놓고 있기도 했으나 뒤에서 그녀의 가정을 도와주는 몇몇 손길들로 인하여 다시금 이 일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러한 가운데 오직 주님이 채우신다는 것을 믿으며 봉사에 전념한지가 어느덧 10여 년이 되었다.

“두 민족을 돕기 위해…”

그렇게 힘든 상황에서 봉사를 이어 나가는 그녀의 가정에 수많은 사람들은 더 좋은 조건이 제공되는 다른 도시에서 이 일을 할 것을 권유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굳이 이 봉헤찌로 지역을 고집하는 이유에 대해 그녀는 설명했다.

“이 곳에 있으면 두 민족을 도울 수 있어요. 한인들과 브라질 사람들. 한인들이 대부분 사장으로 있고 고용 직원들이 거의 브라질 사람들인 상황에 서로의 문화 차이와 여러 가지 사정들 때문에 마찰이 일어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 한 명이 길거리에서 밥을 푸고 있다고 생각 해 보세요. 그들 마음에 있는 반발심을 훨씬 더 줄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녀는 이 사역의 가장 큰 보람을 느꼈던 몇 가지 일화를 소개했다.

“어느 날부터인가 몇 년 내내 늘 음식을 받아가던 사람이 보이지가 않아요. 그리고는 잊고 지냈는데 일년 즈음 후에 깔끔하게 차려 입고 와서는 저희 덕분에 열심히 일하여 취직해서 이제는 도움이 필요 없게 되었다고 말해요. 또 한번은 매일 오던 임산부가 몇 년을 안보이다가 조그만 아이 하나를 데려와서 이 아이가 그때 뱃속에서 맛있게 밥 먹었던 아이다 하고 인사를 시켜요. 그럴 때면 이 일을 왜 시작하게 되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돼요. 힘든 것도 다 잊게 되고요.”

그녀는 현재 모교회로 섬기는 ‘우리교회’ 외에도 브라질 교회인 ‘Luz 감리교회’ 에서 브라질 사람들을 위한 주일학교를 개척하여 섬기고 있다고 전했다.

“우리에게 급식을 받는 사람들, 그리고 볼리비아 사람들이 주일 학교에도 찾아오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교회측에서 그다지 반기질 않아요. 그러면 내 탓인 것 같고… 그래서 항상 미안하죠.”

무거운 마음에 작은 한숨과 함께 이야기를 전하는 그녀에게서 깊은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인터뷰를 마치며 끝으로 그녀의 소박한 소망을 전해왔다. 더욱 따뜻하게 밥을 나누고 브라질 사람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도우며 가정이 어려운 어린 아이들을 위해 교육할 수 있는 작은 공간이 생겼으면 하는 것.

그저 한 끼의 식사로 끝나는 것이 아닌 그들의 미래를 바꾸어 주는 사역을 하는 것이 그녀의 희망이고 바람이다. 인터뷰가 마치는 순간 까지도 시종일관 은은한 미소를 띄운 채로 질문에 응하던 그녀. 수 백 명의 삶을 짊어지고 떠나는 조지은 집사의 작은 뒷모습이 유난히도 거대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기사제공=브라질 코리아포스트 이승만 수습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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