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자발적 선거참여가 한인권익신장의 지름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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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자발적 선거참여가 한인권익신장의 지름길"
  • 심흥근 재외기자
  • 승인 2014.04.08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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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카운티판사 선거나선 앤 박 검사 후원회장 맡은 강일한 한인유권자총연회장

LA카운티의 앤 박 검사가 미국 주류사회에 도전장을 내 미한인사회의 시선을 끌고있다. 앤 박검사는 평소 검사로 공직을 수행하면서도 한인사회 관련 각종 봉사단체를 통해 활동을 펴 오면서 한인을 비롯한 미국내 소수민족들이 부지불식간 인종적 차별을 겪고있는 현실에 남다른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 오는 6월에 실시되는 판사선거에 도전장을 던졌다. 앤 박 후보 후원회장을 맡아 동분서주하고 있는 강일한 세계한인 유권자총연 회장을 만나 앤 박이 미 주류사회에 뛰어든 배경과 함께 그가 왜 앤박 후원회장을 맡았는지 들여다 봤다.

△LA 카운티판사직 선거에 도전하는 앤 박 검사 후원회장을 맡게 된 계기는?

▲오는 6월3일 실시되는 선거에 판사직 후보로 나선 앤박 검사 후원회장을 맡은 강일한 세계 유권자총연합회 회장.

▲앤 박 검사는 지인들의 소개로 만나 알고 지낸지 1년이 됐다. 오는 6월 3일로 예정된 LA카운티 판사직 선거에 앤박 검사가 도전한다는 소식을 듣고 내가 좀 나서서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는 순수한 마음으로 후원회에 동참했다.

그 자리에서 사회를 보게 되었는데 이날 오신 분들이 저를 앤박검사 판사선거 후원회장에 만장일치로 추대를 했다. 그 뜻을 물리 칠 수 없었다.  

앤 박 검사가 저의 집을 한번 방문했는데 이런 말을 했다.

공식통계에 따르면 LA카운티에 60만 이상의 한인들이 살고 있는데 약자인 여성보호와 가정폭력 등 제반 문제들을 인종적 편견과 치우침 없이 공정한 판결을 해줄 수 있는 한인출신 판사가 너무나도 부족한 현실이 안타깝다.

앤 박 검사는 판사직 도전에 성공해 한인들에게 불이익이 없도록 살피고 약자를 보호하는 커뮤니티에 봉사하고 싶다고 이렇게 속내를 토로하면서 굳은 의지를 보였다. 앤박 검사를 돕기로 결심한 계기가 됐다.

선거는 도전자의 역량 뿐 만 아니라 전략적인 뒷받침이 있어야 승리 할 수 있다. 판사직에 선출된 여러 사례들과 전례를 분석해 봤다. 나름대로 내린 결론은 미 주류 관료직에 마이너리티 출신이 문을 두드려 입성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역량 뿐 아니라 정치적 로비 또한 병행돼야 그나마 겨뤄볼 수 있다는 게 냉혹한 현실이라는 것이다.  적절한 수준의 선거 후원금 모금도 그래서 절실하다.

과거 사례를 들어보겠다. 남가주 첫 한인판사인 고케네스 장 판사(한국명 장병조)는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에 온 이민 1세대다. 이런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노력한 결과 카운티검찰청 검사로 경력을 쌓은 후 변호사로 활동하던 중 판사로 임명됐다. 당시 한인들은 한인판사를 낸다는 일념으로 기금모금을 했고 순식간에 수만 달러가 넘는 후원금을 모았다. 커뮤니티의 관심과 이런 지원 덕분에 장 변호사는 판사로 임명되는데 성공했다고 알려졌다.

▲오는 6월3일 실시되는 LA카운티 판사직에 도전장 낸 앤 박 검사.
최근 한인 판사 임명이 점차 늘고는 있지만 가주 한인인구에 비하면 한인 판사는 아직 극소수인 실정이다. 판사직은 최고의 명예를 얻는 일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책임이 막중한 어렵고 힘든 자리다.

앤 박 검사는 LA카운티 검찰청에서 20여년간 성실하게 그 직무를 다했다. 40명의 한인검사 중 제일 고참으로 이번에 출마했다. 50대 초반으로 17세인 1980년 부모를 따라 이민 온 1세로 온갖 어려운 환경과 조건을 극복했다. 고교시절 베이비시터, 세탁소 점원 등의 아르바이트와 학업을 병행하는 고단하고 힘든 시기를 버티면서 버클리대학과 UC센프란시스코해이스팅스 법학대학원에 들어가 법조인의 꿈을 이뤘다. 그러나 앤박 검사는 당시 신분과 안락한 생활이 보장되는 로펌취업의 편한 길을 마다하고 봉사의 길을 택했다.

앤 박 검사는 이후 1992년 한인 폭동을 겪으면서 한인 권익과 인종관계 개선을 위해 한인 커뮤니티를 위한 봉사단체에 몸 담고 많은 활동을 한다. LA카운티 검찰청으로 자리를 옮긴 후에도 가정상담소 감독관으로, 한인민주당 등의 단체활동으로, 그리고 차세대들을 위한 여고생 컨퍼런스 등에서 열심히 봉사활동을 했다. 그는 영어 소통에 큰 불편을 겪는 한인 노인들을 도우면서 많은 것을 느꼈다고 한다.
 
또 미국에 사는 한국여성으로서, 한국사회와 미국 주류 법조계를 모두 이해하는 법조인으로서 어떻게 하면 약자의 편에서 공평한 재판을 받게 할 수 있을지 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고민속에서도 노인학대, 가정폭력 등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벌어지는 강력 사건이 끊임없이 발생했다. 사건을 맡아오면서 그는 여성 판사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늘 안타까워했다. 그가 한인여성으로는 최초로 선출직 판사에 도전을 결심하는 배경이 된다. 참으로 존경스러운 분이다.

앤 박 검사의 판사직 승리를 위해서는 나를 포함한 한인동포사회의 후원이 절실하다. 라틴계나 흑인 커뮤니티에서는 그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판사직에 나선 동포후원금 지원을 다차원적으로 경쟁적으로 해오고 있는 것으로 안다. 우리 한인사회도 법적, 제도적으로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고 다시는 LA 폭동 같은 비극이 재현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법조계와 정치권 등에 한인인재들을 진입시켜 자주적 힘을 키워야 한다.

앤 박 검사가 선거에 이겨 당당하게 판사직을 거머쥐는 것이 곧 우리 한인사회의 승리이다. 다시한번 한인사회의 관심과 지원을 부탁 드린다. 한인사회가 유권자 등록과 함께 투표장에 나가 투표해줘야 당선되더라도 뒷심이 커지는 대표성을 갖는다. 동포들의 적극적인 유권자 등록과 투표 또한 재삼 당부드린다. 

△‘세계 한인유권자 총연합회’회장을 맡게 된 계기는?

지난 2012년 4월 11일 치러진 제19대 국회의원선거와 곧 이어 그 해 12월 5일 제 18대 대선이 역사적인 재외선거의 시작이었다. 물론 미주지역에서도 동시에 했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 기억한다. 가장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권리인 참정권행사가 해외동포들에게도 가능하게 된 것이다.

당시 나는 재외동포들의 참정권 행사를 환영하고 적극 동참을 모색하던 중에 전 김재수 LA총영사의 재외선거 투표독려 세미나 참석을 계기로 뜻을 함께하는 분들과 모임을 만들었다. 재외선거 캠페인을 돕는 단체들은 여럿이지만 ‘세계 한인 유권자 총연합회’는 유일하게 본국정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승인으로 사단법인으로 등록돼 공식적으로 활동해오면서 홍보를 포함 보고서를 제출한다.

지난 대선 당시, 본인을 비롯한 유권자 총연합회 회원들이 다각적인 선거 독려 캠페인을 펼쳤지만 아쉽게도 실제 선거 참여율은 5%에 그쳤다. 따라서 재외선거법의 보완과 개정이 절실하다는 것은 모국 정치권에서도 선거결과를 통해 확인한 바 있다. 이 선거를 계기로 선거참여를 높이기 위한 본질적 개선방안과 대책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이에 대한 여러 논의가 있었다. 우선 선거인 등록만큼은 우편으로도 가능케 하고 영사관에서 먼 거리에 있는 동포들도 한 표 행사가 가능토록 순회 투표소 등의 설치 방안 등의 개선책이 필요하다. 차후 재외선거부터는 동포사회 모두에게 축제의 한마당이 될 수 있도록 다각적인 노력을 하겠다.

△제40회 한인축제 대회장을 맡은 소감은?

지난해 40회를 맞아 열린 한인축제는 성공적인 축제 한마당이 됐다. LA한인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는 대표적인 행사로 자리매김 하고 있고 미 주류사회에도 널리 알려져 있다. 축제의 주인공은 주최측이 아니라 참여하는 사람들이여야 한다는 생각으로 축제 모토를 ‘어울림’으로 정했다. 이렇게 발상을 바꿔 한인 뿐 만 아니라 다민족 커뮤니티 모두가 즐길 수 있도록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했던 것이 좋은 호응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주최측이 아무리 좋은 프로그램을 준비해도 관객들이 찾아와 즐기지 않는다면 이는 진정한 의미의 축제가 아니다. 축제마당에서 모두가 어우러져 가족, 우정, 커뮤니티의 일원이라는 동질감을 확인하고 그 중요성을 새삼 확인하는 자리가 축제다. 이런 시간을 갖게돼서 무엇보다 기쁘고 보람있다.

김진형 한인축제 명예대회장과 배무한 전 한인축제 회장의 적극적인 지지와 한인축제 이사진들의 추대를 받아 대회장으로서 주어진 임무에 소홀하지 않도록 긴장하며 본국에서 오신 귀빈들과 부스 한국 농수산 특산물 전시를 위해 각 도별 지방에서 와주신 분들의 불편이 없도록 긴밀히 협조했다. 당시는 대회장으로서 막중한 책임감 때문에 힘들기도 했지만 지나고 보니 참으로 명예로운 경험이었다.

△미국에서 성공한 사업가로서 어렵거나 위기가 닥쳤을 때 어떻게 극복했나?

올해로 벌써 이민생활 39년째를 맞고있다. 사춘기가 채 끝나지도 않은 19세떄 부모님을 따라 이민을 와 보니 어린 마음에 정말 막막하더라. 초기 이민자들이 대부분 그랬던 것 처럼 밑바닥 생활을 모두 경험했다. 식당 접시닦이, 버스보이로 출발해 미군에 입대해 5년동안 근무하면서 각 커뮤니티 출신 병사들과 소통하고 감내한 군생활 경험이 비즈니스 성취와 운용에 큰 도움이 됐다. 소수민족 마이너리티 출신으로서 온갖 풍상과 설움을 다 경험한 셈이다.

하지만 내가 상대를 먼저 이해 하고 배려하는 성숙한 인식을 갖게 한 소중한 경험이었다. 좀 더 나은 수입을 바라보고 의류업에 진출했다. 우선 다운타운에서 바닥일부터 배워가며 차근차근 원단사업까지 손을 댔다. 나름 터득한 사업수완을 발휘해 크게 돈을 버는 좋은 시절도 있었다. 그러다 97년 무렵 세계 원단시장에 큰 변화가 몰아닥쳤는데 이런 트랜드 변화에 예측도 대응도 하지 못해 큰 손해를 본 적도 있다. 전적으로 내가 무딘 탓이었다. 철저한 시장조사와 민감하게 반응하는 의류업 특유의 트렌드 변화에 대처하는 유연성을 터득하는데 결과적으로 비싼 수업료를 지불 한 셈이다.

기억에 남을 만한 신념이라든지 개인적 철학이 있다면?

▲나는 말과 글 속에 있는 현학적인 철학이나 교훈보다는 지금의 나를 있게 한 부모님으로부터 귀중한 삶의 가르침을 받았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30대가 지나서야 철이 든 듯하다. 어린 시절을 뒤돌아 보면 선비집안 안동권씨 가문에서 시집 온 어머니의 평소 훈육이 나를 바른 길로 가게했다. 늘 강조하며 귀에 박히도록 하신 말씀이“사람은 배워야 하고 틈나는 데로 노력하고 어디 가서든지 자기자신의 자리가 어디인지 겸손한 마음 가짐으로 행동하고 남에게 도움이 되는 쓸모 있는 사람이 되도록 힘쓰라”는 것이었다. 늘 겸양과 수성하는 마음자세를 갖게 한 어머니의 이 말씀이 제가 따라야 할 평생의 덕목이다. 늘 가슴 깊게 새기고 있다.

△젊은 후배들에게 바람이 있다면?

유대인들에게서 배울게 적지 않다고 생각한다. 민족적 아이덴티티가 유별나게 강하고 단결력 또한 타 민족의 추종을 불허한다. 익히 알려졌지만 유대인들이 미 주류사회와 정치권에 끼치는 영향력 또한 대단하다. 우리 한민족의 우수성도 유대인들 못지 않다. 다만 갈등의 차이를 줄이고 이해와 협조가 수반되는 민족적 단결력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지 않은가. 그게 아쉽다.

우리 말과 글은 우리의 아이덴티티를 유지시키고 자긍심의 원천인데 최근 자라나는 한인 후세들을 볼 때 적지않게 염려가 된다. 어른을 공경하는 우리 고유의 문화도 점점 퇴색되어가는 것을 주변에서 흔히 보게 된다. 노인네 잔소리로 여길지 모르지만 씁쓸하고 안타깝다.

우리가 한국인으로서 민족적 자긍심을 갖는데 소홀히 해 자칫 겉과 속이 다른 이른 바 바나나와 같은 이중인격자라는 타 민족들을 손가락질을 늘 경계해야 한다. 한인으로서의 자긍심을 갖도록 이민 선배들인 우리 어른들이 먼저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덧붙이고 싶다. 일터에서 늘 부딪치는게 직원들이다. 우리 젊은 한인후배들이 타 커뮤니티 이민자들에 비해서 인내심이 좀 부족한 것 같다는 생각이다. 욕심 부리지 말고 어려워도 참아내는 끈기를 통해 차근차근 저마다의 꿈을 이루길 바란다.

▲앤 박 검사 LA 카운티수페리어 코트 판사 선거 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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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n H. Park – Candidate for LA Superior Court Judge 2014

-후원회장 강일한(213)453–3244

-선거후원회 주소 3700 Wilshire Blvd. # 260 Los Angeles, CA 90010(www.parkforjudge.com)

-판사 투표일 2014년 6월 3일

-부재자 투표 등록일 2014년 5월 15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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