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사회건설협의회 – 유럽 민족민주운동 - 30돌 맞이 기념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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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사회건설협의회 – 유럽 민족민주운동 - 30돌 맞이 기념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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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4.03.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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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수신: 각 언론사, 민족민주운동관련 단체
발신: 민건동지회(준)
날짜: 2004년3월16일
제목: 민주사회건설협의회 – 유럽 민족민주운동 - 30돌 맞이 기념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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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6일 토요일 독일 프랑크후르트 니더라드에 있는 <파울 게르하르트 교회>에서 민건동지회(준)에 의해 „민주사회건설협의회 - 유럽 민족민주운동 - 30돌 맞이 기념행사“가 오후 1시부터 열렸다.

독일 각지에서, 서울, 부산, 광주에서, 또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파리에서, 덴마크에서 많은 옛 동지들, 선배들, 후배들, 동지들의 가족들이 <민주사회건설협의회>(이하 민건회) 창립 30년만에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이날은 해외민족민주운동사에서 뜻깊은 날이었다.


1부 추모제

임희길 공동대표(민건회 창립멤버)에 의해 개최되고, 곧 이영빈목사(민건회 창립멤머요, 조국통일 해외기독자회의 회장)의 추도사가 낭독되었다.

        „1974년 3.1절에  독일에서 유학하던 대학생들, 병원에서 종사하던 간호사들, 지하에서 노동하던 광부들, 목사들, 종교인들이, 독일 각처에서 달려와 독일 수도 본의 뮨스터광장에 모여, 한 목소리로 격분된 주먹을 높이 들고, <군사독재반대>, <유신체제반대>를 외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우리는 이 투쟁을 계속하기 위하여 <민건회>를 조직했지요.“

„이날부터 우리들의 생활은 아주 달라지고 말았지요. 고학하면서 유학하던 학생들은, 민주투쟁을 조직하느라고 많은 시간과 돈을 들였지요. 육체노동으로 벌어서 고국의 식구들을 먹여살리던 간호사들도, 지하광부노동자들도 쉬는 시간을 바쳐 고국사회의 독재만행을 독일사회와 국제여론에 규탄하기 위해 신문, 잡지를 발행하고, 무수한 성명서를 작성하느라고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밤잠을 희생하였지요!“
(민건동지회(준), „자료집“, 프랑크후르트 2004년, 4쪽)

„우리들의 제한된 독일생활에서 연구와 직업수련뿐만 아니라 고국의 <민주사회건설>을 위한 반독재투쟁과 또 남북 사이의 민족화해를 도모하는 작업이 주업으로 되었습니다. 이 투쟁의 시간은 제한없이 오늘까지 계속하여 왔습니다.
……
이 기나긴 투쟁의 길에서 그 끝장을 보지 못하고, 우리의 대열에서 떠나가신 귀한 동지들을 우리는 이 시간에 기억하려 합니다.

이응로 화백, 강돈구 교수, 안상근 형, 공광덕 박사 등 20여명이 넘는 운동 동지들의 명복을 빌어봅니다.
……
미국이 우리땅에서 물러나는 날까지, 독재의 씨가 완전히 없어지는 날까지 그리고 자주적으로 통일을 쟁취하는 날까지 우리는 좌절하지 말고, 변절하지 말고, 굳게 단결하여 싸워 나갑시다!“

이어 재독여성모임의 송금희씨가 이들의 넋을 기리는 진혼가를 불렀다. 그리고 성악을 전공하는 베를린의 양태중씨가 „그대 오르는 언덕“을 불러 참석자들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 갈라진 조국 메마른 이 땅위에 그대 맑은 샘물 줄기여 …“

추도사, 진혼가, 성악 등은 민건회 선배들이, 해외민족민주운동 선배들이 자주 모여 토론하고, 몸을 부대꼈던 이 교회에 장중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었고, 금방이라도 선배들이 우리와 함께 정신적인 대화와 친교를 하는 듯 하였다.

이어 운동의 원로들이 소개되었다. 정규명 박사, 이영빈, 이화선 목사, 김순환, 김순실 선생, 이희세 선생,  오대석 선생, 최기환 박사(참석못함), 한계일 여사(참석못함) 등이 거론되고, 참석자들의 격려박수가 있었다.

이어 이곳 운동단체들의 단체장들이 소개되었다. 조국통일범민족연합 해외본부사무총장 임민식 박사, 유럽본부 의장 이준식 시인, 재독일동포협력회 회장 장일중 선생,  한민족유럽연대의 이종현 선생, 민주노동당 유럽지구당의 오복자 위원장, 재독여성모임의 조국남 총무, 베를린노동교실의 윤운섭 선생, 보쿰 민중모임의 최태호 선생, 송두율교수 석방과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한 유럽대책위의 안숙영씨 등

또 이 자리를 빛내기 위해 먼길을 마다않고 각 지역에서 오신 홍정자 위원장(재미동포연합), 안영민 대표( 월간 민족21), 이명곤 사무처장(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고혜령 박사(국사편찬위원회), 이 곳에 참석하지 못한 국내의 민건회 동지들을 대표해 손덕수 교수(민건창립멤버, 이삼열교수의 부인)와 대형걸개그림을 보내준 광주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소개되었다. 특히 민건회 동지들의 뜻이 담긴 판소리를 들려주기 위해 먼 광주에서 오신 장영환 교수 등이 소개되었다.

이어 각 집에서 온 김밥과 떡을 들으며 지난 시간을 회고하고, 오랫만에 만난 회포를 같이 풀었다. 잠깐 휴식을 취한 뒤, 제2부에서는 발제가 있었다.


2부 발제


첫번째 발제자는 민건동지회(준)의 공동대표인 박대원 선생으로 „민건회 활동의 역사적 의의와 과제“라는 주제로 발제를 하였다.

        „인간과 사회사에서는 30년을 보통 한 세대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런 세대규정은 단지 한 세대가 흘러갔다는 세월타령이라기 보다는 한 세대가 새로운 세대에게 ‚성취한 일과 못다한 일 그리고 해야 할 일’ –역사성 –을 이어 준다는 전환의 의미를 담지하고 있습니다.“
              ……
        민건회는 박정희정권의 비민주적, 반사회적인 유신체제를 철폐하고, 자유와 사회적 평등을 구현하는 민주질서의 확립, 자립경제의 건설, 대중의 생존권보장과 복지향상 그리고 자주적, 민주적,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기본 태도 위에 공동적인 사고와 토론을 통해 국민대중의 민주의식을 고취하고 건설적인 사회참여운동을 전개하는 것을 그 근본과제로 삼았습니다.“ (1974년9월 민건 규약 중)
        ……
        이제 우리들은 새로운 국제정세의 흐름을 예의주시하면서 국토분단으로 인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그리고 부강한 조국을 우리 후대에게 넘겨주기 위해서 지금까지의 통일의 막연한 소망이나 정열을 현실화시킬 수 있도록 하나의 단결된 힘으로 뭉치는 작업을 서둘러야 합니다.“
(1979년3월1일, 민건 제2선언 에서)

1979년 프랑크후르트에서 <3.1운동 60주년 및 민건회 창립5주년>을 맞이해 <민건 제2선언>이 나왔다. 선배들은 지금으로부터 25년전 지금도 유효하고 우리에게 절실한 주장들을 벌써 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1) 한반도 통일의 원칙은 평화, 자주, 민족대단결입니다.
         (2)  군비경쟁을 지양해 이를 민중의 복지비용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6)  근로민중에게 사회적인 부를 공정히 분배하는 제도적 보장을 해야 합니다.
             (8)  언론 출판 결사 집회 사상 신앙의 자유 등 국민의 기본적 자유를 보장해야
                   합니다.“

박대표는 민건동지회 및 우리 민족민주운동의 „과제“로 다음과 같은 것을 지적했습니다.

        „지금은 민족민주운동세력이 행여나 그동안 운동의 전취물에 흡족해 그것을 누리려고 하는 방만할 시기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추스려 각오와 자세를 단단히 할 때입니다. 근현대사에서 나타나 있듯이, 민족과 나라의 자주성이 크게 훼손당하면, 그를 온전히 회복하는데는 수백년도 더 걸린다는 교훈은 여전히 우리에게 적용되고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유럽운동의 민족민주운동사적 특성과 역할은 반유신 민주화운동의 선봉지, 1990년대 조국통일운동의 시발지, 2000년대 6.15시대의 실현지로서 자리매김해 볼 수가 있습니다.“

        „우선 그간의 운동과정에서 생긴 상이한 의견이나 인간적인 간극을 극복하고 진정 우리가 하나가 되는 동지애를 나눌 수 있는 자리가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모든 재유럽운동조직체의 대표자와 실무진이 모여 토론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기를 제안합니다.“

          „우리 시대의 과제인 6.15공동선언을 실현하기 위해 국내뿐 아니라 해외의 운동이 함께 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했으면 합니다. 이를 위해 6.15공동선언 5주년인 내년까지 여러 창의적인 방안을 모아 협의하기를 제안합니다.“


두번째로 임민식 범민련 해외본부 사무총장이 „통일운동의 진로“란 주제로 발제하였다.

        „이제 통일의 가능성이나 통일방안과 같은 이론적 논의에 치우치기 보다는 남북의 화해와 공존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가능할까?  남과 북의 협력과 번영을 가로막는 것들은 무엇인가 라는 아주 현실적인 문제들을 풀어가는 실천단계에 집중해야 할 정세입니다.“

        „변화는 생존의 필연입니다. 변화하는 북한에게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북이 과거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북의 변화는 필연적입니다. 변해왔고, 더 변할 가능성이 있는 북에게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기회를 봉쇄하고 붕괴를 기다리는 미국식 전략은 절대 성공할 수 없습니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침탈’도 서슴지 않는 강대국의 배타적 민족주의가 우리반도 주변에서 기승을 부릴 때가 바로 우리민족의 수난기였다는 과거 역사의 뼈아픈 교훈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민족의 생존과 평화에 대한 침탈 위협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 지 근본적이면서도 시급한 과제에 직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북이 망하면, 남도 망합니다. 남북이 통일되어야 하는 새로운 당위입니다. 민족공조, 즉 „우리 민족끼리“가 통일의 길잡이(로드맵)입니다.“



세번째로 홍정자 재미동포연합 서부연합회 예술분과위원장(이하 위원장)이 „내가 만난 북녘 사람들“이란 제목으로 발제를 하였다. 특히 홍 위원장은 통일을 위해 애쓰신 홍동근 목사님의 부인으로 북을 30여차례 방문하였으며, 북의 이름있는 각계인사 150명을 인터뷰한 기록을 갖고 있다. 특히 원고없이 자유스럽게 북에서 겪은 여러 이야기를 들려주어 참석한 분들의 북에 대한 이해를 도와주었다.

인상적인 이야기는 북에는 가난하고, 못사는 제3세계에서 온 많은 유학생들이 마치 북을 자기들 큰집처럼 생각하고, 아무런 꺼리낌없이 북으로부터 자기 조국건설에 필요한 지식을 습득하고 있단다. 홍선생이 어떤 일로 영어로 말을 걸었을 때, 한 아프리카에서 온 유학생은 „일 없이요!“라며 조선말을 유창하게 말하는 것을 듣고 인상깊은 느낌을 받았다고 전해주었다.

한국의 숭실대학교 총장을 하던 김성락 박사가 미국에 이민 와 사는 동안 북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북의 김주석과 접견한 적이 있는데, 식사시간이 되자, 김주석은 김박사에게 „목사님 기도하시지요!“ 라고 권했다는 일화가 있다. 이 일화는 북을 방문하는 모든 종교인이 다 아는 에피소드다. 북의 관리들은 북을 방문하는 기독교 동포들에게 의례적으로 „식사하기 전에 하는 것 있잖습니까?“ 라고 떠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네번째 발제는 서울에서 온 <월간 민족 21>의 안영민 대표가 하였다.  안대표는 행사전날 자기를 소개하며, ‚3년반전에 월간 말지 기자였고,  2000년 여러분들의 댁에서 신세를 진 적이 있다’고 소개하였다. 그리고 네차례에 걸쳐 금강산과 평양 방북취재를 다녀왔다.

안대표는 발제 „남북 교류의 현황“ 첫머리에서 „현재 남북이 일년에 교류, 왕래하는 숫자를 아시는가“고 질문했다. 여기 저기서 „2000 이오, 3000 이오, 5000 이오“ 라고 숫자를 불렀다. 안대표의 답: „15, 280명 입니다“ 였다. 실제 수치는 모두가 예상했던 것보다 3배에서 5배가 높았다. 그런데 아직도 이곳에는 „친북인사니“, „해외 장기수들“(정치망명을 했던가, 공안사건의 관련자들, 그리고 중앙정보부, 안기부, 국정원이 교포들로부터 고립시키기 위해 도장을 꽉 찍은 자들:필자 주)이 살고 있다니…

필자는 머리속에서 이 숫자를 뒤집으면, 그렇게 많은 인사들이 고립당하고, 시련을 겪고 있기 때문에 많은 남북의 사람들이 자유로이 다니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이런 의미에서 민건회의 업적은 과히 선구적이라고 볼 수 있다. 30년전에 생긴 조직인데도, 우리는 그들의 짧은 귀국과 조국방문도 달성시키지 못하고 있다. 더 나쁜 경우는 송두율 교수같이 검찰로부터„15년의 구형“을 받고, 한국의 보수언론으로부터 온갖 모욕을 받는 경우가 실재상황이다.

안 대표가 규정한 현 시대의 모습은 „냉전, 대결, 상호부정에서 평화, 긍정, 화해의 시대로 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말하는 취지를 요약하면, ‚과거의 시간대에 사는 사람들도 현재 변하고 있는 중이고, 그들과 함께 6.15정신을 이뤄 나가자!’  이제  단순교류, 단순지원을 넘어서 5-10년안에 통일을 준비하고, 협력의 시대를 함께 살면서 상생(相生)하는 문제를 고민하고, ‚통일’이라는 다양한 경쟁력있는 ‚상품’을 개발하고 만들어보자는 주장이다. 또 남북을 이어 일본까지 포함해 동북아시아를 세계물류시장의 중심지로 만들자는 포부 큰 설계도 제시하였다.



마지막 발제 „해외 민족민주운동의 역할과 당면과제“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온 노길남 <민족통신>의 편집인이 하였다. 본인 스스로 장로라고 하듯, 벌떡 일어나 ‚통일’ 부흥회 하듯 열변을 토하기 시작하였다.

지금 시기는 „민족주의 대 제국주의 대결의 마무리 시기“라고 규정하고, 친남 친북 애국세력이 ‚미 하수인’과 막판 대결을 벌여야 하며, „사대주의는 매국“이라고 규정했다. 미국의 대 한반도 핵전쟁 시나리오에서 보듯, 미국은 자기들의 소위 ‚국익’을 위해 한반도를 핵전쟁터로 바꿀 수 있는 정권이기에 우리 한반도에 사는 민족과 그의 자손들은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안된다고 경고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전쟁세력과 한판 싸움을 하기 위해, 우리는 <단결>하고, <단합>해야만 한다. 즉 이 단결과 단합을 추구하기 위해, ‚계급이 먼저냐, 민족이 먼저냐 하는 논쟁’도 뒤로 하고, ‚선통일이냐 선민주냐 하는 논쟁’도 뒤로 해야 한다.

그 다음 남북의 정상이 합의한 원칙, 즉 ‚6.15정신’을 높이 세우고, 그에 반대하는 세력과 투쟁해야 한다. 그리고 지금의 싸움이 ‚주권세력’과 ‚반주권세력’과의 싸움임을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오는 3월21일 ‚국제평화시위’에 여러분의 연대를 실어줘, 세계의 모든 양심세력들과 국제연대를 강화할 것을 강조하였다.

‚단결’을 위해 <과거불문> 자세가 필요, 즉 ‚지금이라도 적이 아니라면 서로 용서하고, 통 큰마음으로 조직화, 대중화 하는 것이 필요하고, 설사 다른 견해차이가 있으면, 억지로 합치려 하지 말고, 시간을 두고 토론하고, 해결과제로 삼아 다음 기회로 미루는 것이 좋다는 <구동존이 求同存異>를 새삼 강조했다.
끝으로 ‚머리로는 이론을 생각하고, 가슴으로는 느끼고, 발로 실천하며, 내부 결속을 다지고, 낡은 사상은 깨 부셔야 한다’는 나름대로의 운동철학을 펼치었다. 그럼으로 통일의 길에 남녀노소 할 것없이 모두 동참케 하는 서로의 지혜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다섯분의 예정된 발제가 끝난 뒤, 특별순서로 <송두율 교수 석방과 국가보안법 철폐를 위한 유럽대책위>에 소속된 안숙영씨가 이제까지 송교수 사건에 관한 일지를 „송두율교수 사건과 국가보안법 철폐“라는 제목으로 발표하였다.
        „사건 초기 보수언론이 주도한 여론재판으로 송교수는 검찰의 기소내용에도 없는 ‚간첩’이 되어 버린 채로, 현재 1.5평의 감방안에서 4개월이 넘도록 냉전시대의 유물인 국가보안법에 옭매여 싸우고 있다.“
        1. 검찰이 송교수에게 적용한 것은 결코 형법상의 ‚간첩죄’가 아니었다. 검찰이 송교수에게 적용한 것은 그동안 ‚국가’를 ‚보안’하는 ‚법’이 아니라, 사실상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폭력’으로 기능해 온 ‚국가보안법’(‚정권유지 폭력법’:필자 주)이었다는 점이다. …
        2. 송교수 사건은 우리에게 민주화가 진전되었다 하지만 그 민주화의 가장 커다란 걸림돌 중의 하나였던 국가보안법을 여전히 폐지하지 못한 채로 남겨두고 있는 우리의 현실에 대해 심각히 되돌아보도록 만드는 하나의 중요한 계기임에 틀림없다.
        3. 북한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교류하고 협력하고 이해하면서 통일로 나아가야 한다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이 근본적 전제가 변화되지 않고서는 우리는 그 누구도 통일에 대해 자유롭게 말할 수 없다는 점에 우리의 시선을 집중해야 할 것이다. …그동안 이 법은 헌법상 보장된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부당하게 제한할 수 있는 법적 근거로 끊임없이 악용되어 왔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4. 이후의 8차에 걸친 재판과정에서도 검찰은 지난 2월11일의 황장엽의 짤막한 증언이외에는 송교수가 (조선노동당 정치국:필자 주)후보위원으로 임명되어 활동했다는 어떠한 명확한 물적증거도 제시하지 못했다.
        5. 길승흠 전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의 ‚핫바지론’이 있다.  변호인측 증인으로 나왔던 길교수는 남북학술회의는 자신이 처음 제안한 것이며 송교수는 남북한 학자들을 연결해 주는 중요한 다리역할을 했다고 증언했다. 검찰이 이어 북한측이 학술회의에서 자신들의 정책을 일방적으로 선전하지 않았냐고 되묻자, 길교수는 ‚그렇다면 남한 학자들은 핫바지란 말이야?’라고 강하게 반박했는데, 이는 국가보안법이 우리의 사고를 얼마나 제약할 수 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6. 송교수를 검찰의 기소내용에도 없는 ‚간첩’으로 만들어버린 보수언론은 ‚간첩’이 아니라고 검찰도 인정한 상태에서 단 한번의 정정기사도 내 보내지 않았으며 이후 최소한의 객관적인 사실조차도 제대로 보도하지 않은 채 침묵하고 있을 뿐이다.
7. 한국과 유럽, 일본, 미국 등에 설립된 대책위를 중심으로 국가보안법 철폐를 위한 투쟁이 고양되고 있다.  우리는 송두율교수 사건 처리야 말로, 한국의 민주화정도와 6.15공동선언의 실현의지 여부를 가리는 시금석이라고 보며, 송두율 교수에 대한 어떠한 처벌이나 추방음모에 반대하며, 하루 빨리 무죄석방할 것을 요구한다.“(필자강조)

안숙영 선생의 잘 정리된 송두율사건 일지를 들어보고, 사람들의 마음이 착찹할 때, 송교수의 큰아들 송준박사가 소개되었고, 옛동지들이 모인 <민건회 창립 30주년과 해외민족민주운동 30주년 기념모임>에 아버지를 대신해, 자리를 빛냈다. 이어 지금 차가운 감방에 앉아 있을 송교수가 이 자리를 상상하며 쓴 글이 <1부 추모제>를 사회했던 박충흡박사에 의해 낭독되었다.
        „비록 몸은 한 평의 작은 공간에 갇혀 있습니다만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 자유스럽고 맑은 것은 저를 지지하고 성원하는 그 많은 분들의 목소리를 항상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목소리 속에 여러분들의 그것도 함께 들렸습니다. 감사합니다.
        … 그러나 저는 이 구치소를 조그마한 한국처럼 느끼고, 지난 37년 경험치 못한 한국사회를 압축적으로 그리고 속성으로 배우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현재 한국사회는 안팎으로 엄청난 갈등이 증폭되고 있는 과도기에 놓여 있습니다. 기득권 세력은 갑자기 잃어버린 고지의 탈환에 혈안이 되어있고, 그러다 보니 자꾸 무리수를 두고 있고 (예를들면, 이번 „노대통령 탄핵소동“:필자 첨가)  정권을 잡았으나 이를 견고하게 다지고 개혁을 추동시킬 힘이 없다보니 갈팡질팡하는, 한 마디로 주인없는 사회처럼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 상황을 국민의 이익과 민족적 이해라는 관점에서 타개하려는 것보다는 당리당략에 몰려다니면서 아우성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갈등과 혼란을 지켜보면서 저는 제일 먼저 이 사회의 흐름을 바로 잡아주는 정론(正論)의 부재를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충격적인 일도 경험했습니다. 저의 재판에 이삼열 교수님은 저의 변호인 측의 증인으로, 오길남(민건회 창립멤버: 필자주)은 검찰 측 증인으로 법정에 섰습니다.  오길남은 황장엽이 소장으로 있었던 <국정원> 소속의 한 연구소에서 밥을 얻어먹고 있군요. 또 한 사람의 검찰 측 증인이 같은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는데 그가 바로 최창동(헌법학자며 범민련 유럽지역 전 회원, 1998년 제명당함:필자 주)이었습니다.
        이 두사람을 생각하면서 떠올린 결론이 있습니다. 극과 극은 통한다는 것입니다. 쓸데없이 과격하게 원칙을 고집하고, 이 결과로 조직내의 불화를 야기시켜 결국은 조직을 파괴하고, 남는 것은 <변절>의 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모든 운동은 중용(中庸)과 인화(人和)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교훈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송두율, „서울 구치소에서 띄우는 편지“, 2004년3월1일 에서)

3부 문화행사

이 3부의 사회는 재독여성회모임의 박정숙 선생이 맡았다. 첫번째로 민건회 창립멤버이며, 김지하 시인의 <황토>를 독어로 번역하였던 시인 김원호 선생의 자작시 „유배지의 파수꾼“이 낭독되었다.
        …
그러나 우리는 나라 사랑하는 다정다감한 다혈질 한국민족/ 거역과 반항이 몸에 베인 억눌린 자들의 아들 딸/ 삼선반대, 굴욕외교반대, 유신헌법반대, 군사독재반대, 반공법반대/ 매맞고 멍들어 굳은 살 박힌 일꾼, 공부꾼, 믿음 꾼들/ 칼잡이들의 서슬 푸른 칼날이 춤추며 난도질할 때/ 두려움, 침묵, 비겁, 계산 훌훌이 모두 다 던져버리고/ 반항의 대열에 끼여 들어 손에 손잡고 낯선 거리 누비면서/ 이 불의, 이 수난을 보라고, 그리고 함께 분노하자고, 목 쉬도록 외쳤었노라.
아아, 우리는 내지 아닌 울타리 바깥 유배지의 속수무책 외지인/… 그러나 우리는 현장 아닌 현장, 드높은 망루 위에 자랑스레 우뚝 서서/ 화광처럼 눈 밝히고, 번견같이 귀 높이 곤두세워/ 내지의 모순, 불의, 부정, 비리 가리키며 고함치는 변경지의 파수꾼/… 사람 위에 사람없고, 나라 위에 나라없는 꿈같은 자유와 평화의 나라가/ 화사하게 다가 올 밝은 날을 그려보는 희망찬 꿈쟁이들./… 글과 말은 연필 촉처럼, 마음과 뜻은 화살같이 뾰족히 날 세웠노라./…
폭군은 갔으나 현군은 보이지 않고/ 민주는 세웠으나 주인잃은 민주 모조품/ 자주와 독립은 허울좋은 하눌타리, 엄연히 상전모신 예속의 나라/ 풍요는 왔건만 굴레는 더 죄이고, 부패의 악취에 온 누리는 질식한다./… 허깨비 민주주의여!
…사나운 큰 짐승들 싸우는 골에 작은 짐승 살아갈 길은/ 한 겨레, 한 핏줄, 한 운명, 한 마음 새 구호 외치고/ 같은 말, 같은 노래 드 높이 부르면서/ 갈라져 잃었던 우리들을 되찾아 포옹하며/ 용서와 화해, 존경과 신뢰로 한 동아리 되는 것/ 그리고 목소리 모은 거역의 크나 큰 한 함성/ 우리는 하나되어 홀로 서겠노라고!/
…큰 뜻 아래 함께 모여 그 때처럼 또 다시 손과 손을 마주잡자/
…우리는 머나먼 외곽 유배지의 초소에 외로이 홀로 서서/ 님 그려 눈물 흘리고, 님 생각에 불안의 긴 밤 눈 뜬 채 새우노라/ 내지를 사모하여 목숨걸고 상소 올리는 우직한 파수꾼/
…드디어 어느날 그리던 땅에 발을 디디고 꿈 나무 심는 꿈 같은 날 오기까지/ 우리는 오늘도 외지의 망루에 높이 서서 고함치는 충정어린 유배지의 파수꾼.“

필자는 이 시의 귀절 귀절을 읽으며,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바로 내 마음이기에, 그래 우리는 „번견“, „희망찬 꿈쟁이들“, „우직하고, 충정어린 유배지의 파수꾼“들.

두번째 순서는 판소리 순서로 지난번 송교수를 위한 „경계를 넘어서“ 라는 문화행사에서 불려졌던 것으로, 제목은 „경계인“으로 송교수의 감옥생활을 묘사한 것이다.
        „(중모리)
        넘다보니 산이요 건너다 보니 강물이로다/  예까지 오니라 넘어온 국경이 몇이나 되며/ 두고 온 세월이 그 얼마디뇨/ 신발만 갈아신어도 고향생각 간절허더니/ 이 내몸은 가막소 경계에 갇혔으니/ 입도 말도 다 묶인 신세/ 옥방과 세상사이가 아득한 경계로구나/ 이 좁은 땅 떵어리 갈라진 겨레붙이/ 남과 북을 가른 휴전선이 경계이고/ 마음속에 그어 놓은 삼팔선이 경계로다/ 슬프고 안타깝다 지역감정/ 동과 서가 경계로구나/ 있는 놈과 없는 자/ 거기가 또 경계이고/ 못 배운 것도 서러운디 학력차별 경계로다/ 남자와 여자 차별은 이 또한 경계 아닌가/ 나는 이 경계를 다 넘고자 지금 여기에 와 있는군아.
        (진양조)
        찾아줄 이 없는 엄동설한 지나진 밤/ 눈아, 니가 나를 반겨주는구나/ 차가운 옥방신세/ 쌀밥같은 고향눈이 푸근히 덮어주니/ 원앙금침이 따로 없네/ 눈이 나린다 함박눈이 나린다/ 옥담에도 쌓이고/ 옥마당에도 쌓이여라/ 산도 첩첩 물도 첩첩/ 오도가도 못한 첩첩으로 쌓이여라/ 옥황상제 문전까지 쌓고 쌓여/ 옥담을 넘고 삼팔선도 넘어라/ 니가 이 하룻밤만이라도/ 세상 경계를 다 지워주거라.
        (세상 경계인이 죄다 몰려 오는 광경이 묘사된다.
        백범 김구/ 윤이상 선생/ 늦봄 문익환/ 가발공 김경숙/ 장준화 선생/ 송두율 선생 등)
        (휘모리)
        …백범의 손을 잡고/ 경숙이의 손 잡고/ 살판 재주넘듯 한바쿠 삐구르르 돌아/ 늦봄 문익환한테로 가 경계를 넘어가니…
        (중중머리)
        얼씨구나 절씨구/ 여기 모이신 벗님네들/ 세상경계가 다 뭣이요/ 갈라진 자리마다 내가 다 바느질 해서/ 기워줄 터이니 걱정마시고 오시오/ 우리는 갈라진 세상 꿰매던 바느질꾼/
        …나랑 함께 경계없는 세상에서 실컷 편하게 여기서 삽시다.“

한국사람들이야 전라도 사투리를 들으면, 고향에 온듯 하디. 어찌나 잘 받아치는지 오신 손님들이 좋아라 박수치고, 소리치고, 얼수하고, 신이 절로 나 이것을 좌우지당 ‚신명’이라 하던가, 얼쑤 좋네…
이 창을 하신 장영환 교수는 전남대에서도 일하시고, 시립국악원 상임단원으로 일하고 계시단다. 여기서 신이 나라 장단 치던 고수는 양재남씨로 공부하는 학생이다.
이 창을 주선해주신 한국에 계신 민건 선배님들에게 감사인사 드립니다.
이어 분위기가 한참 고조된 뒤, 베를린 세종학교(교장 김종한:세종학교는 독일에서  일반 재독 한글학교와는 달리 독자적인 교육 방안을 택하여  난관에도 불구하고 일찍부터 민족교육에 정성을 다한 까닭에 그 열매를 풍성히 이루었음을 보여 주었다.)의 고전무용단의 부채춤과 가면춤이 있었다. 4인조로 만들어 졌는데, 어찌나 사뿐히 치는지, 또 어찌나 재치있게 가면얼굴을 보여주던지 분위기가 우아하고, 해학이 깃들어 있더라. 또 정말 ‚신명’이란 사물놀이패의 장구, 꽹가리, 북소리를 들으니 가슴에 뭉쳐있던 것들이 씻은 듯 사라져버렸다. 어깨가 절로 움직이고, 발이 움직이고, 몸이 움직이는 것이 우연일까? 하여간 정말 잘한다. 아침 새벽 4시에 베를린을 출발해 먼 이곳 프랑크후르트까지 온 정성도 정성이지만, 그들의 노고와 그를 지도한 선생님들의 노력에 감사와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창, 가무와 춤, 놀이가 있으니 이는 우리 선조들이 놀던 것. 그들의 그 놀이문화를 우리는 잊지 않고, 이 먼 독일땅에서도 가꾸고, 아끼고 놀고 있었다.
그 다음 순서는 베를린에서 오신 성악을 전공하는 유학생 양태중씨의 순서였다.
굉장히 우렁찬 목소리로 „그날이 오면“을 불렀다. „…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내 형제 그리운 얼굴들/ 그 아픈 추억도/ 아 짧았던 내 젊은도/ 헛된 꿈이 아니었으리…“
곡이 끝나자, 우렁찬 박수와 앵콜이 여기저기서 뛰어나왔다. 호흡을 다시 가다듬고, 자세를 고쳐세운 뒤, 이한결 학생의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마른 잎 다시 살아나“를 또 한번 불렀다. 분위기는 점점 우아하고, 그윽하기까지 하였다.
이어 민주노동당 유럽지구당원들이 90년대 운동가요를 부르며 행사를 축하해 주었다.

4. 만남의 시간
오후 1시부터 여러 프로그램을 다 소화하느라 배가 고파진 것을 프랑크후르트와 퀠른에 거주하는 선배들의 부인들, 보쿰지역에서 오신 여성선배들,  그밖에도  대식구들의 허기를 채우려고 자발적으로 나선 여러 여성분들의 맛있고, 정성어린 음식을 찬으로 맛있게, 배불리 먹었다. 이곳에서 20년동안 못 먹어본 온갖 맛있는 고향의 나물과 채로 비빔밥을 먹었으며, 또 맛있는 국밥도 먹었다. 그밖의 떡이며, 온갖 잔치집의 음식들이 마련되어 즐거운 비명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너 반갑다 백설기야!“
행사가 있던 교회의 복도며, 여러 방에서는 이야기 꽃이 한창 피었다. „그래, 어디서 무엇을 하다가 이제야 나타나오?“ „그래 아무개는 잘 계시고…“, „그래, 자녀분들도 이제는 안녕하시고, 그래 무엇을 한당가?“ „우악, 확 젊어졌뿌렸네!“ „아! 이게 누구야, 그래 살아있었구만“ „앗, 그렇게 또라져버렸더니, 이제야 오시당가?“ „하여간, 잘왔어!“
자우지간, 한반도의 자손들은 모두가 이야기꾼이가뵈! 그렇게 시간가는줄 모르고 이리 풀고, 저리 풀고 해서 시간이 자꾸 흐르는데…
주최측에서 „다시 모이시요“ 하는 광고를 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식사도 잘 하시고, 이야기 꽃도 피웠으니, 동방예의국처럼 서로 모르는 사람사이에, 또 행사에 축하인사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
저녁 8시 30분이 넘어 한민족유럽연대의 서의옥 총무의 사회로 각 단체들의 대표는 물론, 손님으로 오신 분들의 소개도 있었다. 한국쪽에서는 부산 민주항쟁 기념사업회의 이명곤 사무처장, 국사편찬위원인 고혜령박사, 한국에서 활약하는 민건회원이며 이삼열교수의 부인되는 손덕수교수, 해외에서는 남불에서 12시간 이상 기차로 올라온 연로의 이희세선생. 특히 이희세선생은 이날이 73세 생일이라 동지와 후배들이 „이희세“를 환호하며, 다시 한번 젊어지기를 간절히 바랬다. 선생의 하신 말 „이제 우리가 나이가 들어 거동이 힘들지만, 후배들이 하는 행사에 엉덩이라도 부치고 있으면, 이것이 바로 후원이고 격려이니, 이제 연금생활하는 분들 시간도 많은데 자주 나오시기 바랍니다.“고 후배들을 지원해 주기를 간절히 바랬다. 또 독일의 이웃국가인 덴마크에서 오신 임민식 범민련사무총장, 그리고 이곳 운동단체의 장들이 소개되었다.
재독한인여성모임 조국남 총무, 한민련 유럽본부 정규명 의장, 베를린 노동교실의 김경태 대표, 베를린세종학교의 김종한 교장, 귀향촉진회의 김순환, 신옥자 선생, 한독문화교류협회의 김성수 회장, 한국민중모임의 장경옥 선생,한민족유럽연대 부회장 최영숙 선생, 재유럽노동자모임 이한경 회장, 코리아협의회의 김진향 회장 등 17여개의 단체장들의 인사가 같이 있었다.
특히 원로중에 전 범민련 유럽본부의장이었던 정규명 박사가 불편한 몸을 이끌고 이 자리에 참석했다는 것은 선생님의 조국에 대한, 동지에 대한 사랑의 표현으로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서울에서 민건회 국내행사의 프래카드를 들고, 손님들과 함께 오신 민건회원 손교수는 당신의 남편 등 민건회원이 국내에 먼저 귀국하고, 동지들을 아직도 고국으로 모시지 못한 점을 사과하였으며, 여러 민족민주인사들이 곧 고국을 방문하거나 귀국할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리고 국내에 계신 여러 민건동지들의 뜨거운 인사를 같이 전해주었다. 그래서 민건은 해외-국내의 동지들이 다시 묶이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마지막으로 기통회에서 활동하시고, 북의 기독자들과 대화의 문을 열은 이화선 목사의 마무리 인사말이 있었다. 이목사는 역사적인 민건회 활동을 개관하고 조금 긴 인사말을 하였다.
„평화운동이나 통일운동은 하나님의 지상명령이며, 때와 장소를 초월하여 추진해야 할 기독자들의 사명이기도 합니다. 여기에는 사상이나 제도, 신앙이나 주의를 넘어, 함께 사는 평화적 공동의 길을 찾는다는 하나님의 뜻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라는 서로 다른 상관되는 사람을 만든 것처럼, 서로 다른 상태에서 대화하고 화해하여 정치적으로나 인간적으로 협상하고, 협동한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끝으로 두가지 제언을 하면서 인사말을 마무리하였다.
„첫째. 동서 냉전시대의 종식, 동서독일의 통일, 남북협상의 기회 등 우리 민족 통일의 기회는 최선으로 주어지고 있습니다. 다만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노력하며, 요리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마음의 자세를 바로 잡아야 한다는 뜻.
„둘째는 내것과 네것, 내편과 네편, 남과 북, 여와 야, 보수와 진보, 개인과 사회라는 모든 이원적이고, 상대적인 문제를 ‚네 자신이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예수의 중용의 도 를 가지고 해결하되, 구약의 야곱의 변증법을 구사하는 것입니다.“
„야곱의 변증법이란 하나님과 사람이 서로 맞서있는 대립상태에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히려 사람을 부정하고 하나님을 긍정하는 야곱의 통일방법입니다. 즉 이원론과 상대성을 극복하고, 이기는 길은 그 중 하나를 제거하고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둘이 함께 상존하면서 변증법적으로 문제를 상승 발전시켜 변증법적 결속으로 극복한다는 원리 원칙입니다.“
… „우리 제1세대가 시대의 요청에 따라 작은 힘이나마 합쳐던 것처럼, 이제는 제2, 3세대가 단결 계승하여 좋은 성과를 가져올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이로써 민건회 30주년 창립행사는 또 해외민족민주운동 30년 기념행사는 성황리에 마치었다. 각 단체들이 서로의 의견차이를 뒤로 하고, 서로 협력하여 통일의 길, 어려움에 다시 처한 민주의 길을 힘차게 걷기를 진심으로 바라면서, 성공리에 종결되었다. 많은 인사들이 오고 가고, 손에 손으로, 마음에 마음으로 뜻이 전달되어 좋은 분위기를 이곳 해외에 만들어 가기를 더불어 기원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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