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의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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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초상화
  • 김충석
  • 승인 2013.12.04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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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라가 요란하게 휘몰아 치더니 건너편 아파트의 창문이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다행히 사람은 다치지 않았다. 울란바타르는 분지이지만 강줄기 따라, 산골짝마다 불어대는 칼바람이 예사롭지 않다. 내가 사역하는 언덕배기에는 10 채의 게르가 설치되어 있는데 겨우살이를 하려고 커다란 돌덩이를 매달고 있다. 그래도 바람은 게르 기둥을 부러뜨리고 지붕이 날아가는 소동을 몇 차례 겪게 한다. 혹한의 한밤중에 난리를 피운 적이 몇 번,

걸인 공동체 사역자인 나에게 많은 사람들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를 그만하라고 책임없이 말을 던지곤 한다. 고마운 말이지만 아직도 내 맘에 동의하지 못하고 있다. 정부가 버리고, 한 때는 죽도록 사랑했던 가족들이 포기한 이들을 외면한다면 내 마음이 그다지 편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렇다고 내가 무엇이 있어서가 아니고, 그들보다 삶의 계층이 한 단계 나아서도 아니다. 고상한 선교사역도 무수한데 하필이면 걸인사역인가? 나 스스로도 끝없이 던지는 질문이지만 답은 없다.

이러한 사역 가운데 걸인들의 삶을 대하고 무언가 조금이라도 준다는 쓸데없는 자부심을 더해 가려는 의도가 숨겨져 있다면 나는 얼마나 추한 양심의 소유자일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이제까지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계층의 이들을 위해 일하면서 우월감이나 저들의 비참한 삶을 대하며 거룩한 사역이라는 사치스럽고 냉소적인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 그렇다면 얼마나 나 자신이 비열한 인간이고 수준 이하의 목회자인가?

가련하기 이를 데 없는 저들의 주변에는 그들을 외면하고 무언가 나누어야 하는 기본적인 양심을 묵살해 버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지 모른다. 그렇지만 그들의 행위가 옳은지 그른지는 깊이 생각해 보고 싶지는 않다. 대체로 나의 사역을 돕는 보이지 않는 손길들도 같은 맥을 이루고 있어 감사한 마음이다.

걸인들의 비참한 삶을 바라보며 몇 덩이의 빵을 던져주기도 하고, 어깨가 다 보이는 옷을 벗기고 수집해 온 옷을 입혀 주고, 또 영하 40도 기온에도 비닐로 발을 칭칭 감고 다니는 발을 보며 안전화를 수송해 신겨주는 일은 결코 수월하지는 않다. 다만 모두가 주기 이전에 비난하고 매도하며 무책임한 인생이라고 치부하는 세상에서 그래도 저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고민 가운데 서 있다.

우물을 파 주고 비누를 사 주어도 씻지 않아 시껌댕이 손등이 터져 피가 엉켜 얼어 붙은 것을 보면서 면장갑을 들여 오고, 한 번만 걸쳐도 빛깔이 죽을 정도의 목덜미에 사랑의 목도리를 손수 떠준 것을 걸어주며 따스한 세상을 살라고 할 때마다 저들의 눈가에 이슬이 맺히는 것을 볼 때 나도 모르게 내 목젖이 울컥하기도 한다.

한 번은 맨홀에서 나오는 사람과 눈이 마주치게 되었다. 초겨울에 무엇을 먹고 나왔는지 입 주변에는 하얀 가루가 묻어 있었다. 간단한 인사를 하고는 가방에 있던 면장갑을 하나 건네 주었더니 말이 없다. 왜 이런 것을 주는 이유가 뭔가 따지는 듯한 눈빛을 뒤로 하고 걸음을 재촉했다. 도시 문명이 전혀 모르는 맨홀의 세계가 궁금하다. 대략 들어서 안다. 어느 곳은 머리를 들지 못할 정도로 얕아 허리를 구부리며 지낸다고 한다. 그 안에서 화장실, 주방, 침실이 엉켜 있는 복합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또 남녀의 구분도 없다. 때론 술기운에 싸우다 사망 직전에 도달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병들어 죽은 사람도 발생하기도 한다. 정부에서는 맨홀을 잠가 버리는 정책을 폈지만 그들의 생존본능을 막을 길은 없는 듯하다. 그래도 그곳만큼 온기 있는 절대적인 세상은 없기에, 매일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고 휘청거리는 걸인들의 몸짓과 눈빛을 보며 때론 나 자신도 어디로 향하는지 망각한 채 하루를 지내기도 한다. 아니 그런 시간의 연속일 게다.

걸인들의 넓은 등벽에는 많은 분노와 애환이 서려 있다. 자신의 무책임과 잘못으로 버림 받았지만 마누라를 향한 증오가 깊이 박혀 있고, 그래도 아비로서 보고픈 아이들의 얼굴이 그려져 있는 듯 하다. 어디 그뿐이랴!

걸인 공동체 주변에 사는 주민들은 오래 전부터 항의가 빗발치고 있다. 걸인보다 조금 낫다는 우월감 때문일까? 간혹 쓰레기 봉지가 담장 안으로 던져져 있다. 주민들이 버린 것이다. 환경이 열악하기에 더 동네 개들이 몰려 든다. 이것은 주민들을 위협하는 요소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웃을 향해 성폭행적인 언사나 행동이 잦아 문제가 되기도 했다.

그것이 전부라고 하면 다행이지만 간혹 싸우다가 돌로 머리에 구멍을 내고, 손가락이 절단 직전까지 이른 사건이 있어 병원에 실어다 준 적이 있다. 하지만 지독한 냄새 때문에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고 나오는 웃지 못할 일을 경험하기도 했다.

그렇다 할지라도 값싼 빵 한 줄 먹어보라고 주지 않으면서 집단 야유와 돌을 던지고 있다. 주민들을 위해 우물을 제공하기도 하지만 걸인 공동체 안에 있는 물을 안 먹겠다는 자존심이다. 4륜 구동 자동차 조차 올라갈 수 없는 동네에 살면서 알량한 자존심은 여전한 것 같다. 걸인 공동체 안에 목숨을 연명하고 있는 걸인들이나 지역 주민들은 거센 바람과 흙먼지, 가난과 문화혜택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환경은 다를 바 없다. 백지장 차이에도 행복을 누릴 수 있고 그것으로 삶의 버팀목이 된다면 다행스런 일이다.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가난, 술중독, 가정 파괴, 기쁨을 상실한 고독하고 처참한 인생들을 바라보면서 아무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해가 거듭할수록 높은 빌딩이 세워지고, 고가의 유럽 자동차들이 도로를 점거할 정도로 즐비하지만 정작 빵 한 줄이 없어 허덕이고, 온갖 질병을 안고 있으면서 아프다는 말 한마디 못하고 추운 겨울을 나는 저들에게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하는 의문만 겹겹이 쌓아간다. 더욱이 목회자로서, 지난 시간 동안 의미도 모르고 강단에서 외쳤던 언어들이 이들 앞에서는 아무런 뜻이 없다. 오히려 가식적이고 그렇게 살지 못하면서 그런 것처럼 살아온 이중적이고 초라한 모습이 걸인들의 삶을 보면서 낱낱이 고발되고 있다.

늘 불만스런 표정을 감출 수 없었던 지난 시간들보다 점점 내가 얼마나 풍요한 삶을 살고 있는지 깨닫게 된다. 감사라는 단어의 의미를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인사로 하는 말이지만 무엇이 필요하냐고 묻는 이들이 종종 있다. 앓는 소리를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선교사이지만 정작 그러한 말 앞에서는 ‘괜찮다. 다 있다. 건강하다. 충분하다’ 이러한 상투적인 동사들로 답을 한다. 이것을 본 어떤 이는 나에게 위선자라고 질타한 적도 있다. 선교사가 얼마나 필요한 것이 많은데, 가족들이 얼마나 힘들게 살고 있는데, 역반응을 보인 내가 위선자라는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어쩌면 가족 앞에서는 실상이 아닌 허상의 존재로 살고 있는지 모른다.

기도할 때마다 습관적으로 하는 내용이지만, 걸인들에게 빵 한 조각 나눌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하지 말고, 그들을 도외시 하거나 비난할 정도로 비양심적이지 말고, 내가 아파 돌볼 수 없을 약하지 말고, 절망 가운데 살고 있는 저들에게 희망을 줄 수 없을 정도로 나약한 신앙인이 되지 않게 해달라고 애원하다시피 하는 중얼거림이 벽지마다 박혀 있다.  

끝이 보이지 않고, 연기와 먼지로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몽골의 을씨년스런 밤, 폭설을 예고하는 듯한 검은 구름이 하늘 전체를 감싸고 있다.

김충석(몽골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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