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봉길, 장제스, 카이로회담, 그리고 독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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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장제스, 카이로회담, 그리고 독립
  • 윤주(매헌기념관 관장)
  • 승인 2013.08.07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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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종전을 앞두고 100여개 식민지 국가들은 전후 연합국으로부터 독립을 보장받기 위해 저마다 온갖 노력을 다했다.
그럼에도 연합국 정상들은 카이로회담 선언문에서 유일하게 대한민국의 독립 보장만을 포함시켜 전 세계에 공포했다. 그 이유는 윤봉길의사의 상해의거에 큰 감명을 받은 장제스 총통의 특별한 배려 때문이다.
1932년 1월 28일 일본군이 10만 병력과 비행대로 중국 상하이를 기습 공격하여 상하이사변이 발발했다. 30여만 명의 중국군이 항전하였으나 결국 패전하여 상하이를 점령당하고 외곽으로 후퇴했다. 수많은 사람이 죽고 다치는 피해를 입은 4억 중국인들이 치욕과 울분에 떨고 있던 그해 4월 29일 윤봉길의사는 상하이 홍커우공원에서 열린 일본군 전승기념식장을 공격하여 침략군 전쟁범죄자 수괴를 섬멸했다.

중국인들은 자신들의 원수를 대신 갚아준 윤 의사에 열광하며 상해보위전 순국열사로 추앙했다. 윤 의사 의거 이전까지만 해도 한국 독립운동에 관심조차 없던 장제스 총통도 중국 각지 군관학교를 순회 강연하면서 조선 청년 윤봉길 열사가 중국군 30만 명이 하지 못한 일을 혼자서 해냈다고 격찬했다. 이때부터 장제스는 임시정부를 정부로서 예우하며 물심양면으로 적극 지원했고 중국 군관학교 낙양분교에 한국인장교훈련반도 개설해주었다. 이후에도 상해의거를 잊지 않고 평소 윤 의사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기회를 살피던 장제스에게 마침내 절호의 기회가 왔다. 1943년 6월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이 미영중연합국 정상회담을 제의해온 것이다

미국과 영국은 중국군을 이용해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던 버마(미얀마)를 공격해 일본군을 버마전선에 묶어두고, 호주로 후퇴해 있는 맥아더의 태평양군단을 반격전으로 돌릴 생각이었다. 따라서 미국은 중국의 협조가 절실히 필요한 때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개최된 카이로회담에서 미국은 회담 둘째 날 한국문제에 대해 미영중 3국 신탁통치 안을 제안할 예정이었고, 이 안에 중국도 동의하리라고 믿었다. 이를 간파한 장제스는 회담 첫째 날인 11월 23일 한국 독립의 보장을 선언문에 넣어 발표하자고 기습적으로 제안했다. 이에 미국의 루스벨트와 영국의 처칠은 크게 당황했다. 특히 처칠은 자국 식민지 인도의 독립요구에 미칠 영향을 두려워한 나머지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문제 논의 자체를 반대했다. 그러나 중국에 부탁할 일이 많아 회담을 제의한 루스벨트는 절충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결국 루스벨트의 중재로 ‘적당한 시기’와 ‘적당한 절차를 거쳐서’라는 내용을 넣는 조건으로 한국독립의 보장을 공포해 종전 후 우리는 즉시 광복을 맞이했고, 이로서 장제스는 윤의사의 은혜에 보답했다. 한국의 독립 이후에도 윤의사에 대한 장제스의 사랑은 각별했다.

▲ 장개석 친필 휘호.
1966년 2월 15일 동남아 순방길에 자유중국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자리에서 장제스는 윤봉길의사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고 그해 쌍십절에 윤의사 동생 윤남의(尹南儀)와 아들 윤종(尹淙)을 초청하여 국빈으로 예우했다.
광복절을 맞아 조국독립의 발판을 마련한 윤봉길의사와 우리나라의 독립에 크게 기여한 장제스 총통에게 한없는 존경과 추모의 마음을 바치며 장제스가 윤봉길의사의 위업을 기리기 위해 쓴 휘호 ‘장렬천추’를 가슴 깊이 새긴다. 

윤주 (매헌기념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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