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학교와 정체성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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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학교와 정체성 교육
  • 김태진
  • 승인 2013.07.18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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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맨해튼에서 동포 아이들을 가르친 8년, 그리고 한국에서 재외동포교육 관련 일을 지속하면서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있는 생각은 ‘정체성(identity)’이다.

이 용어를 처음 사용한 에릭슨(Erikson)조차도 불확실하고 광범위한 것으로 남겨두었을 만큼 뜬구름처럼 형체가 잡히지 않는 그 정체성 말이다. 이 개념은 논리학, 철학을 넘어 사회학, 교육학 등 여러 학문에서 다루어지고 있고, 특히 재외동포 후세 교육을 논할 때는 약방의 감초처럼 빠지지 않는 주제이다. 그러나 정체성에 대한 교육적 접근에 있어서 우리는 이 개념을 단순한 구호처럼 거론하고 있지는 않은가?

내가 일했던 맨해튼 한국학교에서의 경험을 통해 느꼈던 정체성 관련 이야기이다.
한 백인 부부가 한국인 아이를 데리고 한글학교에 왔다.
“용규가 갓난아이일 때 한국에서 입양했어요… 우리 부부는 용규가 ‘한국’에 대해 배우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려주고 싶기 때문이지요....”
이 말을 들었을 때의 감동과 함께, 한국어를 전혀 모르는 그들이 입학원서 ‘한글이름’ 난에 쓴 한글 ‘용규’는 아주 특별한 활자로 내게 오랜 기간 각인되어 있다. 아니, 썼다기 보다 ‘그렸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하다. 발음뿐만 아니라 활자로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그 ‘모양’을 외운 것이니까.

그들은 용규가 한 인간으로 온전히 성장하기 위해선 육체적·정서적 성장을 위한 환경도 필요하지만 ‘자신이 누구인가’를 제대로 아는 것이 중요하기에 입학이 가능한 4살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한글학교를 찾은 것이다. 
또 다른 경우도 예사롭지 않다.
“알버트와 올리비아는 왜 한글학교에 왔어요?”
“우리는 ‘한국의 자손’이기 때문입니다. 외할아버지의 성함은 박영준이고, 그 분은 한국의 참전용사였습니다...”

한국 교포 학생의 대답이 아니다. 한 한국 남자가 미국으로 건너가 러시아계 여자와 결혼하여 딸을 낳고 그 딸이 성장해 흑인과 결혼하여 두 자녀를 낳아, 이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의 나라인 '한국'을 배우러 온 경우이다. 그렇다면 이 아이들 정체성은 어떻게 확립해야 할까? 부계를 따르고, 외모도 흑인에 속하니 ‘아프리카계 미국인(African–American)’것이 맞을 듯싶다. 그러나 그렇게 단순하게 규정지을 수 없는 또 다른 혈연이 분명 존재한다. 그렇기에 어머니는 모계 쪽 조상에 관한 계보를 상세히 알려주었으며, 거기에 그치지 않고 한글학교 문을 두드린 것이다.

한 한인 학부모는 자녀를 한글학교에 보낼 생각을 안 하고 살아왔다. 그러다 자녀를 통해 한글학교의 필요성을 알게 된 경우도 있다.
“엄마, 마이클 머리는 노란색인데 내 머리는 왜 검은 색이야?”
“응, 그건 네가 한국인의 피를 물려받았기 때문이야. 엄마 아빠 머리도 검은색이잖아...”
“싫어! 나도 마이클처럼 노란 머리할래...”
아이가 유치원에 들어가면서 또래 친구들과 자신이 다른 것에 대해 사사건건 질문하고 아무리 설명을 해주어도 백인 친구와 같은 것으로만 하겠다고 때를 쓰니 한국계임을 스스로 인식할 수 있는 환경에 놓이게 해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이렇듯 정체성은 머리로 외우거나 이해해서 하루아침에 알게 되는 지식이 아니다. 매주 토요일이면 한글학교에서, 나와 비슷하게 생긴 친구, 선생님, 학부모를 만나고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배우며, 그것이 한 해, 두 해 쌓여가며 자연스럽게 생활의 일부로 자리 잡으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체득하는 것이다. 결코 머리가 아닌 온 몸과 가슴으로...

재외동포 교육의 주요 기관으로 자리 잡은 한글학교는 전 세계적으로 2,000 여개가 있다. 규모도 커지면서 나라별, 대륙별, 세계적 협의회가 만들어져 전 세계적인 네트워크를 가진 단체로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루었다. 그러나 각각의 한글학교가 그 규모와 조직적 발전에 상응할만한 질적 성장을 했는지는 의문이다. 군소학교의 산재, 영세성, 비전문성의 난제가 계속 남아 있고 지역사회 내에서의 위치 및 존재감 또한 미약하다고 본다. 어쩌면 대부분 한글학교가 고립된 섬처럼 한민족끼리의 기관으로서만 존재하고 있지는 않은지, 각국 한글학교 현실에 맞는 맞춤형 지원 등 총체적 점검 또한 필요할 것이다. 이를 통해 한글학교가 단순한 언어교육기관이 아닌 정체성 교육의 요람으로서 양적 성장 못지않은 질적 성장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원고에 사용된 이름은 모두 가명임을 밝힌다.
*한글학교: 현지에서는 대부분 ‘한국학교’라고 명칭하고 있으나 재외국민교육을 위해 교육부가 설립한 정규학교인 ‘한국학교’와의 구별을 위해 한국에서 사용하고 있는 명칭인 ‘한글학교’로 썼음을 밝힌다.

김태진 (사)한국문화국제교류운동본부 사무국장, 전 맨해튼한국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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