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기록으로 남겨야 문화가 되고 역사로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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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기록으로 남겨야 문화가 되고 역사로 된다
  • 김경희 (주)지식산업
  • 승인 2004.02.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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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희 지식산업사 대표

1994년 10월 초 서울발 프랑크푸르트 행 대한항공(KAL) 비행기 안에서였다. 시기 각각 시베리아 항로 위를 나르는 기내 벽보판에는 출발 기점 몇 백 킬로, 도착예정 지점 몇 백 킬로가 표시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무렵은 ‘세계화’냐 ‘ 국제화’냐가 화두일 때였다. 문득 비행기가 날고 있는 구름 밑에는 ‘우리 겨레가 민들레 씨앗처럼 살고 있겠지’ 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만주, 시베리아, 유럽 할 것 없이 19세기 말 이래 우리 조상들은 못 살고 떠밀려서 5대양 6대주 어느 곳에도 살 만한 곳을 찾아 헤매다가 정착했고, 또 20세기 중반부터는 더 적극적으로 방방곡곡에 나가서 살고 있지 않는가.
이제 우리 겨레는 세계 속에서 다른 나라 사람들과 유무상통하면서 살 수밖에 없는 시대로 접어들고 있는데, 그렇다면 일찍이 외국에 나가서 천신만고 끝에 성공한 이들도 있고, 다수는 성공했다고 자랑할 만?내세우지는 못하더라도 살기 위해 겪은 수많은 이야기들이 바로 오늘과 내일의 우리 후손들에게는 큰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성공한 이들의 이야기는 거의 알려졌지만, 실패한 이들의 감추어진 이야기가 더 절실하고 따라서 후생들에게 소중한 자산이 되지 않겠는가.
졸다가 깨다가 하는 장거리 비행 속에서 생각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렇다. 나라 밖(해외) 한국인들의 삶의 기록을 이제라도 남기도록 하는 일이 매우 의미있는 일이 되겠다. 마침 정부에서 광복 50주년 기념행사를 대대적으로 한다니, 아마 이러한 일을 함직하다. 그 행사는 조직위원회에서 알아서 하겠지, 하고 잊어버리고 있었다. 한달 남짓 뒤에 광복 50주년 기념행사 목록이 발표되었으나, 이 문제는 빠지고 없었다. 아쉬웠다.
이제 나라도 이 일을 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혼자의 힘만으로는 어려워 언론사 한 두 곳을 찾아가서 협의했다. 문화일보사와 서울방송사(SBS)가 동참했다. 그리하여 광복50주년 기념 해외한국인 기록문화상 운영위원회를 조직, 그 두 회사와 지식산업사가 공동으로 주최하고 공개모집을 하여 1996년 봄에 대상작 <한국인 멕시코이민사>를 포함한 시상식을 치뤘다.
그 행사는 광복 50주년 기념행사였기에 1회뿐일 수밖에 없었다. 여러 사람들이 계속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내었고, 계속할 바에는 해외동포만이 아니라 국내까지 범위를 넓히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는 견해도 강력히 제시되기도 했다.
사실 우리 겨레는 조선왕조 말기인 19세기까지는 세계 어느 민족에 못지 않은 기록의 민족이었다. 선비들의 일기나 시(詩), 편지, 만사(輓詞)까지도 모았다가 나중에 문집으로 후손이나 후생들이 편찬․간행했고 규방에서는 내방가사나 편지들을 남겼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한말 이래 외세에 짓밟혔을 때, 그리고 해방 후 분단과 권위주의 정권 시대 이래 기록은 곧 화를 부르는 꼬투리가 되기에 될 수 있는대로 기록하지 않았고, 있던 기록마저 감추거나 없애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더욱이 19세기 말부터 오늘날까지 백년 남짓 우리 겨레가 나라 안팎에서 겪은 삶의 궤적은 격동의 역사 그 자체였다. 서세동점의 물결에 떠밀려 세계무대에 등장했고, 마침내 일제에 짓밟혔다가 가까스로 그 굴레에서 벗어났지만, 남북 분단으로 이어져 한국전쟁이란 동족상잔을 겪어야만 했다. 그러나 20세기 중후반부터 우리는 세계사의 객체와 대상에서 벗어나, 이제는 작지만 그 주체의 하나로 발돋움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 겨레가 나라 안팎에서 끈덕진 생명력을 바탕으로 근현대사를 살아온 삶의 기록은, 우리 겨레 후손만이 아니라 세계 인류의 자산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작년(2003년)부터 나라안팎 한국인 기록문화상 공모를 다시 시작, 시상했고 이어 올해 제3회 나라안팎 한국인 기록문화상을 공모한다. 뜻있는 이들의 동참과 협력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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