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봉길 의사가 존경한 '석오 이동녕'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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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의사가 존경한 '석오 이동녕' 선생
  • 고영민 기자
  • 승인 2013.03.20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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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오 초상화, 윤봉길 의사 자필 이력서서 발견…1930년대 초 제작 추정
이동녕 선생 서거 73주기… "조국 독립과 민권국가 건립에 생애 바쳐"
▲ 석오 이동녕 선생 초상화.[자료제공=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사단법인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의 윤주 부회장(사단법인 효창원7위선열기념사업회 부회장)이 지난해 매헌(윤봉길)전집을 편찬하면서 발견한 이동녕(李東寧) 선생 초상화를 본지에 보내왔다.

윤 부회장은 “지난 3월 13일은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초대의장과 임시정부 주석을 역임하며 조국독립에 헌신한 석오(石吾) 이동녕 선생이 서거한 지 73주기가 되는 날이다”며, “이날을 보내며 언론에서조차 무관심으로 보내는 현실을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윤 부회장에 따르면, 이 초상화는 1930년대 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윤봉길 의사가 의거(훙커우 공원 폭탄 투척) 2일전(1932.4.27)에 쓴 자필이력서(11쪽)에 첨부돼 있었다. 윤 부회장은 “윤봉길 의사가 평소 존경하던 임시정부 주석 초상화를 소지하고 있다가, 이력서를 쓰면서 말미에 첨부한 것으로 사료된다”고 설명했다.

또, 윤 부회장은 “참고로 윤봉길 의사 상해 의거 때 백범 김구 선생은 임정주석이 아니고, 재무장이었으며, 임시정부 주석은 이동녕 선생이었다”고 강조했다.

석오이동녕기념관(천안시 동남구 목천읍)에 따르면, 1869년 9월2일(양력 10월6일) 충남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동리에서 의성 군수 등을 지낸 교육자 이병옥의 장남으로 태어난 이동녕 선생은 독립협회 가입을 시작으로 언론·교육활동, 청년회 조직 등을 통해 개화민권, 항일구국운동을 전개하면서 이후 조국 독립과 민권국가 건립에 전생애를 바쳤다.

을사조약 체결에 대한 연좌데모 투쟁을 벌이다 옥고를 치른 후 북간도 용정촌으로 망명해 우리나라 최초의 항일민족교육기관인 ‘서전서숙’을 설립해 독립운동 인재를 양성했고, 귀국해 ‘신민회’ 조직에 참여했다. 1910년 다시 서간도 유하현 삼원보에 망명해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해 해외 동포들의 힘을 모으고, 독립군 양성에 전력했으며 무오독립선언에도 참여했다.

3·1운동 후 임시정부 수립의 주역으로서 임시의정원 초대의장으로 국호, 임시헌법, 관제제정, 민주공화정부수립을 선포했다. 이후 의정원의장, 국무총리, 국무위원, 주석 등의 중책을 맡아 어려운 시기 임시정부를 실질적으로 이끌었고, 한국독립당, 한국국민당 당수로 정당통합 운동에도 노력했다.

1940년 72세를 일기로 급성폐렴으로 중국기강에서 서거, 임시정부 국장으로 모셨고, 광복 후 김구의 주선으로 유해를 봉환, 사회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해 오늘에 이른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에 추서됐다.

[고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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