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6학년 교과서에 실린 재외동포 이야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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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6학년 교과서에 실린 재외동포 이야기(2)
  • 김정희
  • 승인 2004.02.1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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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레이스키들의 생활상

"형님, 볼고그라드로 갑시다."
"글쎄......."
동생인 빅토르 씨의 말에 형인 아르카디아 씨는 말꼬리를 흐렸습니다. 이들 형제의 말을 곁에서 듣고 있던 아버지 한 니콜라이 씨는 "나는 죽어도 그 곳으로는 안 간다."라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1998년 8월,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의 한 니콜라이 씨 집에서는 새 이주지를 두고 가족들 사이에 의견 차이가 있었습니다. 어머니 텐인선 씨는 "더 이상 타향살이는 못 하겠다. 고향 연해주로 가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고민하던 아르카디아 씨는 부모의 뜻을 따르기로 하였습니다.
그 해 10월, 이들 가족은 볼고그라드로 떠난 동생을 제외하고, 모두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탔습니다. 1937년에 강제 이주로 인해 떠나와야 했던 한 맺힌 그 길 위에 다시 선 것입니다.
"퇴레(안녕하세요?)...... ."
발트 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 시에 있는 한 한국 식당 주방에서 누군가가 앞치마를 두른 채 에스토니아어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바로 식당 주인 유 아나톨리 씨입니다.
그는 벌써 두 차례나 에스토니아 국적 취득 시험에 떨어졌습니다. 유씨는 "이번에는 기필코 국적을 따내겠다."며 주방에서 틈틈이 공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독립 후, 에스토니아는 공용어를 러시아 어에서 에스토니아어로 바꾸고 에스토니아어를 하지 못하는 소수 민족에게는 국적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한 때 500여 명에 이르던 에스토니아 한인들은 지난 10년 동안 절반 정도가 정든 땅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러나 지난 50년간 발트해에 뿌리를 내린 200~300명의 한인은 국적을 포기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뀐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애쓰고 있는 것입니다.


재외 동포들을 이해하고 사랑하려는 마음을 다져 봅시다.

동포 학생들의 구슬땀

"서로 도와 가며 시련을 이겨 내는 이재민들의 모습은 저희에게 커다란 감동을 주었습니다."
이것은 모국 체험을 위해 한국을 방문한 250여 명의 재외 한인 동포 학생들이 수해 복구 현장에서 봉사 활동을 마친 후에 한 말입니다.
재외 동포 재단의 초청으로 모국에 온 이들의 원래 일정은 판문점과 땅굴 견학이었습니다. 그러나 조국의 재난 소식을 들은 학생들은 자체 회의를 열어 애초에 계획된 일정을 뒤로 미루고 먼저 수해 복구에 참여하기로 하였습니다.
난생 처음 보는 처참한 수해 현장에 학생들은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몰라 한참 동안 머뭇거렸습니다.
그러나 건장한 남학생 몇이 팔을 걷고, 힘든 복구 작업을 하고 있는 이재민들에게 성큼성큼 다가갔습니다. 그들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복구 작업을 돕기 시작했습니다.
곧, 그들의 얼굴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습니다. 금세 진흙투성이가 된 이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나머지 학생들도 하나 둘 합류하기 시작했습니다.
쓰레기를 들추어 낼 때마다 오물이 튀고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찔렀습니다. 하지만, 누구 하나 언짢은 표정을 짓지 않았습니다. 두세 명이 힘을 합쳐 무거운 물건을 들 때에는 한국인 교사들이 가르쳐 준 대로 '하나, 둘, 셋'을 힘차게 외칠 줄도 알게 되었습니다.
이국적인 모습의 학생들을 보고 어색해하던 주민들도 열심히 일하는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정말 고맙다."는 말을 되풀이했습니다.
이 날 오후, 학생들은 이재민 대피소를 방문하여 이재민들을 위로했습니다. 몇몇 학생들은 시름에 젖어 있는 이재민들을 대하고는 함께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오후 늦게 학생들은 지친 몸으로 버스에 올라탔습니다. 옷은 진흙투성이가 되었고, 몸에서는 고약한 냄새마저 풍겼지만, 이들의 눈에는 하룻동안 온몸으로 체험한 따뜻한 모국 사랑이 가득 배어 있었습니다.


자랑스러운 재외 동포
  
2003년 3월 5일, KBS 신관 텔레비전 공개 홀에서 제 11회 KBS 해외 동포상 시상식이 있었습니다. 이 상은, 세계 곳곳에서 한민족의 긍지를 지키며 인류를 위해 봉사하고, 문화.예술을 발전시키며, 학술 연구 또는 산업 기술 분야에서 훌륭한 업적을 이룩한 자랑스러운 우리 동포를 찾아 내어 주는 상입니다.
이 상을 받은 분들은 세계 곳곳에서 우리 민족의 우수성과 근면성을 보여 준 자랑스러운 우리 동포들입니다.
<사진>KBS 해외 동포상 시상식


조국을 돕자

1997년 말, 우리 나라의 경제 사정이 급속히 나빠졌습니다. 그래서 아이엠에프(IMF : 국제 통화 기금)의 도움을 받기로 하였습니다. 이 소식은 삽시간에 세계 여러 나라에 알려졌고, 재외 동포들도 이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조국의 경제 발전에 대해 기뻐하고 마음 든든하게 생각하던 우리 동포들은 조국의 경제 사정이 나빠졌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걱정했습니다.
그리고 재외 동포들은 조국을 도울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하고 실제로 실천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만드는 물건을 더 많이 사고, 모은 돈을 조국의 친척들에게 보내기도 하였으며, 외화 통장을 만들고, 우리 나라에서 발행하는 채권을 사는 등 우리 동포들은 하루빨리 우리 나라가 경제적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힘껏 도왔습니다.
이렇게 조국을 도우려는 재외 동포들의 노력은 우리 나라가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에 큰 힘이 되었습니다.
<사진>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금모으기 운동


재외 동포들이 활약하는 모습을 살펴보고, 느낀 점을 이야기해 봅시다.

미국의 일간지 '유에스에이 투데이'는, 학교 성적은 물론 스포츠와 봉사 활동, 지도력, 예술, 과학 등 여러 방면에서 뛰어난 수천 명의 학생 가운데 선발된 20명 중에서 최우수 고교생으로 한국계 여학생 안젤라 김 양이 뽑혔다고 밝혔습니다.
캘리포니아 주에 있는 한 고등 학교의 졸업반인 김 양은 학교 개혁 증권 발행 운동에 앞장서 왔으며, 학교 웅변 토론 클럽의 회장과 로스앤젤레스 지역 학생 음악 진흥 기구의 공동 회장으로 활약해 왔습니다.
또, 학교 신문과 지역 공공 잡지 편집장, 테니스 팀 주장, 한국 무용단원 등으로 활약하기도 하였습니다.



네팔 태권도의 대모로 떠오른 류설아 씨는 네팔의 스포츠 영웅입니다. 왜냐 하면, 모교인 oo대학교 교수의 추천으로 네팔 태권도 국가 대표 팀 감독으로 부임한 후에 열린 방콕 아시아 경기 대회에서 네팔 역사상 처음으로 은메달 1개와 동메달 2개를 따냈기 때문입니다.
류씨가 네팔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 네팔 대표팀의 실력은 수준 이하였습니다. 그러나 류씨는 열심히 선수들을 지도했습니다. 선수단은 한 마음이 되었고, 전력은 급상승했습니다.


러시아 가요계의 정상에 오른 한인 3세 아니타 최가 모스크바의 러시아 콘서트 홀에서 미국 진출에 앞서 고별 공연을 가졌습니다.
대중 가수로는 드물게, 명예로운 무대인 러시아 콘서트 홀 무대에 두 번이나 선 아니타는 한국적인 분위기의 무대 연출로 눈길을 끌었습니다. 사물놀이패가 등장하여 러시아 팬들을 휘어잡는가 하면 러시아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배경으로 고전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했습니다.


재외 동포들과 가깝게 지내는 방법을 찾아보고, 실천해 봅시다.

나타샤의 고국 나들이

나타샤와 혜정이는 친척간입니다. 나타샤의 할아버지는 일찍이 외국으로 이민을 가셨습니다. 나타샤는 그 곳에서 태어나 우리말과 우리글이 그리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방학을 맞이하여 우리 문화를 배우기 위해 혜정이네 집에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혜정이는 나타샤가 우리의 문화나 생활 관습을 익힐 수 있도록 여러 가지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내가 혜정이가 되어 계획을 세워 봅시다.
나타샤와 함께 가 보고 싶은 곳/ 나타샤에게 들려줄 이야기


나타샤가 돌아갈 때, 고국의 모습이 담긴 카드를 선물하려고 합니다. 신문이나 잡지에서 사진이나 그림을 오려 붙이고, 설명을 덧붙여 봅시다.(두세 가지를 함께 붙여도 좋습니다.)

친척이나 아는 사람들 중에서 외국에 사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조사해 봅시다.

1. 언제, 어느 곳으로 나가 살게 되었나요?
2. 무슨 까닭으로 나가게 되었나요?
3. 친척이나 아는 분의 요즈음 생활에 대하여 전해 들은 이야기를 써 봅시다.

재외 동포와 우리가 하나임을 나타내는 내용으로 사행시를 지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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