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포자녀들의 아름다운 등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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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포자녀들의 아름다운 등반 이야기
  • 김응수
  • 승인 2013.01.16 10: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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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현호 학생 등 19명 등반대, 불우학우 돕기 위해 킬리만자로 등반

한국 나이로 일흔인데 어느 동포자녀의 뜻이 갸륵해 힘들지만 ‘킬리만자로’를 동반 등반하게 됐다.

‘장현호’(18세)라는 교포자녀는 불우한 학우들을 돕기 위한 성금을 모금하기 위해 한국의 파라다이스 호텔의 지점격인 나이로비 싸파리 파크 호텔(사장 노영관 전무) 후원(1m 당 16씰링: 우리돈 240원)을 받아 2012년 12월 29일부터 2013년 1월 4일까지 6박 7일의 일정으로 킬리만자로를 갔다 왔다.

함께 등반한 사람들은 장현호 학생의 친구들인 인도학생 3명, 이탈리아 학생 1명, 교포자녀 학생 5명, 한국에서 봉사 나온 대학생 4명 그리고 이곳에서 사업하는 교포 5명 등으로 필자를 포함 모두 19명의 대규모 등반대였다.

이를 위해 탄자니아에서 짐꾼(포터) 38명, 가이드 19명 그리고 요리사 4명 등 모두 61명과 등반대 19명 도합 80명을 인솔해 12월 30일부터 등반을 시작했다.

장현호 학생을 응원하기 위해 대규모 등반대가 구성된 셈이며, 필자가 등반 대장으로 선발 된 것은 큰 영광이었다. 한편으론 이와 같은 대규모 등반대를 성공적으로 끌고 갈 수 있을 지 걱정도 됐다.

등반하는 첫 날부터 비가 억수로 쏟아졌다. 1,900m에서 출발해 2,000m를 통과할 때부터 쏟아지기 시작한 장대비는 그칠 줄 몰랐다. 입구에서 12km떨어진 제1캠프(2,800m)에 도착한 대원들은 비와 땀으로 범벅이 됐고 이제 겨우 시작이고 6시간밖에 안 됐는데 녹초가 된 대원들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튿날 아침, 비를 대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7:30분에 제1캠프(만다라)를 떠났다. 계속해서 내린 비로 땅은 질고 미끄러워 얼마나 힘든지 모를 지경이었다. 비를 맞아가며 점심을 먹고 제2캠프 호롬보(3,700m)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4시가 다 됐을 때였다.

비를 맞고 힘들게 올라와서 그런지 벌써 고산증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원들은 두통을 호소하기도 하고 설사방지약을 비롯해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고 복통약 등을 요청하기도 했다.

걱정이 돼 제대로 잠도 못자고 아침 일찍 살그머니 밖에 나왔다. 영하 10도는 될 듯, 비온 뒤 땅은 꽁꽁 얼어붙었고 바람은 몹시 차가왔다. 그러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는 쾌청해 맘이 놓였다.

오후에는 비가 올지도 모르기 때문에 아침 일찍 기상해 6시 50분에 아침을 먹고, 7시 20분부터 아침 햇살을 받으며 마지막 캠프인 4,700m를 향해 오르기 시작했다. 고도 적응과 에너지 소모를 최소화하기 위해 노래 부르듯 “폴레폴레”(천천히)를 반복해 정말 천천히 걸었지만, 풀 한 포기 볼 수 없는 4,200m를 통과하면서부터는 고산증 증세인 두통을 호소하는 대원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우박을 맞아가며 마지막 캠프인 키보 산장(4,750m)에 오후 4시 30분에 모든 대원이 도착했으나 두통과 복통을 겪거나 토하는 대원들이 벌써 절반을 넘어 섰다. 장현호 학생은 정말 심각했다. 약을 먹은 물도 토하니 약 효과가 있을 리 만무, 중환자가 돼버렸다.

갖고 간 얼큰한 신라면에 흰 떡을 넣어 떡 라면을 끓였지만 반색을 하는 대원들은 별로 없었다. 뱃속에 있는 가스가 팽창을 하고 토하기 때문에 먹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저녁 5시 30분에 잠시 눈을 부치게 하고, 밤 10시 반에 일어나 추위에 대비한 만반의 장비를 갖추고 따뜻한 차 한 잔씩 마신 후에 바야흐로 새해 1월 1일 밤 11시에 마지막 캠프를 출발했다.

다행히 장현호 학생도 기진맥진한 상태였지만 같이 가겠다고 따라나섰다. 역시 의지가 대단했다. 필자가 전문 가이드와 함께 선두에 섰고, 그 뒤에 가장 나이가 어린 인도 학생(14세) 그리고 장현호 학생을 포함한 교포자녀 학생들 그리고 맨 뒤에 한국 대학생과 이곳 교포사업가 순으로 5,600m의 길만스 포인트를 향해 출발을 했다.

내일 아침 6시 30분이 되면 마지막 캠프에서 3km밖에 있는 길만스(5,600m)에 도착한다는 마음으로 보폭 20cm를 유지하며 정말 천천히,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새벽 1시, 뒤따르던 장현호 학생이 보이지 않았다. 포기했구나 싶었다. 왜냐면 출발부터 워낙 고산증이 심했기 때문이었다.

새벽 5시 9부 능선에 도착할 무렵, 한 대원이 내 뒤에 바짝 붙으면서 “대장님 저, 현호 여기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장하다 현호” 이 한마디로 화답을 하고 계속해서 천천히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 끝에 드디어 해뜨는 6시 30분에 5,600m의 길만스 포인트에 도착했다.

장현호 학생은 거의 죽은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현호야, 저 해를 봐봐. 저 햇빛을 받으면 힘이 생겨. 찬란한 햇빛을 얼굴에 쏘여봐”라고 말하면서 일으켜 해를 향해 얼굴을 들게 했다. 몇 분이 지났을까 신기하게도 녀석이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인도학생을 포함해 하나씩 하나씩 도착했다. 한국 대학생 4명, 장현호 학생을 포함해서 교포자녀 학생 4명 그리고 기업인 1명이 올라왔고, 필자를 포함해 모두 13명이 됐다.

아침 7시, 인도학생 3명은 가이드와 함께 먼저 올려 보내고 다른 대원들을 기다렸지만 올라 올 기미가 보이지 않아 할 수 없이 7시 30분 길만스를 떠나 5,985m의 우후루 정상을 향해 출발했다.

출발한 지 몇 분 안됐는데도 찬란했던 햇살은 온데 간데 없고 짙은 구름안개가 시야를 가로막았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겨 3km 떨어진 정상에 9시 30분에 도착했다. 장현호 학생은 눈물을 흘렸다. 정말 죽기 살기로 있는 힘을 다 쏟아 정상을 밟아서 싸파리파크의 후원금을 받을 수 있었고, 또 그 돈을 어려운 이웃 동료학생에게 줄 수 있게 됐다는 감격의 눈물이었다.

나이 18세, 장현호 학생의 아름다운 마음이 정말 갸륵하고 자랑스러웠다. 내 나이 18살에는 저런 것은 꿈도 못 꿨는데… 정말 장했다.

10시에 정상에서 하산을 시작해 12시에 마지막 출발지였던 키보에 도착해 보니 포기한 대원은 고산증이 너무 심각해 일찍 중간 캠프인 호롬보로 내려가서 볼 수가 없었다. 하산길 겨우 2시간 거리를 밤새(11시간 소요)도록 걸었다는 게 정말 믿기지 않았다.

우리는 잠시 휴식을 취하고 15km떨어진 호롬보 캠프로 출발해 저녁 5시가 다 돼서 돌아왔다. 장현호 학생을 포함해 모든 대원은 언제 고산증이 있었는지 모를 정도로 정상회복이 됐다.

이튿날 3일 아침 7시에 전 대원이 함께 사진을 찍고 하산을 시작해 27km떨어진 킬리만자로 입구에 4시 도착해 간단한 수속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온 시각은 밤 8시, 모처럼 더운 물로 샤워를 한 전 대원들은 실패를 했건 성공을 했건 모두가 하늘로 날아갈 기분들이었다.

필자도 이번 등반이 다섯 번째였는데 가장 힘들었고 또 가장 보람된 등반이었다. 실컷 마시고 먹게 한 후 12시가 넘어서 잠자리에 들었지만 내일 부모님들과 함께 할 점심시간에 맞추기 위해 아침 6시에 기상해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곧바로 출발한 끝에 겨우 오찬시간 13시 30분에 나이로비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부모님들과 힘들었던 일, 어려웠던 일들을 말씀드리면서 오후 4시가 돼서 각자 집으로 가게 돼 6박 7일의 대 장정을 마무리했다.

이제는 킬리만자로는 그만 가기로 맘 먹었다. 왜냐하면 이번 등반이 너무 아름다운 등반이었기 때문이다…

[김응수 / 케냐 나이로비 세종학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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