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당선자, 34년 만의 청와대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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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당선자, 34년 만의 청와대 귀환
  • 고영민 기자
  • 승인 2012.12.20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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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사가들, 통일 기반 닦은 선덕여왕 빗대 국민통합 기대하기도

1979년 10월 26일, 부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거하자 당시 만 27살이었던 박근혜 당선자도 청와대에서 쫓겨났다. 이제 그가 34년 만에 청와대로 귀환하면서 대한민국 헌정 사상 첫 여성대통령 시대를 맞이하게 됐다.

일부 호사가들 사이에서는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은 신라 선덕여왕 이래 1,100여년 만에 등장한 첫 여성 지도자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대한민국 여성 대통령, 박근혜’라는 상징적 의미는 상당히 큰 듯하다. 여기에는 지역별, 세대별, 이념별로 갈라진 국민분열을 극복하고 국민 대통합으로 이끌기를 바라는 기대도 내포돼 있을 것이다.

▲ 지난 18일 박근혜 후보는 증권거래소를 방문하고, 5년 내 코스피 3,000시대를 열겠다고 밝혔다.[사진제공=박근혜의 국민행복캠프]
사실 박근혜 당선자는 태어날 때부터 결코 평범하지 않은 환경 속에서 살아온 흔치 않은 정치인이다.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61년 5.16을 거쳐 그녀가 (만)11살 때인 1963년 제5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줄곧 학창시절을 대통령의 딸이라는 신분으로 보냈다.

서강대학교 전자공학과를 졸업한 1974년 22살 때, 모친 육영수 여사가 8·15행사에서 간첩 문세광의 총탄을 맞고 절명하면서 프랑스 유학 중 급히 귀국한 박 당선자는 이후 5년(74~79년) 동안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대리했다. 그가 이른바 ‘수첩공주’로 불리며 꼼꼼히 메모하는 습관을 갖게 된 것도 이때부터라고 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당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피격당한 10.26 사건 다음날 새벽 아버지의 유고 소식을 전해들은 박 당선자가 꺼낸 첫마디가 “지금 전방의 상태는 괜찮습니까?”였다는 유명한 일화는 퍼스트레이디 역할 속에서 국가안보 의식과 지도자로서의 책임감을 철저하게 익힌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후 청와대를 나온 박 당선자는 육영재단 이사장(82~91)과 영남대학교 재단이사장(82~91), 재단법인 ‘박정희대통령 육영수여사 기념사업회’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이어 45세 때인 97년, 새누리당의 전신인 한나라당에 입당해 선대위 고문을 거쳐 이듬해 98년, 대구 달성 보궐선거에 당선됨으로써 공식적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2002년 2월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그해 5월 북한을 방문해 김정일과 단독면담을 진행했고,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했으나 같은 해 11월 다시 한나라당에 복귀했다. 이후 한나라당 당대표, 17·18·19대 국회의원 당선, 2011년 한나라당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 등을 거쳐 지난 7월 10일 대선 출마를 선언하고 8월 20일 새누리당 대선후보로 선출됐다.

2006년 5월, 서울 신촌로터리에서 지방선거 유세 도중 커터칼에 의해 오른쪽 뺨이 찢기는 테러를 당했고, 2007년 당내 경선에서 이명박 후보에게 패배, 2008년 친이계와의 갈등으로 친박연대 창당 등 박근혜 당선자에게 정치적 위기는 늘 그림자처럼 따라 붙었지만 그만이 갖고 있는 특유의 능력으로 난관들을 극복했다.

박 당선자는 이번 대선에서 유세를 진행하며 “나는 돌봐야 할 가정도 없고 재산을 물려줄 자녀도 없다. 내가 유일하게 봉사할 수 있는 대상은 나라뿐이다”는 말을 자주 했다. 이는 기존 정권들에서 고질적으로 나타난 부정부패, 측근비리에 대한 국민들의 걱정을 일거에 해소하고, 모든 사리사욕을 떨쳐 버리고 오직 국가와 민족을 위해 전념할 수 있다는 의미를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이제 박 당선자가 그동안 평범치 않은 삶을 살아오며, 험난한 역경들을 극복한 것처럼 현재 대한민국이 안고 있는 경제난, 한반도 안보위기 등을 이겨내고, 지역·세대·이념 갈등을 넘어 국민통합으로 이끌어내 본인 스스로 말한 것처럼 ‘국민행복 시대’를 이뤄내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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