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헌 윤봉길 의사 순국 80주기를 맞이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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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헌 윤봉길 의사 순국 80주기를 맞이하며…
  • 윤주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상임부회장)
  • 승인 2012.12.05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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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들이여! 윤봉길 의사의 실천적 도전정신을 본받아 꿈 이루길"

오는 12월 19일 순국 80주기를 맞아 윤봉길 의사의 거룩한 순국 당일을 스케치해본다. 

윤봉길 의사는 1932년 12월 19일 오전 7시 15분 헌병의 삼엄한 경계 아래 형장에 도착했다. 도착할 당시 윤 의사는 체포될 때 왼손에 들고 있던 중절모자를 눌러 쓰고 그때의 양복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이런 차림새는 신문기자 등 사람들의 눈에 띠지 않게 하려는 특별조치였다.

형장은 이시카와현(石川縣) 이시카와군 아자 미고우시(三小牛) 지역내 가나자와 육군 작업장의 서북쪽 골짜기로, 이곳에는 깎아 세운 듯한 언덕이 약 7m의 높이로 솟아 있어 사격에 적합한 장소였다. 일제는 같은 날 새벽 그 언덕 3m앞 지점에 십자가 모양의 형틀을 설치하는 등 형장설비를 끝냈다.

육군대신 아라키 사다오(荒木貞夫)로부터 ‘사형집행은 절대 비밀로 시행하라’는 명령(육밀 제489호)을 받은 제9사단장은 형장으로 가는 길가 요소요소에 헌병을 배치하고 형장은 보병소대가 그 주변을 에워싸고 철통 경계를 했다.

특히 형장에는 소수의 집행관계자만 입장이 허가되고 그 누구도 접근을 금지했다. 군의관 세가와 요시오(瀨川吉雄)로부터 윤 의사의 심신(心身)에 이상이 없음을 보고 받은 검찰관 네모토 소타로(根本莊太朗)는 상해파견군 군법회의에서 언도된 사형을 집행한다고 통고하며 유언을 물었다.

이에 윤 의사는 미소를 지으며 "사형은 이미 각오한 것이니 지금에 임하여 아무 것도 해야 할 말이 없다"고 일본어로 명료히 말했다. 간수들은 윤의사를 형틀 앞 가마니 위에 꿇어앉힌 다음 양손을 형틀에 두 마디씩 묶고 헝겊으로 눈을 가렸다.

사수 2명이 전방 10m 앞에서 엎드려쏴 자세로 검찰관의 사격신호를 기다리고 있을 때, 윤 의사는 갑자기 무언가를 명쾌한 어조로 읊조리기 시작했다. 우리말로 읊조렸기 때문에 알아듣지 못한 일본군 녹사(錄事)는 그 내용을 기록하지 못하고 음영(吟詠: 읊음)했다는 사실만을 남겼다.

절체절명의 순간 우리를 향한 윤 의사의 외침은 무엇일까. 아마도 재향시절 농민운동을 하면서 주창한 실천적 도전정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학문이 학문으로서 그 가치를 나타내는 일은 지식이 아니라 몸으로 행하는 것이다. 세계를 움직이려거든 내 몸을 먼저 움직여라. '상애'(相愛:서로 사랑하라)란 두 글자를 가슴 깊이 새기며 단결하면 반드시 암흑동천에 계명성이 돋아난다. 우리 청년시대에는 부모의 사랑보다 형제의 사랑보다 처자의 사랑보다 일층 더 강의(剛毅)한 사랑이 있다. 나라와 겨레에 바치는 뜨거운 사랑이다. 동천에 서색(曙色)은 점점 밝아오는데 피 끓는 청년제군들은 잠자는가. 우리 조국이 잘 되도록 군복입고 칼 들며 군악나팔에 발맞추어 행진하세"

탕! 7시 27분 정사수가 쏜 한 발이 양 눈썹 사이에 명중했고 7시 40분 군의관이 절명을 확인했다. 당초 일본군은 윤 의사를 의거현장인 홍구공원에서 공개처형하려 하였으나 그럴 경우 윤 의사가 국제적인 영웅으로 떠오를 수 있다는 점과 국제여론의 집중화살을 맞게 될 것을 우려해 이를 포기하고 그 대신 윤 의사의 의거로 죽은 상해파견군 총사령관 시라카와(白川) 대장이 9사단장 출신이라는 이유로 당시 9사단 주둔지였던 가나자와로 윤 의사를 데려와 보복적 차원에서 시라카와의 사망시간에 맞춰 사형을 집행했다.

일제는 무릎을 꿇어앉힌 채 처형함으로써 기개를 꺾으려 했지만 윤 의사는 미소 띤 얼굴로 "무슨 말을 더하겠느냐"며 최후까지 의연했다. 형장에서 집행과정을 기록한 녹사 다치무라 규베(立村久兵衛)는 "범인은 말이 명료하고 미소를 짓는 등 담력이 극히 굳세고 침착했다"고 윤 의사의 태도를 ‘사형집행시말서’에 기술하여 육군대신에게 보고했다.

일본군은 사체를 가나자와시 노다산(野田山) 공동묘지 서쪽 쓰레기하치장의 모퉁이에 평평하게 극비리 암매장하고, 해방 후 재일동포들이 유해를 발굴할 때까지 약 13년간 사체를 짓밟고 다니는 반인륜적 만행을 저질렀다.

1946년 유해를 봉환하여 7월 6일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모셨다. 윤 의사의 육신은 비록 25세의 꽃다운 나이로 짧은 일생을 마감했지만 숭고한 애국혼은 천추에 빛날 것이고, 혈육으론 종(淙)과 담(談) 두 형제를 두었으나 민족정기의 후계자는 만대에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국가 미래의 주역인 청소년들은 윤봉길 의사가 남긴 실천적 도전정신의 의미를 마음속 깊이 되새기며 꿈을 위해 도전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글 : 윤주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상임부회장/매헌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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