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고려인 지도자들 김알렉세이/텐세르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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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고려인 지도자들 김알렉세이/텐세르게이
  • 남혜경
  • 승인 2004.02.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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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 남혜경 편집위원이 지난 1월11일부터 20일까지 모스크바와 러시아 남부지역 볼가그라드와 라스토프주의 동포사회를 보고 왔다. 지난해부터 전남대가 중심이 되어 시작된 ‘세계한상네트워크 구축을 위한 기초조사’ 사업의 일환이다. 여기서 소개하는 인물들은 이 기간 중에 만난 러시아동포들이다. --편집자

자식들에게 고향을 찾아주고 싶다 – 김 알렉세이(44세) 볼가그라드주

볼가그라드주는 모스크바로부터 약1천키로 남서쪽에 위치해 있다.  라스토프, 크라스토다르, 아스트라한과 함께 “러시아의 텃밭” 이라고 불리는 지역으로  따뜻한 기후와 비옥한 토양을 자랑하는 곳이다. 진뜩진뜩한 흙토가 마치 껌처럼 신에 달라붙어선 떨어지질 않은데, 그 흑토가 러시아인들 식탁을 풍성하게 하는 일등공신이란다. 남한과 다름없는 면적에 인구는 300백만명에 불과하다.
이러하기에 1950년대부터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이 이리로 계절농사를 다녔다. 봄이 되면 수 가구, 많게는 수 십가구가 한 팀(브리가다=작업반)을 이루어 경작 및 수확, 판매까지 현지에서 마치고 번돈을 챙겨 다시 중앙아시아로 돌아가곤했다. 이런 형태의 계절이동농사를 고려인들은 “고본질”이라고 부르며 이는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대표적인 농업형태이다.
그러나 최근 10여년 볼가그라드에 정착을 목적으로 몰려드는 고려인들이 줄을 잇고 있다. 구소련체재해체후 10여년간 계속되고 있는 지역분쟁과 민족갈등을 피해서다. 주로 타지키스탄과 우즈베키스탄에서 오는 고려인들이다.
소련시대에는 고려인 인구가 5천명에 불과했던 이 지역이 최근에는 2만, 어떤 이는 4만까지 고려인이 늘었다고 전한다.
이 처럼 최근에 이주해 온 고려인 150여 가구가 모여사는 니콜라이에브스키 마을(볼가그라드시에서 북서쪽으로 약 200km)에 우즈베키스탄에서 이주 해 온 김 알렉세이씨가 있다.
양돈업(돼지 100마리)과 양파농사(100ha)를 겸하고 있는 그가 이 마을에 둥지를 튼 것은 95년. 자식들의 장래를 생각해 러시아로의 이주를 결심했다고 한다. 그는 마을의 궂은 일은 앞장서서 해결하고 이주해 온 그 다음 해부터 구정설잔치 행사를 정례화 시키는가 하면 청소년들이 태권도나 민족 춤을 배울수 있도록 지원을 하고 지금은 문화센타를 짖기 위해 자금을 모으고 있다. 한국과의 교류가 전혀 없는 이곳에서 스스로 민족성을 되찿기 위해 일어선 것이다.
고려인 사회를 위해 열심히 뛰는 이유를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부모님은 원동에서 태어났고 그곳을 고향이라고  믿고 살다가 쫓겨나는 신세가 됐다.나는 우즈베티스탄에서 태어나 자랐고 나의 고향은 우즈베키스탄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 역시 또 고향을 잃었다. 이제는 알 것 같다. 고향이란 지역이나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고향은 마음속에 있는 것이고 , 우리의 고향은 ‘카레이츠(한민족)라고 하는 공동체의식’ 이라는 것을. 이걸 자식들에게 깨닫게 하고 싶다. 자식들에게 고향을 느끼게 하고 고향(공동체의식을 갖고)에서 함께 사는 방법을 가르치고 싶다. 자식들에게 영원한 고향을 찾아주고 싶다.”
 그에게  문화센타를 건설을 위해 어떤 도움이 필요한가를 물었더니,
“우리 힘으로 다 할 수 있다. 조금씩 조금씩 친구들하고 힘데는 만큼씩 해 나가면 된다. 만약 도와줄 수 있다면 여기서 구입하기 어려운 한국 전통 악기나 민족의상 이런것들을 보내주면 좋겠고, 누군가가 와서 한국어나 문화, 전통등을 가르주었으면 좋겠다" 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에게서 고려인들의 자존심을 옅보았다.
볼가그라드에는 한국인이라고는 선교사 가족 2세대 뿐이다. 비즈니스를 하러 들어와 있는 사람도 전혀 없다. 대한민국을 한국이라고도 부른다는 것을 선교사를 통해 최근에 알았다고 , 한 고려인은 고백했다. 유즈니 카레이(남한)에서 온 사람은 처음 본다며 한국말씨를 좀 들려달라는 요청도 있었다.
타지키스탄 난민 유입으로 잠시 한국에 주목을 받은 이후 이곳은 잊혀진 고려인 사회다. 물질적인 지원도 필요하겠지만 그 보다 먼저 고향을 빼앗긴 그들의 아픔을 위로하고, 고향의 문을 활짝 열어 놓고  그들과 어울리는 것 또한 필요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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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제2의 텐 유리 ? – 텐 세르게이(37세)  라스토프주 고려인 협회장

카자키(코작)의 고향, 숄로호프의 소설 ‘고요한 돈강’의 무대, 소피아 로렌의 영화 ‘해바라기’ 의 촬영지(세계 해바라기 기름의 60%가 이곳에서 생산된다고 한다)등이 라스토프주에 붙은 형용사다. 그리고 러시아 5대 도시, '러시아 마피아의 파파의 도시'(원조) 라는 형용사가 붙는 곳이 주중앙아도시 라스토프-나-도누시(돈강의 라스토프)이다. 라스토프-나-도누시는 소련시대에 이미 100만도시로 불리어졌고 구시가지는 작은 상페체르부르그와 같은 풍경이다.
모스크바에서 약 1200키로미터 남쪽에 위치해 있고 볼고그라드에서는 약 500키로미터 서남쪽으로 이동해야 하는 지역이다.
남부에서는 유일하게 아조브라는 항구를 끼고 있는 농공업 지역으로 구소련시대부터 헬리곱터와 농기구 생산으로 유명하다. 최근 한국이 러시아로부터 수입해 오는 헬리곱터가 바로 이곳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고려인 인구는 2만7천에서 4만정도로 추정하고 있었다. 10여년전 만해도 1만명 남짓하던 고려인수가 최근에 급속히 늘어난 것이다. 물론 구소련체제 이후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이주민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얘기했다. "로스토프로 오는 사람들은 돈이 있는 사람들이요. 집 값도 비싸지, 땅 임대료도 비싸지..."  
로스토프의 농촌에는 볼고그라드처럼 최근에 이민자온 사람들이 이룬 마을이란 없었다. 최근에 이주해 온 사람들이라도 토박이들과 별 차이없이 생활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게 아닐까?
  남부러시아의 중심도시. 이 지역에 작년 연말 갑작스럽게 세상을 뜬 이르크츠크의 고려인 국회의원 텐 유리씨 다음을 이을만한 거물(?)이 있다고 해서 만나보았다.
지금 라스토프주 고려인 협회장을 맡고 있는 젊은 실업가 텐 세르게이씨가 바로 그다.
그는 고려인 6세다. 1대 할아버지가 1863년에 원동으로 이주해 온 분이란다. 고려인 첫 이주를 63년으로 보느냐 64년으로 보느냐 의견이 분분했었는데 그의 할아버지가 말하자면 이주 선발대인 셈이다.
1대 할아버지 때 이미 그들은 상당한 부를 축적하여 부자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2대 할아버지가 상페체르부르그에 유학을 할 정도로  교육열도 높은 집안이었단다. 교육수준이 높아 원동에서도 높은 사회적 지위를 차지 했었고 후손들에게도 좋은 교육환경 주어졌다고 한다.
텐 세르게이씨는 우즈베키스탄에서 태어나 키르키스탄에서 성장했고 모스크바에서 대학을 다녔다. 대학 때부터 비즈니스에 관여를 했다고 하는데, “아주 어릴적부터 비즈니스에 관심이 많았다”라고 했다.
라스토프로 이주한 지는 8년. 모스크바에서의 비즈니스 경력 3년을 합해 10여년 만에 라스토프 제일의 부자 소리를 들을 만큼 급성장했다.
현지인들에 의하면 밖으로 드러난 그의 회사만 해도 한둘이 아니란다.
“건설회사도 있고 여기저기 큰 시장도 가지고 있고, 카지노, 주유소도 있고. 모스크바에서는 택시를 200대나 가지고 운수업을 하고  있고. 우리가 아는 것 만도 이 정도인데 모르것까지 합치면 얼마나 많겠어요?” 하고 혀를 내두른다.
그는 3년전부터 지역 고려인 협회장직을 맡고 있다. 2001년부터 가을마다 1주일간 ‘한국문화의 날’이라는 행사를 개최하고 있는데 콘서트, 노래와 춤은 물론 한국영화상영회까지 있단다. 작년에는 ‘쉬리’ 를 상영했단다.
“아-, 그 영화 너무 재미있어요. 눈물을 얼마나 흘렸는지. 나는 한국문화에 관심이 많아서 한국에 가면 공연 같은걸 찾아서 보러 다녀요. 난타도 아주 감동적이었어요. 한국문화 수준도 높습니다.”
외모와는 달리 상당히 감성이 풍부한 그였다.
한국문화의 날은 지역 이벤트로 자리를 잡았고 매해 약 5천명이 모인다고 한다. 이 행사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외에 그는 매월 협회 기관지를 (1천부), 라스토프, 크라스토다르, 볼가그라드등에 배포하고 있다. 한국 기행문, 한국 새로운 풍속, 고려인의 역사. 성공한 고려인들의 소개등등 다양한 내용이 들어가 있었다.
그는 성공한 고려인들의 연대를 중시하고 그들을 통해 고려인 사회의 비젼을 제시하려고 한다.
라스토프와 한국과의 교류가 더 활발해 지길 바란다는 그는 우선 과제로 고려인들의 자유로운 고국 방문을 들었다.
“우리들이 고국을 느끼고 배우게 하려면 자유롭게 한국을 오갈수 있어야 한다. 가서 봐야지 한국을 알수 있고 자주 왔다갔다해야 가깝게 느낄수 있다. 그런데 비자를 안 내주니 돈이 있어도 못간다. 일단 자주 오갈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우리에게 조국을 찾게 하는 것이다.”
구소련 민족정책에 의해 고려인들 대부분이 고국의 언어, 문화, 전통을 빼았겼다. 이제는 그들 스스로가 읽어버린 언어와 문화를 되찿고 배우려 하는데, 우리는 이들에게 고국을 직접 볼 수 있는 기회 조차 주지를 못하고 있으니...
부끄럽고 죄스러운 일이 아닐수 없다.  
정계로 진출할 계획은 없는가?하고 묻자,
“ 나중에 나이를 먹어 별로 할 일이 없으면 그 때 생각해 보겠다. 지금은 비즈니스에 전념하고 싶다.” 하고 답했다.

로스토프 최고급 프랑스 레스토랑에서 식사 대접을 해 주고 헤어질 때는 연락처를 적어주며 이렇게 말했다.
“저는 한국에서 오신 분이면 누구든 반갑습니다. 언제든지 또 방문해 주시고 미리 연락을 주세요. 안개로 비행기가 못 뜬다면 제 전용 비행기를 보내겠습니다. 그리고 무슨 트러블이 생기면 언제 어디서든지 전화 주십시오. 중앙아시아까지는 문제 없습니다.”
카자흐스탄 제일의 고려인 부호 최 유리씨, 러시아 유일의 고려인 국회의원 장 류보밀씨와는 막역한 사이인 것 같았다.
역시…
이제 37세. 앞으로도 많은 일을 할수 있는 나이다. 이제 시작에 불과한지도 모르겠다. 그에 대한 기대로 가슴이 벅차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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