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헐버트(Homer B. Hulbe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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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헐버트(Homer B. Hulbert)’
  • 김동진 (사)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회장
  • 승인 2012.11.19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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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한국인이라면 하루도 잊어서는 안 될 인물”

1949년 7월 1일 미국 Washington D.C. 의 주미한국대사관을 나서는 80대 노인에게 AP통신 기자가 묻는다: “40년 만에 한국에 돌아가는 소회를 말씀 해 주십시오.” 육신은 지쳐있지만 한국에 간다는 기쁨에 얼굴에는 생기가 감도는 백인 노인이 답한다: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합니다(I would rather be buried in Korea than in Westminster Abbey)." 가족의 안타까움을 팽개친 채오직 한국 땅을 밟아야겠다는 일념으로 80노구를 이끌고 샌프란시스코에서 미군 군용선을 타고 태평양을 건넌 이 노인이 바로 한국의 독립과 문명화를 위해 일생을 바친 헐버트(Homer B. Hulbert) 박사다.

헐버트는 아직도 한민족에게 낯선 이름이다. 역사도 외면했고 정부와 국민도 외면했다. 그러나 개화기 선각자들은 그를 진정한 한국혼으로 추앙했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고 뢰순 감옥에서 일본 경찰의 공술에 답하면서 ”한국의 은인 헐버트는 한민족이라면 하루도 잊어서는 안 될 인물“이라고 했다.

헐버트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그를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사람’이라고 부르는데 전혀 주저하

▲ ‘1949년 40년 만에 인천항에 도착하는 헐버트’
지 않는다. 왜 그럴까? 그는 1886년 23살의 청년으로 조선 땅에 첫발을 디뎌 86세로 생을 마감할 때 까지 교육자, 한글학자, 언론인, 역사학자, 저술가, 선교사, 아리랑 채보자 그리고 일본의 침략주의에 담대하게 맞서 싸운 독립운동가로서 한국근대사의 그 어떤 인물보다도 한국 사랑을 온 몸으로 실천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평소 재외동포들이야 말로 헐버트를 꼭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기회가 주어져 참으로 기쁘다.

헐버트는 1863년 미국 Vermont주 New Haven에서 출생하여 다트머스대학(Dartmouth College)을 졸업하고 뉴욕에 있는 유니언신학대학(Union Theological Seminary)에 재학 중 조선 정부의 초청을 받아 1886년 7월 4일,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국립학교인 ‘육영공원’의 교사가 되기 위해 제물포에 도착했다. 다트머스대학은 헐버트 어머니의 증조부가 설립한 학교이며, 헐버트 아버지는 Middlebury대학 총장을 지냈고 개신교 목사였다. 헐버트는 청교도정신과 ‘인격이 승리보다 중요하다(Character is more fundamental than victory)’라는 가훈 속에서 성장했다.

육영공원은 조선이 미국과 수교 후 상호 협력한 최초의 개화 사업이며 고종의 서양식 교육에 대한 열정의 발로로 설립되었다. 학생은 과거에 합격한 관리와 양반집 자제로 구성 되었으며, 장차 나라의 동량을 기르기 위한 목적이었다. 고종은 학생들을 경복궁으로 불러 직접 시험을 치르는 등 육영공원에 대해 열정을 쏟았다. 학생 중에는 역적 이완용도 있었으며, 헐버트는 1907년 일본으로부터 추방당한 후 New York Times와의 회견에서 이완용은 장래가 촉망되는 학생이었으나 일본의 앞잡이가 되었다며 그를 미국 독립전쟁 당시 독립군을 배신한 아놀드(Benedict Arnold) 장군 같은 대역적(Arch-traitor)이라고 비난했다.

 ‘근대교육의 아버지’

헐버트는 육영공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열중하면서도 조선의 문화, 역사, 전통에 대해 하나 둘씩 배워나갔다. 그가 조선에 대해 공부하면서 가장 크게 놀란 것은

조선은 훌륭한 독창적 문화와 자주적 역사를 가진 학문을 숭상하는 문화민족이자,한민족은 두뇌가 우수하다는 것이었다. 그의 눈에 비친 조선인들은 교육만 제대로 주어진다면 세계에 우뚝 설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민족이었다. 헐버트는 이 때 부터 조선의 문명화를 위해 교육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한다고 역설 했으며, 이 교육철학은 1907년 일본에게 추방당할 때 까지도 변함이 없었다. 그는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자 “교육만이 살 길이다”라고 외치며 한국은 교육에 전념하여 일본의 멸시를 이겨내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 ‘대학 졸업 때의 헐버트’
그는 육영공원에서 학교 운영, 교육 과목, 교육 방법 등에 관한 절목을 만드는 등 우리나라 신교육의 기초를 닦았다. 이어서 헐버트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우선적으로 바깥세상을 알리는 교과서가 필요하다고 느껴 세계 지리, 각 나라의 제도, 천체에 대한 총서를 만들어 1890년 <사민필지>라는 책을 출간하였다. 사민필지는 161쪽으로 한자가 하나도 없는 우리나라 최초의 순 한글 교과서이다. 헐버트는 선비와 백성 모두가 반드시 알아야 할 지식이라는 뜻으로 책 이름을 사민필지(士民必知)라 하였으며, 이 책 서문에서 “중국 글인 한문으로는 모든 사람이 빨리 알지 못하고 널리 볼 수 없으며 조선 언문은 본국 글일뿐더러 선비와 백성과 남녀가 널리 보고 알기 쉬우니 슬프다! 조선 언문이 중국 글자에 비해 크게 요긴하건만 사람들이 요긴한 줄도 알지 아니하고 오히려 업신여기니 어찌 안타깝지 아니하리오!”라면서 한글이 사용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참으로 안타까워했다.

또한 이 책에서 헐버트가 양반과 서민, 남자와 여자 모두에게 배움의 기회를 줘야 한다고 주장하여 우리나라 최초로 남녀와 신분의 차별 없는 평등사상을 한글 교과서에 담았다. 이 책은 조선인들에게 바깥세상에 대한 충격을 던짐과 동시에 한글에 대한 긍지를 심어주었고, 한글 범용의 지평을 열었다. 1900년대를 전후하여 하와이 등 미국과 여타 서방세계로 이민을 간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의 영향을 받아 이민을 결심했다고 증언하였다.

 헐버트는 5년 동안 육영공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후 1891년 말 미국으로 돌아갔으나 조선이 너무 그리워 1893년 감리교 선교사로 조선에 귀환하여 감리교 배재학당 출판기관인 ‘삼문출판사(The Trilingual Press)’의 책임자가 되었다. 이 때 배재학당 학생인 주시경, 이승만 등을 사제지간으로 만난다. 헐버트는 1897년 다시 조선 정부와 계약을 맺고 ‘한성사범학교’ 책임자가 되며 대한제국의 교육고문이 된다. 이어서 1900년 ‘관립중학교(경기고등학교 전신)’로 옮겨 학생들을 가르친다. 헐버트는 개화기 근대식학교의 운영체계를 확립하고, ‘헐버트 시리즈’라는 교과서프로젝트를 기획하여 교과서 시스템을 정착시키는 등 우리나라 근대교육의 기틀을 다졌다. 헐버트가 개화기에 보여준 교육에 대한 열정은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을 불어넣었고, 오늘날 우리나라가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에 이르는 원천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학자’

헐버트는 조선에 도착하자마자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한국어 공부를 시작했으나 한글을 깊이 있게 공

▲ ‘최초의 한글 교과서 <사민필지> 중 유럽 편’
부하다보니 한글의 위대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회고록에서 ‘한글을 배운지 4일 만에 한글을 읽고 쓸 수 있었으며 일주일 만에 조선인들이 스스로 만든 위대한 문자인 한글을 업신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라고 밝혔다. 이러한 헐버트의 한글에 대한 관심은 사민필지를 순 한글로 저술하게 되고 계속하여 한글의 태동에 대해 공부한다.

헐버트는 육영공원을 그만두고 미국으로 돌아가기 직전 <한글(The Korean Alphabet)> 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저술 우리나라 최초의 영문월간지 <한국소식 (Korean Repository)> 1892년 창간호와 3월호에 발표하였다. 이 논문은 한글의 우수성과 세종대왕의 위대성에 대해 역사상 최초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발표한 논문이다. 총 17쪽의 이 논문에서 그는 한글 창제의 의미를 ‘독창적 발명품으로서 백성들에게 배우기 쉽고 쓰기 쉬운 글자를 제공한 점’에 두었다. 또한, 세종대왕의 근검 정신, 백성을 사랑하는 정신, 법치 정신 등 민본사상을 파헤쳤으며, 세종대왕을 고대 페니키아(Phoenicia) 문자를 발명했다고 전해지는 카드머스(Cadmus) 못지않은 인류사에 빛나는 업적을 남긴 분이라고 했다. 헐버트는 이 논문의 결론에서 ‘이 세상에 이보다 더 간단하게, 이보다 더 과학적으로 발명된 문자 시스템은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라고 주장하였다.

헐버트는 이외에도 한글 창제 과정과 한글 자모에 대해 연구한 <훈민정음>, 한글, 이두, 한문을 비교한 <이두(ITU)> 등 한글과 관련한 많은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는 ‘한글을 200개가 넘는 다른 문자와 비교해봤으나 문자의 단순성과 소리를 내는 힘의 일관성(Simplicity of Shape and Consistency of Phonetic Power)에서 한글보다 우수한 문자는 발견하지 못했다.’라고 했다. 헐버트는 한편으로 위대한 한글학자 주시경에게 한글과 관련하여 크게 영향을 준 사람이다. 주시경은 배재학당 시절 헐버트가 책임자로 있던 삼문출판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헐버트의 한글사랑에 크게 감화되었다.

▲ ‘관립중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헐버트’
헐버트와 주시경은 우리나라 최초로 띄어쓰기 시도, 국문연구소 설치 등의 활동을 하면서 한글발전의 초석을 놓았다. 헐버트는 또 서재필이 고종의 자금 지원을 받아 창간한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의 탄생에 크게 기여하였다. 1895년 12월 미국에서 돌아온 서재필이 4개월만인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을 창간할 수 있기까지에는 삼문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던 헐버트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헐버트는 출판에 대한 도움뿐만 아니라 편집에도 크게 도움을 주었고 영문판은 사실상 헐버트가 주필이었다. 주시경이 독립신문에서 일하게 된 것도 헐버트의 삼문출판사에서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헐버트는 1902년에 <한국어(The Korean Language)>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우랄알타이어로서의 한국어의 언어학적 위치를 정의하였고, 1905년에는 한국어가 인도 남쪽의 드라비다 지방의 언어와 공통점이 있다면서 <한국어와 드라비다 어의 비교 연구(Comparative Grammar of Korean and Dravidian)>라는 책을 쓰는 등 언어학자로서도 탁월성을 보여 주었다. 헐버트야말로 우리나라 최초로 한글의 우수성을 체계적으로 연구 국내외에 설파한 한글학자이자 언어학자이며, 한글 사용을 최초로 주창한 한글자강 운동의 선구자였다.

 ‘민족혼 아리랑의 최초 채보자’

헐버트는 한글에 대한 연구뿐만 아니라 한국 문화에 있어서도 다방면에 걸쳐 연구하고 많은 업적을 남겼다. 믿겨지지 않겠지만 그는 오늘날 세계의 노래가 된 아리랑을 최초로 채보한 사람이다. 1896년 <한국의 소리음악(Korean Vocal Music)>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한국소식 2월호에 발표하면서 구전으로만 전해오던 민족의 혼 아리랑과 군밤타령에 서양 음계를 붙여 채보함으로서 우리나라 음악사에 양악보 시대의 지평을 열었다. 그는 이 논문에서 ‘아리랑은 한국인에게는 쌀과 같은 존재다.’라고 아리랑의 의미를 정의하면서 한국인의 아리랑에 대한 정서를 한국인보다 더 잘 파악하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그는 또 ‘한국인은 즉흥곡의 명수이며 한국인이 노래하면 바이런이나 워즈워스 같은 시인이 된다.’라고

▲ ‘헐버트의 한국사(The History of Korea)’
하여 오늘날 우리 젊은이들이 케이팝(K-Pop)으로 세계인들을 깜짝 놀라게 할 것을 120년 전에 예지하였다. 이 논문은 우리나라 전통음악에 대한 역사상 최초의 논문일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음악을 국제적으로 최초로 소개한 논문이다. 특히 조선 말기에 외국인들은 조선에는 음악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혹평하였지만 헐버트는 조선에도 훌륭한 음악이 있으며 한민족은 뛰어난 음악성을 가졌다고 극찬했다. 헐버트야말로 조선의 전통음악을 직접 체험하며 학술적으로 정리한, 아리랑과 우리나라 전통음악의 중시조라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사)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는 헐버트 서거 63주년 특집으로 한국의 소리 음악(Korean Vocal Music)을 번역하여 지난 8월 발표하였다.

‘참선교사’

헐버트는 선교사로서 우리나라 기독교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는 조선에 오기 전 유니온신학대학 재학 중이었고 목회자의 자녀로서 그의 가치관 형성과 정신세계는 기독교정신에 기초하였다. 그는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선교사 등과 함께 우리나라 개신교 초기에 조선의 복음화를 위해 진력하였다. 언더우드와 함께 조선에서 최초로 세례를 행하였으며, 한영사전 편찬과 성경번역 사업을 도왔다. 동대문교회 담임목사를 지냈으며, 노량진교회의 창립 예배를 인도하여 그 지역에 살던 무당들을 크리스천으로 인도했다.

헐버트는 또 감리교 삼문출판사 책임자로 일하면서 미국 신시내티에서 신식 인쇄기를 들여와 전도지, 주보, 종교서적 등 기독교 관련 출판물뿐만 아니라 신문, 잡지 등 일반 서적도 출판하면서 근대식 출판문화의 초석을 놓았다.

헐버트는 한편으로 한국YMCA의 창립과 초기 발전의 중심인물이다. 그는 YMCA창립준비위원장으로서 YMCA 태동의 산파역을 맡았으며, 1903년 10월 28일 YMCA창립총회 의장으로서 YMCA를 출발시켰다. 그는 특히 YMCA의 목적을 선교로 한정하자는 여타 선교사들의 의견과 달리 YMCA의 목적을 선교를 넘어 계몽과 교육으로 설정하면서 평소의 교육철학을 구현하였다.

 ‘불세출의 역사학자’

▲ ‘고종 황제가 헐버트에게 내린 헤이그 만국평화회의를 위한 특사증’
헐버트는 1905년 한국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800쪽에 달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역사서 <한국사(The History of Korea)>를 출간하였다. 한국사는 단군시대 부터 고종 시대까지 망라하여 한국역사를 상세하고 폭넓게 기술하였다. 헐버트는 한국사의 기초자료는 순전히 한국의 책에서 나왔으며, 15년에 걸쳐 동국통감 등 고서들과 씨름하며 한국사를 썼으며, 장안의 비밀한 사료관에 어렵게 접근하여 당시로서는 공개되지 않았던 조선 말기를 포함한 역사 자료를 확보하였다고 서문에서 밝혔다.

특히 당시에는 동 시대에 대한 역사 기술을 할 수 없었으나 헐버트는 민씨 일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종 황제로 부터 특별히 윤허를 얻어 한국사에서 우리 역사상 최초로 조선시대를 기술하였다. 헐버트는 이 책에서 한민족의 독창성에 감탄을 금치 못하였으며 한민족의 자주독립 정신을 높이 샀다. 한국사는 중국 의존의 역사인식이나 식민사관과는 관계없는 객관적, 사실적 역사 기술로서 한국역사의 원전이라 할 수 있는 책이다.

그는 또 1906년에 한민족의 기질, 한국의 문화, 전통, 풍속, 산업, 사회제도 등을 집대성한 <대한제국멸망사(The Passing of Korea)>를 출간했다. 대한제국멸망사는 한민족이 어떤 민족인지와 당시 한국의 현실을 심도 있게 파헤치면서 외국인들에게는 한국에 대한 길잡이로 한국인들에게는 한민족에 대한 긍지와 회한을 동시에 던진 책이다. 헐버트는 을사늑약 이듬 해 영국 런던에서 출간 된 이 책에서 한국의 나라를 잃는 처지를 애처로워하면서 일본의 침략주의를 강력히 고발하고,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위반하며 한국을 일본에 넘기는데 동의한 자신의 모국 미국을 강력히 규탄하였다.

헐버트는 책머리에서 이 책을 고종황제와 ‘잠은 죽음의 가상이기는 하나 죽음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게 될 한민족’에게 바친다면서 한민족은 언젠가 나라를 꼭 되찾을 것이라고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는 이 책에서 관료사회의 부패상, 진실성과 정의감의 결핍 등을 서슴없이 지적하며 양반들의 비실용주의적 자세와 관료사회의 부패를 나라를 잃는 원인으로 꼽았다.
일본은 대한제국멸망사는 물론 한국사 심지어 사민필지까지 모든 헐버트의 저술서를 판매금지 하였다.

 인종과 국경을 넘은 정의의 사도’

헐버트는 불타는 정의감과 뜨거운 인간애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가 보여 준 인간애와 일본에 맞선 장대한 독립운동이야 말로 그의 한국 사랑의 백미라 할 수 있다. 1895년 명성황후가 일제에 의해 시해되자 헐버트는 고종의 침전에서 불침번을 서면서 일제와 친일파들로부터 고종을 보호하였다. 그는 또 러일전쟁이 끝나면서 일본이 한국과의 조약을 어기고 한국을 보호통치 하려하자 이는 정의에 어긋난다며 언론 기고 등을 통해 일본의 침략주의를 맹비난하였다. 그는 특히 러일전쟁이 끝나고 일본인들이 몰려와 한국인들을 박해하며 재산까지 약탈하자 탄압받는 한국인들을 돕기 위해 온몸으로 일본제국주의와 맞섰다. 일부 선교사들이 정치에는 관여 하지 않는다며 일본의 만행에 눈을 감았으나 헐버트는 고통 받는 한국인을 돕는 것이 참선교라며, 한국인을 공정하게 대해 준다면 일본을 국제적으로 비난하는 것을 중지하겠다고 조선 통감 이또 히로부미와 담판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는 1905년 ‘을사늑약 직전 미국의 시어도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고종황제의 친서를 전달하기 위해 미국

▲ ‘헐버트가 죽을 때까지 한국을 지지하겠다고 선언한 강연을 보도한 미국 신문 기사’
을 방문하여 조미수호통상조약에 의거 을사늑약을 저지해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백악관과 국무성은 헐버트를 외면하다가 을사늑약이 국제적으로 발표 된 후에야 헐버트를 만나주었다. 헐버트는 이러한 미국의 처사에 대해 뉴욕타임스 등에 기고를 통해 루스벨트 행정부를 맹비난하면서 결국 루스벨트 대통령이 자신이 한국을 일본에게 넘기는데 동의 했다고 고백하게 만들었다. 을사늑약에 대한 미국의 루스벨트 행정부에 대한 투쟁은 지금까지 헐버트가 유일하다.

우리 역사책에는 기술되고 있지 않지만 헐버트는 1907년 헤이그만국평화회의를 위한 특사였을뿐만 아니라 헤이그특사파견의 중심인물이었다. 고종 황제는 1906년 헐버트를 특사로 임명하여 우리나라 조약상대국 국가원수들을 방문 헤이그만국평화회의에서 도움을 요청 하도록 했다. 일본은 한국이 헤이그에 누군가를 보낸다면 그는 헐버트라고 믿어 헐버트를 밀착 감시하였다. 그 사이 이준열사는 서울을 빠져나갔다. 헐버트도 1907년 5월 미국에 간다는 구실 하에 일본을 거쳐 블라디보스톡에서시베리아횡단열차를 타고 모스크바, 파리를 거쳐 헤이그에 도착했다. 그리하여 이상설, 이준, 이위종 특사를 도우면서 그 자신도 헤이그 평화클럽(Peace Club)에서 일본을 비난하는 연설을 했다.

 헐버트는 헤이그특사파견 사건 직후 일본의 박해로 미국에 돌아갔으며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뉴욕타임스 등 언론과의 회견에서 일본을 맹비난하였다. 그는 “한국은 게릴라전 등을 통해 끝까지 투쟁할 것이며 일본은 한국인들을 말살하여야만 한반도에서 평화를 얻을 것이다”라며 한국인들이 끝까지 투쟁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어서 그는 미국에서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강연, 기고, 집회 등을 통해, 그리고 서재필, 이승만 등의 한국 독립운동가들을 도우면서 한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했다. 그는 1909년 미국 포틀랜드에서의 강연에서 “나는 언제나 한국민을 지지할 것이다. 그들은 모든 권리와 재산을 빼앗겼다. 나는 죽을 때까지 그들을 대변할 것이다.”라고 선언하기도 했다.
1919년 한국에서 삼일운동이 일어나자 헐버트는 미국상원외교관계위원회에 ‘한국을 어찌 할 것입니까(What About Korea)’라는 제목의 진술서(Statement)를 제출 미국인들에게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필자는 2004년, 헐버트의 모교인 다트머스대학 도서관에서 헐버트가 1934년 ‘졸업후신상기록부(Post Graduate Data)’에 남긴 한 글을 읽고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나는 천팔백만 한국인들의 권리와 자유를 위해 싸워왔으며 한국인들에 대한 사랑은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가치이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나의 그러한 행동은 값어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라고 적었다. 헐버트는 그의 삶이 곧 한국 사랑임을 고백한 것이다. 당시에 한국은 일본의 일부였기에 아무도 이 말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때였다. 그의 한국사랑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헐버트는 또 고종 황제가 1909년 자신에게 위임장을 써주며 상하이 덕화은행에 예치해 두었던 고종 황

▲ ‘헐버트 영결식 현장’
제의 내탕금을 찾아오라는 명을 받고 상하이에 갔으나 그 돈을 이미 일본이 찾아간 사실을 발견하고 그 이후로 해방이 될 때까지 그 돈을 찾으려 동분서주 하였다. 이 문제는 아직도 한일 간에 끝나지 않은 역사문제다. 헐버트는 생을 마감하면서 두 가지 소원이 있었다. 하나는 한민족이 꼭 통일을 이뤄 세계사의 주역이 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바로 고종 황제 내탕금을 찾는 일이었다. 언젠가는 내탕금을 꼭 돌려받아 민족정기가 살아있음을 보여 주고 헐버트와 고종 황제의 한을 풀어드려야 한다.

 그토록 소원하던 한국 땅에 묻혀

1945년 해방이 되자 헐버트는 이는 정의와 인도주의의 승리라 했다. 해방된 한국을 꼭 보고 싶었으나 그는 어제 몸을 제대로 추스릴 수 없는 80 노인이 되어 있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의 응답인가! 그가 그토록 소원했던 한국땅에 묻히는 소원이 이뤄졌다. 1949년 8월 15일 광복절을 맞이하여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초청을 받았다. 86세의 헐버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배를 타고 한국으로 향했다. 한 달여 만에 인천항에 도착한 헐버트는 고령과 여독에 못 이겨 곧바로 입원을 해야 했다.

그는 대통령, 부통령을 비롯한 많은 옛 친구, 제자, 독립운동 동지들을 만났다. 그러나 그는 겨우 얼굴을 알아보고 눈물만 흘렸다. 그는 도착 일주일 만인 1949년 8월 5일 청량리 위생병원에서 쓸쓸히 그러나 환한 미소를 머금고 세상을 마감했다. 그의 죽음을 가족은 지켜보지 못했으나 그가 그토록 사랑하던 한민족은 그의 죽음에 진심어린 애도를 보내며 그의 장례를 최초의 외국인 사회장으로 장엄하게 치뤘다. 그리고 그는 마포 한강변에 있는 양화진외국인묘지에 편안하게 잠들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50년 3월 1일 그에게 건국공로훈장 태극장을 추서하며 감사를 표했다.

 

▲ ‘헐버트 55주기 추모식에 헐버트 증손자(Kimball A. Hulbert) 참석’
헐버트는 우리에게 어떤 인물인가. 그는 칠흑 같은 어둠의 조선 땅에 문명의 횃불을 들고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불어넣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이리떼 같은 이웃나라들이 조선을 집어 삼키려 덤벼들자 그는 온몸으로 막아서며 조선의 독립을 위해 질풍노도의 기세로 생사를 넘어들었다. 그는 민영환의 지성과 애국심, 안중근의 정의와 평화 정신, 주시경의 한글사랑 정신을 함유한 진정한 겨레의 스승이다. 우리는 그의 은혜를 꼭 기억하여 한민족이 보은을 아는 문화민족으로 세계사에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헐버트의 업적이 우리 역사에 올바로 자리매김하고, 헐버트 정신을 기려 이 땅에서도 보다 많은 열린 세계인이 배출되기를 바라면서 설립 된 (사)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는 그의 한국 사랑에 보답하고자 매년 8월 5일 추모식을 거행하고, 후손 초청, 헐버트 관련 책자 및 전집 발간, 학술대회, 동상건립 등 헐버트 정신을 기리는 기념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Washington D.C.에 있는 주미한국대사관에 한미우호의 상징으로 서재필 박사의 동상이 세워졌다고 한다. 필자는 미국 어딘가에 헐버트의 동상도 꼭 세워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의와 인간애의 사명으로 한국을 사랑하고 올바른 가치관을 실천한 헐버트야말로 올바른 한미관계의 상징이자 지구촌 모든 젊은이들의 귀감이 될 수 잇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동상은 헐버트의 은혜에 감사하는 한민족의 정성어린 마음이 담겨 있어야 한다, 최근 서울시에서 한글마루지 사업의 일환으로 헐버트의 동상을 세종대로 통에 세우기로

▲ ‘헐버트 일대기 <파란눈의 한국혼 헐버트>’
결정하였다. 늦엊지만 참으로 기쁜 일이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 낯선 이름인 ‘헐버트’가 태평양 넘어 미국에서 많은 동포들에게 감동과 희망을 주는 이름이 되기를 기원하면서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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