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키운 건 팔할이 '大地'였다"
상태바
"그를 키운 건 팔할이 '大地'였다"
  • 최승현 기자(모스크바 뉴스프레스)
  • 승인 2012.10.23 17:2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모스크바 한인회, '야스나야 폴랴나'(Yasnaya Polyana) 문학기행

문학과 사상의 젖줄 밟으며, 대문호의 숨결 느껴 
적막한 무덤, 톨스토이의 금욕적 삶과 청빈 상징

‘야스나야 폴랴나’의 톨스토이 무덤을 찾어갔더니 
이분 사진의 수염처럼
더부룩한 잡초만 자욱할 뿐,
나무로 깍어 세운 碑木 하나도 보이지는 않습디다.
2백5십만 마지기의 땅을
농민들에게 모조리 그저 노나주고
자기는 손바닥만한 碑石 하나도 없이
풀들과 새, 나비들과 바람와 하늘하고만 짝해서 누웠습디다.
‘참 잘했다 영감아!’ 하는 소리가
하늘에선 그래도 울려옵디다. -서정주(1915∼2000)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1828~1910)에 버금가는 한국의 문호가 있다면 단연 미당(未堂) 서정주를 꼽는다. 미당의 톨스토이에 대한 존경심과 애정을 담은 이 詩는 그가 작고하기 10년 전에 러시아를 방문한 이후 쓰여졌다. 그는 자서전에서 생을 좌우할 정도로 자신에게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친 작가가 톨스토이며 그의 작품 ‘부활’이라고 적은 바 있다.

그의 초기 시가 보들레르로 대변되는 프랑스의 상징주의에서 영향을 받았다면 노년기의 작품들은 톨스토이의 철학과 사상에 밀착한 작품을 썼다. 갑작스럽게 미당이 떠오른 건 러시아 대문호인 톨스토이의 생가를 방문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기 때문이다. 제6대 모스크바 한인회(회장 김원일)는 10월 20일 토요 문화 행사 일환으로 제5회 러시아 토요문화기행을 개최했다. 이번 회에는 첫회 때 방문했던 툴라, 톨스토이의 생가가 있는 야스나야 폴랴나를 다시 찾았다.

한국 사람 역시, 굳이 문학도가 아니더라도 유년 시절 그의 작품을 읽으며 어둠을 사르는 촛불처럼 밤을 지새운 기억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날 참석한 30명의 참가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톨스토이의 작품을 읽던 수줍은 유년 시절로 회귀하는 듯했다. 러시아의 드넓은 대지로 향하는 참가객들의 얼굴은 가을색으로 홍조빛을 띠었다.

그러나 타향살이에 지쳐 차가워진 피가 생기를 얻고 돌연 뜨겁게 끓어오르듯, 어슷어슷 놓인 징검다리를 건너듯, 차량 내의 낯선 분위기는 이내 추석상에 진설한 홍옥처럼 발그래졌다. 무엇보다 모스크바 시내를 떠나 두 손을 활짝 벌린 채 지친 영혼을 어루만지는 러시아 대자연의 품에 안긴다는 설렘이 참가자들의 가슴을 요동치게 했다. ‘대지는 어느 누구만의 소유가 아니다’며, 나눔을 실천한 톨스토이의 대지. '전쟁과 평화', '안나 까레리나', '부활' 같은 명작을 집필했던 작가의 땅' 야스나야 폴랴나'는 과연 어떤 곳일까.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무는 사이 어느덧 버스는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녀의 눈썹을 상기시키는 비료자 나무의 행렬. 가을을 수놓은 오색창연한 빛깔. 러시아를 대표하는 자작나무의 향연은 계속됐다.

네 시간 쯤 지났을까. 어느덧 버스는 종착지에 다다랐다. 수 많은 인파들이 톨스토이의 생가를 찾았다. 야스나야 폴라냐 인근에는 신혼 남녀들과 친구들로 가득했다. 예식을 올린 이후 해외로 신혼 여행을 떠나는 한국인들의 대체적인 혼례 과정을 생각해본다면 결혼 후 자기가 태어난 고장의 명소를 찾으며 축복을 기원하는 러시아의 혼례식이 자못 부럽기까지 했다. 야스나야 폴랴나는 우리를 전쟁과 평화의 주인공인 것처럼 작품 속으로 끌어들였다. 이렇게 톨스토이의 문학은 야스나야 폴랴나를 빼놓고는 상상할 수 없다. 톨스토이 문학의 시초이며 그의 사상을 영글게 한 젖줄이다. 대자연과 더불어 삶을 영위했던 귀족들과 소작민들의 삶이 보이는 듯 했다. 그들은 이미 이곳에 없으나 역사는 여전히 흔적으로 남아 실타래를 틀고 있었다.

세계에 기리 남을 작품만을 남겨둔 채 그가 숨을 거둔 지 백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이곳 야스나야 폴랴나는 그의 생애와 사상이 온전히 남아있었다. 그는 영원히 살기 위해 인간의 기억 속으로 칩거해 들어갔는지도 모른다. 야스나야 폴랴나는 그의 작품처럼 절대 고독과 그 외로움 속에서 내면을 응시한 톨스토이의 언어가 아직도 올올이 담겨 있는 듯 했다.

서거 100년이 지났지만 생전 모습 그대로인 야스나야 폴랴나는 찰나의 시간과 억겁의 시간이 함께 머무는 듯 했다. 대문호의 작품은 삶을 꿰뚫어보는 은일(隱逸)과 고독 속에서 탄생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청교도로서의 삶을 살다가 세속의 모든 욕망을 버리고 여든두 살 홀연히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난 톨스토이. 한평생을 자신의 신념대로 살다 삶과는 상반된 죽음을 맞이한 톨스토이의 생애를 돌이켜보며 그것은 수도승과 같은 고독한 수행의 길이었는지도 모르겠다고 여겨졌다. “야스나야 폴랴나, 빛나는 들판... 야스나야 폴랴나, 빛나는 들판...” 지명을 러시아어로, 그리고 한국어로 번갈아 가며 읊조렸다. 모국어가 어머니의 말이라면 어머니의 언어는 곧 대지의 속삭임일 지도 모른다. 러시아어가 우리말이 아닌 기자에게 이상하리만치 ‘야스나야 폴랴나’라는 단어는 마치 모국어처럼 친근하게 다가왔다.

이곳은 톨스토이가 살아생전 강조했듯, “이곳서 살지 않았다면 내 작품은 일찍이 쓰여지기 힘들었을 것이다”고 말했던 것처럼 톨스토이에게는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이며, 작가로서의 삶을 영위케 한, 그를 키운 수많은 유모와 같은 존재이기도 했을 것이다. 매표소를 지나자 영지를 감싸 않은 듯한 아름다운 호수가 자리 잡고 있었다. 참가자들은 호숫가를 지나 높이를 가늠할 수 없는 거대한 비료자 나뭇길을 오순도순 줄지어 걸어갔다.

작가는 이곳에서 전쟁과 평화를 비롯해 ‘안나 까레리나’ 같은 대표적인 작품을 남겼다. 비료자 나무 사이를 천천히 거닐며 그는 끊임없이 자신과 대화하면서 대문호로서, 청교도로서, 사상가로서의 삶을 살아왔을 것이다. 그런 톨스토이의 삶을 반추하려는지 참가자들의 발걸음은 더디기만 했다. 참가 인원 중 절반은 그의 무덤을 향해, 또 절반은 볼콘스키 저택을 지나 그의 생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러시아 아가씨의 안내에 따라 참가자들은 생가로 들어갔다. 귀족 출신의 톨스토이의 삶, 한평생 작가로 살다 간 그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의 저서를 집필한 공간은 같지 않았다. ‘안나 카레리나’를 집필했던 서재, ‘부활’을 집필했던 객실, 그가 태어난 소파를 보며 그의 한 생애가 방안 가득 출렁이는 듯 했다. 향년 82세에 서거했고 100년이 지났으니 대략 2세기가 지난 현재까지도 그의 생가는 당시의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었다. 야스나야 폴랴나 전경 역시 마찬가지. 창문 밖을 예의주시했다. 풍요로운 들판과 숲, 하심(下心)하듯 저마다 납작 엎드린 농노들이 살던 주거지가 눈에 들어왔다. 어느 집에서 군불을 지폈는지 모락모락 피어오른 연기가 농민들의 가난한 세간을 흐릿하게 감추며 유유히 떠가는 모습을 보며 인간의 고통과 헐벗음을 엿보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러시아정교회와 사유재산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청교도로서의 삶을 자처했고 ‘톨스토이즘’을 창시한 러시아의 대문호. 사유재산포기를 주창하고 자신의 저서에 대한 저작권까지 포기하려고 했던 그의 청빈한 삶의 태도를 그는 이곳 야스나야 폴랴나(빛나는 들판)에서 배운 것이리라. 생가에서 나와 참가자들은 그의 무덤이 있는 스타리자카스 숲으로 향했다. 한참을 걸었을까. 불연 듯, 멈춰서 묵념을 하고는 돌아서는 러시아인들이 보였다. 우리로 따지면 왕릉 같은 거대한 묘지를 기대했던 나로서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적막이 깃든 그곳엔 아무 표식도 없었다. 다만 땅의 일부로써, 결국 인간도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보여주는 듯 장방형의 무덤만이 참배객을 기다리고 있었다.

농촌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계절에 따라 생명이 샘솟는 땅을 보며 자란 그였다. 추운 겨울 꽁꽁 얼었던 땅도 봄이 오면 어머니의 젖가슴처럼 보드랍게 변하는 대지는 그에게 있어 일찍 여읜(그가 2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심) 어머니를 대신했는지도 모른다. 톨스토이는 자신의 전 생을 이곳에서 보냈다. 자연 속에서 벼리어진 예리한 시정은 더욱 견고해졌고 인생의 순례길에서 생명과 평화를 중심으로 깊어진 사유와 이웃의 삶을 보듬는 따뜻한 애정에 그의 문학과 사상은 더욱 여물었을 것이다. 어느덧 해가 저물고 있었다. 야스나야 폴랴나를 떠나야 할 시간 기자는 참가자들의 소감을 듣고 싶었지만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저마다 러시아의 대문호이자 사상가인 례프 톨스토이와의 곱게 싼 인연을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었을테니까.

(모스크바=최승현 기자 myimitrolls@gmail.com)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