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력은 질량에 비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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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력은 질량에 비례한다
  • 김제완
  • 승인 2003.01.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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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에 사는 사람들이 누구나 겪는 문제가 있다. 뉴욕이나 빠리 동경같이 외국의 도시에서 10년이상을 살더라도 길을 걸을때나 버스를 기다릴 때 발이 공중에 떠있는 것같은 착각이 든다. 발이 땅에 착지가 되지 않는 것같은 이런 경험은 외국에서 사는 사람들만이 겪는 톡특하면서도 즐겁지 않은 경험이다.

며칠전 친구를 만나서 점심을 먹고 나오다가 서울에서는 사물이 또렷이 보이는데 외국생활중에는 왜 그렇지 않을까. 이런 말을 했다. 이에 대해 그 친구는 자기 나름의 분석을 했는데 그게 아주 그럴듯했다. 외국 도시의 거리와 서울의 거리의 차이는 자신의 과거가 스며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라는 것이다. 중력은 질량에 비례한다는 제목은 여기서 나왔다. 과거의 경험이라는 질량이 있어야 중력이 생긴다는 뜻이다. 외국생활에는 과거의 경험이 스며있지 않으므로 발이 붕떠있는 듯한 느낌이 생긴다는 뜻이다.

실제로 빠리에 처음 도착해서 살았던 동네에 우연히 가보면 그곳은 붕떠있는 그 이상한 불안한 느낌이 적어진다. 10여년동안 그 동네에 대한 개인사의 과거가 퇴적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왼쪽그림3 이글의 작성자는 박영률출판사 사장 박영률씨이다. '일본은 없다' 라는 책을 펴낸 사람으로 그 제목도 박사장의 아이디어에서 나왔다. 그 뒤로 한국사회에 '무어는 없다'는 류의 말이 유행한 바도 있다. 그날 만나서 이 이야기를 듣고 동포언론에 게재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원고를 써달라고 했다.

박사장은 이미 동포들이 다 알고 있을텐데 자기가 뭘 쓰느냐고 했지만 우리가 막연히 느끼고 있는 것을 명확하게 하는 것이 바로 언론의 기능이 아닌가 해서 굳이 받아낸 것입니다. 박영률씨의 사진을 첨부합니다. 동포신문에 게재시 원고료는 별도로 받지 않습니다.


중력은 질량에 비례한다.

초여름 저녁이었다. 나는 파리의 한 지하역에서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울에서도 지하철을 자주 이용하는 편이고 기다리는 일은 다반사였다. 그날은 혼자였는데 그 역시 서울에서도 그랬다. 바쁜 일도 없었고 볼 일은 이미 다 보았다. 이제 집으로(정확하게 말하자면 친구집으로) 돌아가면 되는 시간이었다. 역은 저녁 무렵의 바깥 공기와 비슷한 냄새와 색채를 품고 있었다. 적당히 어둡고 적당히 밝은, 춥지도 덥지도 않고 건조하지도 축축하지도 않은 채 검은 터널의 입을 열고 있었다. 반대편에도 십 여 명이 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 옆에도 그 정도의 사람들이 말없이 서 있었다. 그들은 말이 없었다. 표정은 서울 사람보다는 부드러웠다. 조명도 창백한 서울의 형광등 빛과는 달리 노랑기가 돌고 있어서 오히려 따스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정말 조용했다. 벽에 붙은 포스터랑 천정으로 지나가는 전기줄이랑 발바닥에 깔인 타일 무늬랑을 훑어보던 나도 이젠 더 볼 것이 없어졌으므로 그냥 앞만 보고 서 있게 되었다. 음, 좀 심심하군 하는 생각이 들 때쯤이었던 것 같다. 그 순간 마치 바람처럼 내 몸을 감싸 돌아가는 것이 있었다. 소름이 끼쳤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무엇인가가 내 목덜미를 가볍게 잡아 올리는 느낌이었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갑자기 두 다리가 붕 떠 있는 느낌을 받게 되었다. 바닥을 내려 보았다. 발은 분명히 타일 바닥을 밟고 있었다. 앞을 보아도, 옆을 보아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러나 내 몸은 이미 균형을 잃어가고 있었다. 몸과 함께 감각도 균형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깊은 곳으로 떨어지는 순간에나 느낄 수 있을 것 같은 무중력 상태였다. 매우 자유로운 상태였지만 한편 매우 불안한 상태였다.

오래 전이 일이었지만 그 뒤 서울에서 지하철을 기다릴 때엔 파리의 그 지하철역이 생각나곤 한다. 그때 왜 그랬을까? 물론 파리는 서울이 아니었다. 그곳에는 나의 역사가 없었다. 나의 흔적이 없었고 나의 발자국이 없었다. 중학교 입학 기념으로 구두를 사러 간 양화점도 그곳엔 없었고 대입 예비고사를 치른 날 저녁에 친구들과 술집으로 달려가던 그 길도 그곳엔 없었다. 최류탄 가스를 피해 찾아든 골목이 있지도 않았고 만남과 헤어짐, 환희와 분노의 그림자도 그곳엔 없었다. 한마디로 그곳엔 나의 흔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왜 무중력 상태를 체험하게 되었을까?

지난주에 태양계와 블랙홀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보게 되었다. 모든 별은 인력을 갖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지구는 태양의 주위를 돌고 달은 지구의 주위를 돈다고 한다. 별의 인력은 별의 중력인데 중력은 그 별의 중심으로 향하는 힘이고 그 별에 있는 모든 것을 그 별의 표면에 올바로 서게 하는 힘이다. 그런데 그 중력의 세기는 그 별의 질량과 비례한다고 한다. 곧 무거운 별은 강한 중력을 갖고 가벼운 별은 약한 중력을 갖는다고 한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듣다가 갑자기 파리의 그 경험이 다시 떠올랐다. 그리고 그제서야 나는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그때 내 역사의 무중력 상태를 경험한 것이 아니었을까? 파리에서 나는 이방인이었고 그곳에는 나를 땅으로 끌어당기는 어떠한 책임과 권리도 없었다. 지켜야할 것도, 줄 수 있는 것도 그곳에는 없었다. 내가 떨어뜨린 눈물의 흔적과 땀의 기억이 그곳에는 없었다. 그것은 모두 내가 태어나고 자라고 지금 살아가는 한국에 있었다. 내가 나고 자란 서울에서 나는 한번도 심리적 무중력 상태를 느껴본 일이 없다. 그러나 파리나 뉴욕 혹은 프랑크푸르트에서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심심찮게 역사의 무중력 상태를 느끼곤 한다. 그리고 그 느낌은 쓸쓸하고 불안한 것이었다.

잠깐씩 느끼는 내가 이럴진데 그곳에서 평생을 살아가는 1세대 재외동포들이 겪는 무중력감은 어떨까 생각해 본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나와 비슷한 경험을 했으리라 짐작된다. 갑자기 무릎 아래가 사라져 버린 것이 아닌가 싶어 몇 번씩 땅을 밟아보았을 지도 모른다. 과연 그들은 자신들의 몸이 둥실 떠올라 허공으로 사라져버리지 않게 하기 위해 얼마나 무거운 짐을 자신의 어깨 위에 또는 마음속에 얹어 놓았을까? 그 짐의 무게는 과연 얼마나 되는 것일까 생각해본다. 결코 가볍지 않은, 가벼워서는 안 될 무게였을 것이다. 이제 바라건대 그 짐이 무거운 납덩어리로 끝나지 않았으면 한다. 때로는 좌와 우의 균형을 잡는 균형추로서, 또는 재외동포 2세와 3세가 뿌리를 내릴 그 땅의 기초를 다지는 주춧돌로 작용하길 바란다. 중력은 질량에 비례한다. 우리가 어느 곳에 살든 관계없이 우리의 질량을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역사다. (11.4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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