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돌아본 2002년 - 새해 벽두 난민 수용소 소요, 불법체류 단속 강화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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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돌아본 2002년 - 새해 벽두 난민 수용소 소요, 불법체류 단속 강화돼
  • 호주한국신문
  • 승인 2003.01.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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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1월 26일, 호주 건국기념일(Australia Day). 주요 언론의 1면은 피로 물든 한 장의 사진으로 뒤범벅됐다. 남반부 호주 대륙의 새해 벽두를 열었던 시드니 페스티발이 끝나는 날이기도 한 이날, 호주 언론은 남호주 오지 우메라 이민수용소에서 자유를 외치며 철조망으로 뛰어 내린 한 아프간계 청년의 좌절의 핏자국에 초점을 맞췄다.
이 청년은 아마 외국인으로 호주언론에 가장 많이 등장한 아프간계 난민 알리 박티야리(Bakhtiyari)씨의 막내 동생이었다. 박티야리는 99년 보트피플로 호주에 입국한 후 난민이 인정되어 난민보호 비자를 받은 상태에서 시드니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의 부인과 두 아들, 그리고 막내 동생은 우메라 수용소에 감금된 상태에 있었으며, 막내 동생이 비자를 요구하며 자해행위를 벌인 것이다.
박티야리 가족의 시위와 비극은 계속 이어졌다. 알마디르(Almadir, 13)와 마타지르(Matazir, 12)는 3월 우메라 난민 소요를 틈타 탈주에 성공한다. 이들은 난민인권 운동가들의 보호로 멜번에 소재한 영국 영사관에서 망명신청을 요청했지만, 영국 정부는 이들의 호소를 외면했다.
박티야리의 가족들이 언론의 주목을 받고 점차 시민들의 동정적인 여론을 이끌어가자, 보수언론의 기수 오스트랄리안紙가 총대를 매고 박티야리의 뒤를 캐기 시작했다. 오스트랄리안은 파키스탄과 아프간에 특파원을 파견, 박티야리가 10년 이상을 파키스탄에서 배관공으로 일해 왔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이 보도는 박티야리가 순수 아프간계 난민이 아닐 것이라는 이민성의 의문을 증폭시켰으며, 끝내는 박티야리 마저 난민보호비자가 취소되어 수용소에 갇힌다.
또한, 이민성은 박티야리의 동생으로 추정되는 아프간계 가족에게도 난민보호비자를 취소, 이들을 수용소로 보냈다. 이 가족은 박티야리와 친척관계가 없다고 항의했지만, 이민성은 이들이 정규 보고 절차를 무시한 채 허가지를 떠나 타스마니아에 간 것을 잠적으로 보고 이들을 추적했던 것이다.
이민성은 작년 회계연도에 난민신청 심사에서 기각당한 인원이 모두 6255명이며, 이 가운데 36%는 지하로 잠적했다는 자료를 밝혔다. 작년 회계년도에 이민성이 추방시킨 난민신청 기각자는 400여명에 불과하며, 1700여명이 자진 출국했다는 것. 일부는 브릿징 비자 상태로 영외거주를 허가받은 상태에서 정규적인 활동보고서를 제출하고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지하로 잠적했다고 밝히며 이들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을 예고했다.
이민성의 12월 17일자 보도자료에 따르면 지난 5년간 13,737명의 난민신청 기각자가 잠적했으며, 1999년 이후 263명이 수용소를 탈주해 도주 중으로 밝혀졌다. 또한 올해 6월 현재, 관광입국 비자만기가 끝난 상태에서 잠적중인 초과체류자가 무려 6만명에 가깝다는 자료도 공개되었으며, 이 가운데 한국인 2800명으로 출신국별 초과체류자 비율 톱 10에서 6위를 차지했다.(출신국별 초과체류자 순위: 영국 6400명, 미국 5400명, 중국 3900명, 필리핀 3600명, 인도네시아 3300명, 한국 2800명, 일본 2700명, 말레이시아 2000명, 타일랜드 1700명, 독일 1700명. 자료 이민성 12월 17일)
어느 해나 마찬가지로 2002년 호주는 영고성쇠가 교차된 한 해로 기억된다. 가장 큰 기복으로 인생의 부침을 보여준 인물은 호주 극우파의 여걸 폴린 해슨이었다. 핸슨은 1월, 작년 총선 실패 이후 끊임없는 법정송사에 시달리다 못해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핸슨의 최근 뉴스는 그녀가 팝 그룹의 매니저로 변신했다는 소식이다.
하지만, 올해 호주 정계는 보수파가 한껏 기승을 부린 한 해였다. 대표적인 경우는 상원의원 빌 해퍼난(Bill Heffernan)의 발언. 해퍼난은 존 하워드 수상의 측근이자 유명한 좌파사냥꾼으로 통한다. 그는 의원면책을 이용하여 동성애자이면서 좌파 지성인의 보루격인 마이클 커비(Michael Kirby) 대법관이 공관차량을 이용, 거리에서 남창을 유인했다는 폭탄발언을 한 것이다.
해퍼난의 발언은 불발탄으로 종결돼지만 끝내 폭탄은 발리 섬에서 터지고 말았다.
호주는 10월 12일 발생한 발리 폭탄에서 9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이는 호주 민간인이 비전투지역에서 가장 많이 사망한 비극으로 기록된다.

고직만 부장
chikmannkoh@koreanherald.com.au

By Sam Chong (2003년 1월06일 월요일 오후 02:25 EST) [ 종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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