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의 쉘터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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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의 쉘터섬
  • 최미자
  • 승인 2011.12.26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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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최미자 / 재미수필가

미국 남가주 샌디에고에서 살고 있는 재미수필가 최미자씨가 미국 생활의 소박한 이야기를 연재한다. <레몬향기처럼>(2007) <샌디에고 암탉>(2010) 등의 수필집을 발간한 그는 재미동포들이 일상에서 겪는 삶을 그려낼 예정이다.<편집자주>

거대한 태평양 바다로 친정어머니를 뵈러 간다.

세상을 떠나기 한 달 전 쯤, 양로병원의 간호사한테서 어머니가 식사를 거절한다는 소식이 왔다. 생전에 명랑했던 어머니도 생로병사의 고통은 피할 수 없었다. 자신의 찌그러져 가는 얼굴을 가증스러워했고 종종 억지소리도 했다. 일 년 육 개월쯤 병실에서 누워 지내니 살이 헐기 시작했다.

오래전 시어머님이 심한 등창으로 악취가 풍기던 방이 떠올랐다. 동서와 함께 붙들어 몸을 씻어 드리면서 보았던 깊은 상처. 환자 본인은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난 친정어머니가 그렇게 고생할까 봐 퍽 걱정되었다. 잔인했지만 어머니 귀에 대고 이젠 몸 바꾸실 때가 되었다고 귀띔해 드렸던 나는 불효녀였다. 생전에 어머니와 나는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한 토론을 종종 했기에 감히 용기를 낸 것이다.

더 이상 어머니의 생명을 억지로 연장하지 말고 모든 약을 끊기로 하자며 큰 오빠도 병원 측에 알렸다. 두 시간 운전을 하여 우리 가족이 어머니를 방문했던 일주일 전이 마지막이 되어버렸다. 하얀 수의로 갈아입혀 진 주검이 건장하고 무표정한 백인의 어깨 위에 얹히어 화장터로 갔다. 장미꽃으로 덥힌 관 속의 평화로운 어머니 모습을 뒤로한 채, 나는 우리 집에서 지낼 장례 준비로 친정아버지 때와 달리 화장터에 가보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후회되었다.

언젠가 미국에 이민을 막 온 나에게 어머니는 보여줄 것이 있다며 옷장 문을 열었다. 상자 속의 보자기 속에는 하얀 수의가 새 신발과 들어 있었다. 재봉틀이 없어 손으로 한 땀 한 땀 윤달이 든 해에 어머니가 바느질하여 만들었다는 수의. 일흔 초반의 어머니가 나에게 마지막 길을 특별히 부탁하는 게 아닌가. 레이스로 장식된 하얀 수의를 바라보며 솜씨를 칭찬 드려야 할지 울어야 할지 당황했던 그날.

관속에 함께 태워 달라던 봉투를 열어보니 송광사 방장 구산 스님, 법정과 일타 스님으로부터 받은 편지들이었다. 태우기 아까워 몇 개는 남겨두었다. 나도 좀 더 나이를 먹으면 어머니처럼 용기를 내어 호주머니가 없는 하얀 수의를 날마다 바느질하며 홀가분하게 이생의 끝을 준비할 수 있을까.

불교에서 죽음은 헌 옷을 버리고 새 옷으로 바꾸어 입는다고 한다. 슬퍼서 너무 울면 가신님에 대한 집착이 되니 서럽게 울지도 말란다. 산수 곡절 다 날려버린 도를 통한 사람처럼 되란다. 장례식 날 배를 타고 멀리 허락되는 바다에서 아쉬움으로 모두 통곡하며 한 사발쯤 되는 재를 출렁거리는 파도 위로 날려 보냈다.

수장을 마치고 배에서 내린 우리는 늦은 오후여서인지 허기진 배를 채우려고 식당으로 갔다. 배가 불리니 어머니가 치매에 걸리지 않고 편안히 가셨으니 호상이라며 분위기가 돌변했다. 설치된 노래방 기계가 슬픈 상주였던 우리를 유혹했다. 식당 사람들에게 이상하게 보였을 즉흥적인 노래파티는 마치 어머니의 행복한 내생을 위한 장송곡 같았다.

와병에 효자 없다더니만 병간호를 하던 나도 지쳐서 하는 수 없이 양로병원으로 가시게 했던 절박한 상황의 지난날들이 떠올라 장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엔 마음이 헷갈리어 무척 괴로웠다. 아니야, 결혼 전 어머니는 일본으로 유학을 준비할 정도로 노래를 좋아했다. 언젠가 로스앤젤러스 노인들의 노래자랑에서 남진이 부른 ‘님과 함께’를 멋지게 불러 예쁜 닭 모양 그릇을 상으로 받지 않았던가. 또 우리 형제가 모여 노래방에 가서 놀 때도 팔순의 어머니는 즐거워했다.

걱정스러운 것은 장례식에 참석했던 골트 박사가 희한한 광경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지. 그분은 1960년대 유학 온 오빠들과 언니를 돌봐준 분이었기에 가족처럼 참석했다. 묘하게도 그분이 던진 장미꽃 한 송이가 유난히도 배 근처를 맴돌았다. 9년 후, 닥터 골트도 어머님처럼 1월에 세상을 마감했다.

바다에서 돌아오는 길 어머니가 살다 간 아파트 앞을 지나면서 자동차 핸들을 잡은 내 손위로 굵은 눈물이 우두둑 떨어졌다. 오래전 로스앤젤러스의 길에 서서 버스를 기다리며 딸들이 자기 어머니를 차에 태워 가는 걸 부러웠다던 말씀이 생각나서였다. 내가 이민 오기를 학수고대했던 어머니에게 쫓기던 초기의 이민생활로 더 잘해 드리지 못해서다.

쉘터 섬의 바다에서 어머니의 제사상을 마음으로 차려놓고, 집에 돌아와 정화수와 촛불을 밝혔다. 장례식 날 손녀딸이 부른 ‘나의 날개를 받쳐 주는 바람(Wind Beneath My Wing)’을 타고, 태평양을 따라 청렴한 아버지랑 고생했던 대한민국도 가보셨는지. 저 세상에서 울분과 함께 일본말로 공부하던 그리운 여학교의 친구들도 만나보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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