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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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지 이야기
  • 엄종열 원장
  • 승인 2011.11.30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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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엄종열 미주 한국전통문화연구원 원장

엄종열 원장
현재 프랑스 파리에 소재한 국립도서관에 보존되어 있는 세계 단 하나 밖에 없는 <직지>의 책 이야기입니다. <직지>의 원래 이름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常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인데 이 책을 ‘직지심경’이라고도 부르고 ‘직지심체요절’ 혹은 줄여서 ‘직지’라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책이 불교경전에 관한 책이 아니기 때문에 ‘직지심경’이라 부르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직지’는 1967년 프랑스 국립도서관 고서적 창고에서 당시 그곳 솔본느 대학에 유학중이던 박병선 박사에 의해 처음으로 발견돼 200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 유산으로 선정 발표됨으로 일약 세계적인 관심과 각광을 받게 된 귀중한 책입니다.

<직지>는 1377년 7월 고려 우왕 3년 충북 청주에 있던 흥덕사(지금은 없어지고 주춧돌만 남아있음)에서 최초로 금속활자로 인쇄된 서적입니다. 당시 흥덕사 스님 백운 이라는 분이 부처님과 부처의 제자인 인도와 중국 및 한국의 역대 고승이 남긴 말씀중 선(禪)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내용을 요약한 책입니다. 이 책이 발견됨으로 세계 출판계뿐만 아니라 문화계 전체의 비상한 관심을 끌게 된 직접적 이유는 지금까지 온 세계가 알고 있는 최초의 금속활자 발명인은 독일의 구텐베르크였는데 ‘직지’의 발간 연대가 구텐베르크의 최초 인쇄본보다 78년이나 앞섰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백운화상에 의해 저술된 이 책은 그의 제자인 석찬과 달장 그리고 재정적 지원자인 비구니 요덕 등에 의해 두 가지 형태로 책이 만들어 졌는데 하나는 1377년 금속활자로 찍은 책이고 또 하나는 그 이듬해 1378년 백운화상이 입적한 경기도 여주 취암사에서 목판으로 찍은 책입니다. 이 목판본 <직지>는 현재 국립 중앙 도서관 한국학중앙연구원(장서각)에 상, 하권이 보존되어 있으며 1997년 전라남도 영광 불갑사에서 출토된 것과 합쳐 총 3종의 목판본이 국내에 현존합니다. 이에 반해 금속 활자본 <직지>는 하권 1권만이 프랑스 국립 도서관 동양 원서부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금속 활자본<직지>는 19세기말 초대 대한제국 프랑스 공사로 부임한 꼴랭드 뿔랑시가 수집하여 프랑스로 반출 하였는데 그 후 1911년 드루오 경매장에서 꼴랭드 뿔랑시 소장 경매때 앙리 베베르라는 사람이 구입하여 보존하고 있다가 1953년 앙리 베베르의 유언에 따라 프랑스 국립 도서관에 기증한 것입니다.

금속 활자본 <직지>에 대한 기록은 꼴랭드 뿔랑시와 조선에서 함께 근무한 모리스 꾸랑이 1901년 지은 <조선서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책은 불어판으로 출간 되었지만 당시에는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직지>가 처음 소개되었을 때 한국이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 사용하였다는 사실을 서구의 학자들은 선뜻 인정하기를 거부 했습니다. 그 이유는 백인 우월주의와 서양의 문물이 동양을 앞지른다는 고정 관념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한국이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 사용하였음을 확실하게 고증하고 유럽 내 동양학 학자들의 모임인 ‘동양학학회’에서 이 사실을 발표하여 공식 인정을 받아낸 분이 박병선 박사입니다. 박병선 박사는 1926년 서울에서 태어났고 그의 부모는 당시 독립군에게 자금을 비밀리에 조달한 애국지사 이었습니다.

6.25동란이 발발했던 1950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사학과를 졸업하고 해방 후 첫 프랑스 유학생으로 솔본느대에서 수학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했습니다. 유학길에 오를 때 그의 스승이었던 이병도 교수께서 다음과 같은 당부를 하였다고 합니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약탈해간 외규장각 도서의 행방을 찾아보게” 이 부탁의 말씀을 마음에 새긴 박병선 박사는 그곳에서 역사를 전공하면서 학문에 열정을 기울였고 많은 정보를 설립하고자 파리 국립 도서관을 자주 출입하면서 마침내 특별 연구원으로 채용되어 동양 특히 한국 책의 선별과 해제를 맡게 되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외규장각 도서의 행방을 찾아 노력하던 중 1967년 우연하게도 <직지>를 발견하게 되고 1978년 드디어 외규장각도서 297권의 행방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가 발견한 <직지>는 놀랍게도 그 마지막장에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인쇄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유네스코는 1972년 <직지>가 세계 최초의 금속 활자본임을 온 세계에 공식 발표하기에 이르고 2001년에는 그 가치를 인정하여 세계 기록유산으로 정식 선정 등재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그동안 사용되던 모든 관련 서적들의 수정이 불가피하게 되었으며 특히 세계적인 권위를 가진 백과사전들의 재 인쇄를 단행해야 되는 상황이 초래 되었습니다. 최근 새로이 발간된 브리테니카(Britanica) 백과사전의 인쇄(Printing)와 금속활자(Metallic Type)난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쇄물(목판)은 서기 750년에 코리아에서 인쇄된 불교 경전이다. 활자 주조공장은 14세기 후반 코리아에서 최초로 설립되었으며 그곳에서 수 없이 많은 동판으로 된 동일 형 활자 세트(fonts)가 주조되었다. 코리아에서는 중국과 달라 13세기 전반에 이미 인쇄술이 시작되었으며 1403년 태종의 명령으로 동판 활자 10만개를 주조함으로서 인쇄술이 대대적으로 발전해 나갔다. 또한 일본의 ‘만유백과 대사전’에는 다음과 같이 기재돼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쇄물(목판)이 일본에 남아 있다고 여겨 왔지만 1966년 조선 경주 불국사에서 ’다라니‘의 인쇄물이 발견되어 그것은 8세기 전반의 것으로 이는 일본의 것 보다 훨씬 이전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세계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금속 활자체는 고려시대 (1377년) 것이다.’

<직지>가 갖는 참 의미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정리해 봅니다. 인류는 의사 전달을 위해 네 번에 걸친 정보 혁명을 거쳐 발전하였다고 합니다.

첫 번째로는 몸짓이나 소리에 약속된 의미를 부여하여 의사를 전달한 것을 말할 수 있으며 두 번째는 각종 부호나 문자를 사용하여 기록하기 시작한 것이고 세 번째로는 금속 활자를 발명하여 책을 간행한 일이며 네 번째로 컴퓨터의 발명을 들 수 있습니다.

학자들은 이 가운데 가장 위대한 혁명이 금속활자의 발명을 꼽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활자를 이용하여 책을 간행하여 보급함으로써 정보의 대량전달이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정보화의 가장 핵심인 금속활자의 발명이 <직지>의 발견을 통하여 13세기 초에 한국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이 증명되었습니다. 따라서 <직지>는 세계 어느 민족도 이루지 못한 금속활자를 우리 민족이 발명한 슬기로운 문화민족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증거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직지>는 인류문명사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의 소산인 동시에 오늘날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정보화 시대를 연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5천년 역사 속에 우리조상들이 남긴 수많은 문화유산 중에서 유일하게 남아 찬란한 빛을 발하는 <직지>야 말로 인류 역사상 선구자적 역할을 담당한 보배로운 우리 민족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자 세계인이 영원히 공유할 귀한 문화유산입니다.

<후기>
1239년에 목판으로 간행된 ‘남명천화상송증도가’(南明泉和尙頌證道歌)라고 하는 고서가 현재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서적은 원래 금속활자 본이었는데 목판으로 다시 새겼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이것으로 보아 1239년 (‘직지’보다 138년 앞섬) 이전에 이미 금속활자 인쇄가 진행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이규보가 1234년에서 1241년 사이에 저술한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의하면 ’상정예문(詳定禮文)28부를 금속활자로 인쇄하여 각 관서에 나누어 주었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안타깝게도 기록으로만 전할뿐 실물이 전해지지 않기 때문에 세계인의 공인을 받지 못하고 있지만 우리 민족의 혼이 담긴 <직지>는 실물이 전해졌기 때문에 유네스코의 공인을 받아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것입니다. <직지>의 경제 가치는 1조원에 이른다고 하며 유네스코는 이를 기념해 2004년 4월 ‘직지상’을 제정한 뒤 2005년부터 격년제로 기록유산의 보존과 할용에 공한한 개인이나 단체에 시상하고 있습니다. 독일 Mainz에 있는 세계인쇄술 박물관(Welt Drunkust Museum)에는 한국인쇄술이 구텐베르크보다 100년 앞섰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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