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박한 땅에 동포를 위한 첫 씨를 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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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박한 땅에 동포를 위한 첫 씨를 뿌리다
  • 홍제표
  • 승인 2004.01.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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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지 ‘OK(Overseas Koreans) TIMES’ 발행인 이구홍(62) 해외교포문제연구소장은 관련 분야에서 단연 독보적이면서 특이한 존재다. 이 소장은 전쟁 직후 모든 것이 황량하기만 했던 지난 60년대에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던 동포문제에 천착, 40여년이 흐른 지금까지 묵묵히 한 자리를 지켜왔다. 따라서 사십 풍상을 겪는 동안의 실전적 노하우는 아무래도 이론과 학술중심일 수밖에 없는 젊은 후학들에게 자성의 죽비 역할을 하고있다.
한 우물을 고집해온 그의 우직함은 시작부터가 특이했다. 그는 지난 60년대초 한국외대 영어과 재학중 당시 한일회담 반대 데모에 앞장섰다. 시위 지도부내에서도 주동자급이었던 그가 맡은 역할은 재일교포 문제. 난생 처음 접한 새로운 세계가 그를 동포사회로 깊숙이 끌어들였다.
국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일회담이 성사되자 그는 아예 학업까지 뒤로 제껴둔채 동포문제 연구자로 발벗고 나선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게 1963년 4월1일 창립된 해외교포문제연구소로 당시 그의 나이 24살에 불과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줄 모른다고 정말 겁이 없었죠. 당시 대학생들의 데모가 심해지자 당시 실력자인 JP가 직접 나서서 대학강연을 다녔어요. 워낙 달변에다 논리가 반듯해서 학생들이 다 넘어갔죠. 그래서 나는 우리 학교에만 와봐라 하고 잔뜩 벼르고 있었어요. 재일동포가 왜 생겨났으며, 어떤 차별과 고통을 받아왔는지, 이런 것들을 밤새 연구하며 논리를 개발한 거죠. 마침내 외대 강연회때 내가 나서서 집중 성토를 했어요. 천하의 JP가 조무래기 대학생 한 명한테 완전히 박살난 거죠. 껄껄껄.”
그의 당돌함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뭔가를 해보려해도 가진 돈이 없자 일면식조차 없는 당시 엄민영 내무장관을 막무가내로 찾아갔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대구사범 동기동창으로 당대의 막후 실력자였던 엄 장관을 만나기란 한 자리 한다하는 사람들도 쉽지않은 일이었다.
“열아홉 번만에야 겨우 만날 수 있었죠. 처음엔 괄시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식모조차 날 우습게 알고 문도 안 열어줬으니까요. 나중에는 꾀가 생깁디다. 한 번은 아예 정색을 하고 다가가니까 식모가 이상하다 싶었는지 일단 문은 열어줬어요. 이때다 하고 준비해온 화장품 선물을 들이밀고는 냅다 달아났죠. 그 뒤 1주일쯤 지나서 다시 갔더니 태도가 한결 누그러져 있었어요.”
이렇게 어렵사리 성사된 엄 장관과의 면담자리에서 그는 ‘브라질 10만명 이민론’을 주창했다. 브라질 같은 곳에 10만명만 농업이민을 보내 정착시키면 그들의 송금액만으로도 경제 기틀을 다지는데 유용할 것이라는게 요지다. 그러면서 그는 “2차대전에서 패배한 이탈리아가 재건에 성공한데는 총리가 나서서 청년들의 이민을 독려했기 때문”이라고 설득했다. 아닌게 아니라 당시 남한은 아무런 경제기반이 없던 상황인데다 실업난이 지금과도 비교가 안될 만큼 극심해서 이민이 아니라 다른 무엇을 통해서라도 돌파구를 찾아야 할 상황이었다.
겁없는 20대 청년의 직설화법은 실력자의 마음을 움직였다. 엄 장관은 이 소장의 말을 묵묵히 듣고나서는 대뜸 청와대 들어갈 준비를 하라고 명령조로 지시했다. 이 소장은 기대 이상의 반응에 뛸 듯이 기뻤지만 당시의 절대권력자와 대면한다는 생각에 마음 한편으론 두려움도 일었다. 그의 회고는 생생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박 대통령을 면담했어요. 그런데 분위기가 생각보다 따뜻합디다. 대통령이 내 얘기를 듣는 동안에만 아마 담배 반 갑은 족히 피운 것 같았어요. 얘기를 다 듣고나서는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가 싶더니 갑자기 이럽디다. 무릎을 탁 치면서 ‘이 군!’ 하는 거예요. 이민대학을 만들어주고 학장으로 발령내주겠다면서 동석한 엄 장관에게 모든 것을 후원해주라고 즉석에서 지시한 것입니다. 정말 평생 잊혀지지 않는 날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지시는 결과적으로 지켜지지 않았다. 엄 장관이 그로부터 얼마 후 주 일본대사로 발령났다 현지에서 사망했기 때문이다. 최대 후원자가 사라지면서 이 소장은 다시 빈털털이 신세가 됐다. 그는 이후 젊은 시절 잠시 맛본 영화를 끝으로 고단하고 외로운 길을 오로지 자력으로 헤쳐나와야 했다. 지난 95년 지금의 서울 종로구 낙원동의 한 오피스텔 사무실을 얻기 전까지 이사한 것만도 30여차례. 거의 1년에 한 번꼴로 옮겨다닌 셈이다.
없이 살아서였을까? 환갑을 훌쩍 넘긴 나이에 사물을 바라보는 눈도 무뎌질 법하건만 그의 비판정신은 여전히 쟁쟁하다. 기자와의 만남에서 첫 질문이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그대로 옮길 수 있소?”하는 것이다. “못할 거야 없지요” “그럼 오늘은 외교부를 좀 비판해보겠소”
40년 그의 경험에 따르면 외교통상부의 동포정책은 한 마디로 ‘불가근 불가원’이란다. 이에 대해 그는 “좋게 말해서 불가근 불가원이지 솔직히 말하면 ‘적당히 대하자’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그 단적인 예가 바로 외교부가 교민청 신설을 반대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정부조직 속성상 누구나 산하기관을 늘리고 싶기 마련인데 유독 외교부만 반대하는 이유가 뭐겠소? 외교부 관리들이 국가예산 아까워하는 애국자들로만 모여있는 것도 아닐텐데 말이오. 그건 교민청 신설이 외교부로서는 불이익이기 때문이죠. 이유는 간단해요. 600만 동포들이 주변 4대강국에 포진해있는데 괜히 교민청같은 것을 만들어 외교마찰의 요인이 되는 것을 원치않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예를 들어 ‘로버트 김’ 사건 하나만으로도 골치가 아픈데 교민청이 생기고 동포정책이 강화되면 이런 일들이 부지기수로 늘어날 겁니다. 외교부로선 감당해내기가 두려운 것이죠.”
하지만 이는 약소국가의 어쩔 수 없는 현실이 아닐까. 이 소장도 인정하듯 외교부의 임무와 역할이 동포문제만은 아닐텐데 4대강국과의 관계도 고려해야 한다는 의문이 드는 대목이다.
“맞는 말이오. 하지만 내가 비판하고자 하는 바는 그 현실의 벽에 안주하거나 현실을 오히려 왜곡하려드는 태도입니다. 세상에 우리 민족처럼 핏줄을 중시하는 민족이 어디 있어요.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분명한 현실입니다. 그런데 그런 민족을 보고 미국국적을 가졌으니 미국인이다. 우리랑 상관없다. 이렇게 대하는게 우리의 교민정책, 동포정책입니다. 로버트 김 사건때도 마찬가지 논리가 적용됐습니다. 그가 간첩죄로 복역중이긴 하지만 대단한 죄를 지은 것도 아닙니다. 기껏 조국을 위해 자신의 불이익을 감수했지만 돌아온 결과는 조국의 차디찬 외면이었습니다. 그게 바로 YS정권때 시작된 현지화정책입니다. 각자 살고있는 나라에 충성하라는 겁니다. 그 뿌리가 깊어요. 80년 5.18직후에는 미국 교민들이 광주에서의 일을 걱정하자 한병춘 당시 주미대사가 그랬습니다. 교민들은 성조기에 경례하는 법부터 배우라고...”
실전에서 몸으로 체득한 이론은 어떤 상황에서도 빛을 발하기 마련이다. 그는 긴가민가하는 기자에게 이번에는 쉬운 예를 들어 설명했다.
“나는 중학교를 마치고 고향인 충남 부여를 떠나 지금까지 서울에서 살았어요. 그런데 내가 몇십년째 살고있는 서대문 구청장의 이름은 모르지만 명절때도 잘 못내려가는 부여군수의 이름은 안단 말이에요. 조국을 떠난 동포의 심정도 아마 이와 같을 겁니다. 5.18때 미국교포들도 그랬어요. 당시 한국 내에서만 보도가 안됐지 외신들은 광주에서 난리가 났다고 매일 대서특필하고 있었단 말입니다. 교포들이 그걸 보고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주미 대사관에 따지고 드니까 대사관에서는 너희들은 미국시민이니까 미국의 일이나 신경쓰라는 투였습니다. 교민들이 뭐랬는줄 아십니까? 친정에 불이 났는데 어떻게 모른척 하느냐. 이런 것이 동포의 마음입니다. 결국 현지화정책은 이론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잘못된 정책입니다.”
이처럼 날카로운 비판론을 던지는 와중에도 그의 시선은 최근 동포사회의 화두로 떠오른 재외동포법 개정 문제와는 약간 비껴서있다. 특히 최근 논란을 빚은 국적회복운동을 둘러싼 마찰에 대해서는 매우 차가운 반응이다. 법이 있고 없고가 문제가 아니라 해외동포에 대한 시각 자체가 문제라는 것인데 다소 원론적인 관점으로 비춰진다.
“동포법이 없을 때도 유럽이나 미국동포들이 본국출입에는 문제가 없었어요.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못사는 나라 동포들 때문인데, 결국 법이 문제가 아니라 정부나 국민들의 시각이 잘못됐다 이겁니다. 지금껏 동포를 짐 취급해왔다면 빨리 고쳐야 합니다.”
이번에도 전문가답게 외국의 사례가 소개됐다.
“이스라엘이 건국될 때 인력자원이 부족하니까 러시아 유태인들을 많이 데려갔어요. 그런데 당시 소련이 제동을 걸었습니다. 이들을 그동안 먹여살리고 교육시키는데 소련정부의 돈이 상당히 들어갔으니 공짜로는 데려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미국 유태인들이 돈을 대고서야 해결됐습니다. 그런데 중국 조선족 같은 경우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이들에게 10원 한 장 대준 적 있습니까. 어찌보면 우리는 중국정부에다 고마운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그나마 중국정부가 이만큼이라도 배려했으니까 조선족들이 우리말, 우리 풍습을 그대로 간직해온 것 아닙니까? 우리가 돈을 들여서라도 이들에게 우리 전통을 알려줘야 할 형편에 오히려 이들을 짐짝 취급하는 것은 이만저만 잘못이 아니란 말씀입니다.”
그는 그러나 무조건적인 당위론과도 거리를 두었다. 일부지역 동포들의 불법체류 문제와 관련, 그가 대안으로 제시한 아이디어는 ‘집단거주단지’ 개념이다.  
“그린벨트 지역을 일부 풀어서 약 5만명 정도의 주거시설을 만드는 겁니다. 여기에다 이들을 고용할 업주들이 조금씩 기금을 출연해 동포들의 항공료 정도는 보조해줘야죠. 가장 필수적으로는 영사관의 비자장사 같은 일부 외교관들의 못된 버릇부터 단단히 고쳐놔야할 겁니다. 그렇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동포들이 체류기간을 넘겨가면서 불법체류하는 이유가 입국하는 과정에서 브로커들에게 돈을 많이 썼기 때문에 본전을 뽑으려는데서 비롯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입국비용이 낮아지니 그럴 이유가 사라지고, 또 거주시설도 싸고 쾌적하니 다른 장소로 이탈할 염려도 훨씬 줄어들 겁니다. 당국으로서는 관리하기도 쉬운 것이죠. 지금 이들이 살고있는 가리봉동 쪽방 같은 곳은 정말 보기에도 안됐어요.”
글쎄... 그의 웅변이 정책당국자들에게 얼마나 먹힐지는 미지수다. 사실 지금까지도 그래왔듯 적어도 당분간은 그가 기대하는 만큼의 동포정책이 나오기는 힘들 것이다.
“어차피 이민은 남의 땅 모퉁이 ‘게토’같은 곳에서 시작되는 겁니다. 지금 세계를 사실상 경영하는 미국 유태인들도 처음엔 그렇게 힘들었어요. 우리 동포들도 이민 4,5세에 이르다보면 현지사회의 주류대열에 올라서겠죠. 하지만 겉만 노랗지 속은 하얀 바나나처럼 된다면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그때가 돼야 동포정책에 대한 뼈저린 반성을 하게되겠죠”
돌아선 그의 등이 무척 외롭고도 쓸쓸했다. 홍제표 객원기자 dongpo2003@hanmail.net



먹고살기도 바빴던 그 시절에 그나마 이런 사람 한 명쯤 있었다는 것은 동포로서나 본국인들로서 다행중의 다행이다. 수천년 유구한 전통을 면면이 이어왔다는 한민족이 근세기들어 남북으로 분단된 것도 모자라 동서남북의 주변 강대국으로 사방 갈리워졌는데, 하마터면 그 흔적조차 못찾을 뻔한 일이다. 본국 정부나 국민들이 우리도 사정이 어렵다는 이유로 동포들에게 최소한의 관심조차 보여주지 않았다면 반세기나 흐른 지금도 이들을 동포라고 부를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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