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지와 신용으로 일군 유럽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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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지와 신용으로 일군 유럽시장”
  • 오재범 기자
  • 승인 2011.05.09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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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황중계] 세계한상포럼 5탄 - 방준혁 유럽한인경제인총연합회 회장

누구나 외국에 나간 사연은 다르지만 방준혁 회장(70)의 이유는 남(?)달랐다. 사회에 대한 반항이라고 할까.

“제가 대학생이 되고 해외에 나가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하지만 집안의 뜻에 따라 공무원이 돼서 광주, 목포 법원 공무원으로 근무를 했습니다.”

방준혁 회장은 전북 남원에서 태어나 9남매의 장남이었지만 큰아들이 모든 것을 책임지는 것이 힘들고, 농사짓는 것을 챙겨야 하는 것이 싫었다고 한다. 그렇던 시절 한국정부는 파독광부 모집을 했고, 그는 1970년 꿈에 그리던 독일로 건너갔다.

“지하 1,300m에 들어가서 일해야 한다는 것은 좋은 조건이 아니었지만, 광부일이 생각보다 위험하지도 않았고, 만족도가 괜찮았습니다. 월급 때문이었지요. 법원 공무원시절에는 한달에 8천원 벌었는데 광부시절에는 500마르크를 받았으니 약 800배가 많았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에 돈을 벌어서 한국에 송금하는데 주력하기 보다는 독일을 배우는데 많이 썼다고 고백했다. 현지를 여행하는데 한달 평균 70마르크를 썼으니 동료들 중에서는 매우 파격적이었다고.

“독일 경제력이 좋으니 이곳에 남고 싶었고요. 그래서 파독광부 3년 계약이 끝나고 벤츠(Benz)에 취업했습니다. 다행히 당시 고용한 상사가 한국에 대해 잘 알고 있어서 취업이 쉬웠습니다.”

취업 후 방 회장은 독일에서도 열심히 일하니까 인정해줬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수습사원 작업이 끝난 뒤 누가 시키지 않았어도 자발적으로 작업장 청소를 열심히 했다는 것이다.

“독일 현지인과 경쟁해야 하는 저는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저는 잘 몰랐지만, 회사측에서 이를 일일이 기록했더라고요. 그래서 수습기간 없이 바로 정직원으로 채용됐습니다.”

당시 벤츠는 수습기간을 6개월 두고 신입사원들을 테스트 했던 것이다. 방 회장은 대신 월급으로 보상받았다. 첫 월급은 광부시절의 두 배인 937마르크를 받았다고.


그는 순탄한 회사생활을 시작했고, 스스로도 열심히 일해 ‘명장(마이스트)’까지 올랐다. 월급도 많고 누가봐도 평탄했다. 하지만 그에게 변화의 기회가 왔다.

우리나라에 벤츠자동차가 한국에 진출하려고 했고 회사측은 먼저 방 회장에게 한국법인 설립의향을 물었다고 한다. 그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하지만 회사는 이를 위한 자본금 200억원을 먼저 갖출 것을 요구했고, 그는 한국에서 이 돈을 구해보려고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실망한 그는 새로운 길을 찾고자 사표를 냈다.

“80년에 서울센터를 창업했고 무역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한국제품 50가지를 선정해서 독일에 가져갔습니다. 시장조사도 없이 시작한 것은 정말 무모했지만, 가져간 제품들이 현지에서 연이어 히트를 쳤습니다.”

그는 이중 한국산 보온병의 유럽총판을 맡아서 2년간 판로를 뚫는데 주력했다. 당시 한국에서 만들던 보온제품은 겉은 가죽이고 속은 스테인레스로 만들어 있었다. 방 회장은 함부르크에 있는 니마이어 선박회사에 찾아가 “배에서 쓸 수 있는 이 보온병이 너희 회사에 적합한 제품이다”고 설명하고, 바이어가 요구하는 대로 제품을 설명하고 테스트도 통과했다고.

“그 제품은 한국에서 11달러에 팔리던 제품이었는데 저는 독일에서 70달러에 팔았습니다. 덕분에 돈을 주최할 수 없을 정도로 벌었고 저는 그 보온병을 만들던 한국회사를 인수해 10여년을 경영했습니다.”


무역으로 돈벌기가 쉬운 일인가. 성공의 일면에는 AS와 덤을 통한 마케팅의 활동이 있었다.

“독일에서 납품제품의 불량률의 보증은 3%가 일반적이었지만, 저는 5%가 넘는 불량률을 보장해 줬습니다. 다른 셀러와 달리 저는 불량과 관계없이 5%를 공제하고 돈을 받았습니다. 또한 저는 물건을 넘길 때 덤으로 서비스로 줬습니다. 이런 거래는 독일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의외로 효과가 높았습니다.” 

방 회장은 독일에서 살아왔던 결혼생활이야기, 자녀교육 등 외국인으로 해외에서 살아갔던 이야기를 중간중간 들려줬다. 동시에 독일에 진출을 원하는 중소기업에 대한 조언과 해외취업에 대한 의견도 언급했다.

약속된 한시간은 빨리 지나갔다. 그는 이날 학생들에게 “청년들은 꿈을 가져라, 남들보다 어려운 길을 택해라, 나는 성공할 수 있다는 스스로의 다짐을 해라”고 수차례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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