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을 쉽고 재미있게 버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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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쉽고 재미있게 버는 방법”
  • 오재범 기자
  • 승인 2011.04.26 18: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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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황중계] 세계한상포럼 4탄 - 상해한국상회 박현순 회장

박현순 상해한국상(인)회 회장(사진)은 “세상에 제일 쉬운 것이 취직이다”라고 생각한다. 요즘같이 취직이 안되는 시절에도 말이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1980년대 초반 그는 충남천안에 새로 생긴 천원공업전문대학(현 호서대학교) 디자인과를 졸업한 뒤, 23살에 군 제대하고 며칠만에 취직을 했다. 그는 당시 무역회사를 가고 싶었다고 한다. 그래서 무작정 그 회사를 찾아가 사장님을 만나 통사정을 했다.

“사회생활을 잘 해보고 싶습니다. 제발 출근하게 해 주세요. 월급도 안받겠습니다. 대신 유리창도 닦고, 청소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제대직후라 머리가 짧던 그는 회사생활을 잘하기 위해 가발까지 쓰는 열정을 보여준 덕분에 취직됐다. 약 5년간 이어진 그의 직장생활은 순탄하기만 했다.

□용기와 배짱 하나로 중국 내수시장의 '별'이 되다.

박 회장은 한국에서 양변기 하나로 성공한 뒤 중국으로 건너가 ‘인터바스(Interbath)’라는 욕실용품 전문브랜드를 중국 내수시장에 고급브랜드로 안착시킨 주인공. 하지만 그는 학창시절에는 공부보다는 운동을 좋아했다. 태권도 3단, 합기도 4단이고, 대학교 때는 그룹사운드 활동도 했다고.

“어렸을 때 가출도 해보고, 퇴학도 당해보고... 저는 힘든게 없는 사람입니다. 왜 힘들어야 합니까. 힘들다고 생각하는 게 없어야 일이 됩니다.”

가발까지 쓰고 다니던 회사를 다니면서 박 회장은 점차 양변기에 인생을 걸겠다고 결심했다. 왜 하필 양변기 였을까.

“아파트가 지어지면서 집안에 화장실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부엌과 거실 바로 옆에 양변기가 놓여진 것이지요. 우리생활 필수품이 된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관심이 적어보였습니다. 아침에 만약 양변기가 고장나면 가족모두 밖에 나와서 볼일을 해결해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일했던 그 무역회사는 직원 30여명이 있는 이태리 타일 수입업체였다. 이탈리아 제품을 수입했고. 디자인을 전공했지만 그곳에서 영업일을 했고, 덕분에 이탈리아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내가 앞으로 뭐하고 살면 좋을까”하고 오랫동안 고민했다고 한다. 그리고 양변기 사업을 하기로 결심하고 나서는 외국에 여행을 많이 다녔다고 한다.

“세상을 배우기 위해 비행기 표 살돈만 생기면 무조건 외국에 나갔습니다. 가서 외국 디자이너 만나고, 전시회 다녔습니다. 돈 아끼려고 잠은 기차에서 자기도 했죠. 정말 자주 나갔죠.”

지금과 달리 당시에는 외국여행 자유화가 되기 전이었다. 대단한 열성이었다.

그는 결국 27살이 되던 1989년 사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운도 따랐다. 그가 사업을 시작하자 당시 일산 중동 등 신도시가 많이 생기면서 수요가 많아졌다. 공급이 수요를 못 따라가자 심지어 양변기, 소변기 도둑이 극성을 부렸다고 한다. 완전한 호황이었다.

“사업 3년만에 자리를 잡자 태국에 공장을 세우고 아웃소싱을 했습니다. 그때부터 양변기에 새로운 디자인을 넣기 시작했지요. 제가 처음으로 12가지 색이 들어간 컬러 양변기를 생산했고요.”

그는 태국공장 제품에 KS인증을 받았다. 그때까지는 외국에 있는 회사에 KS인증을 준 경우가 없었지만, 우리정부에 법적으로 받는 것에는 아무런 하자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1년을 준비해 받았다고 한다.

1994년이 되자 지금까지 사용하던 동원세라믹이라는 브랜드를 발전시키기 위해 새로운 브랜드를 만들었다. 노란색이 눈에 띄는 인터베스(Interbath)의 탄생이었다.

“보여주고 싶은 욕실이라는 모토로 디자인에 신경쓰기 시작했지요.”

이어 그는 13리터가 소모되는 물을 절약할 수 있는 6리터 양변기를 개발했고, 항균 양변기도 만들었다. 덕분에 매스컴에도 많이 타고 여러 가지 상도 많이 받았다. 국내에서는 인지도가 꽤 상승했다.

□앞서가는 생각과 행동이 성공비결

“제 사업은 86년부터 2002년까지 계속 성장했는데. 이제 중국 내수시장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2003년도에 중국에 본격적으로 건너갔습니다. 처음에는 중국 인구가 10억이니까 각 도시에 대리점 하나만 내도 한달에 몇 십억을 쉽게 벌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의 중국사업은 준비기간만 3년이 걸렸다. 공장을 건설하고, 허가를 받고 어떻게 시장진입을 할 것인가 연구하는 시간도 들었다.

“욕실제품을 세트로 판매하는 시스템으로 만들어서 상해 유명 백화점에 문을 두드렸습니다. 동시에 독일에서 온 유명 욕실제품 회사 매장 바로 옆에 우리매장을 뒀습니다. 고가 전략으로 시작한 것이죠. 브랜드 마케팅을 중심으로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중국은 동종업계 공장도 많고 가격경쟁력이 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제품이 자리를 잡고 인기를 끌자 중국 내에서도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도시를 중심으로 매장을 냈다. 구매력이 있는 곳을 공략한 것이다.

“우리회사 연매출은 350억 정도입니다. 하지만 욕실제품 종류가 총 6천800가지가 있으니 재고관리가 매우 힘듭니다. 한국에서 파는 일반적인 양변기 하나 공장도가격이 얼마인지 아십니까. 6만원 정도입니다. 하지만 지금 중국에 파는 양변기는 100만원이 넘는 제품이 있습니다.”

□100만원짜리 양변기 만들어, 욕실학과를 만들고 싶다

“지금은 욕실학과를 하나 만들고 싶습니다. 영국에는 욕실대학이 있지만, 한국에는 없으니 은사인 호서대 학장님에게 부탁한 적이 있습니다. 테마가 있는 화장실. 전 양변기가 가장 고맙고 생활하는데 양변기가 가장 중요하지만, 우리는 그 고마움을 잘 모르고 삽니다.”

그러던 박 회장은 갑자기 돈을 쉽고 재미있게 버는 방법을 알려주겠다고 말을 꺼냈다.

“돈을 쉽고 재미있게 버는 방법은 ‘은행을 털면 됩니다. 하지만, 잡힌다는 리스크가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벌어야 하는가. 여러분 취미 있지요? 취미생활하려고 돈도 쓰지요? 쉽게 말하면 돈버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돈버는 것을 취미로 하면 됩니다.” 학생들의 웃음이 터져나왔다.

“사실 난 학생들에게 공부 좀 많이 하지 말라고 합니다. 돈 젊었을 때 벌어야 하는 건데 석사 등등 하다보면 젊은시간이 다 지나가니까 그렇습니다. 솔직히 전 내 아들에게도 그렇게 말합니다. ‘공부하기 싫으면 여기서 끝내자. 학위 그런 건 나중에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요.”

대신 그는 학생들에게 ‘프로’가 되라고 요구했다.

“앞으로 할 아이템을 선택하십시오. IT가 좋으면 그쪽으로 가는 거고, 뭐든지 하나 잡아서 그 아이템에 프로가 되십시오. 저는 양변기 한 거 절대 후회 안합니다. 애들한테 입버릇처럼 말합니다. ‘나 죽으면 화장하는 대신 양변기 하나랑 같이 묻어줘 그리고 비석에 화장실을 사랑한 남자라고 써달라’고요.”

그는 또다른 비법을 가르쳐 줬다.

“돈을 벌고 싶다면 먼저 상대방을 기쁘게 해줘야 합니다. 난 우리 대한민국사람들이 어느 민족보다 잘하는 것이 그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렇게 항상 베푸는 마음으로 먼저 주면 많이 받습니다. 숫제말로 돈이 등에 쩍쩍 붙습니다.”

“사실 인생의 성공과 실패의 차이는 적습니다. 처음 말한 것처럼 취직하는 것은 쉽습니다. 남들 가고 싶어하는 대기업은 다른사람 가라고 하고 차라리 쓰러져가는 중소기업 사장의 오른팔이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강의시간 1시간이 어느새 지나갔다. 그는 상해한국상회로 교민사회에 봉사를 한다고 했다. 이날 모인 학생들에게 약속을 했다.

“상해에 오시면 꼭 연락하세요. 제가 맛있는거 사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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