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진 모든 것을 저축해라, 기회가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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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진 모든 것을 저축해라, 기회가 올 것이다”
  • 오재범 기자
  • 승인 2011.04.15 16: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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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황중계] 세계한상포럼 3탄 - 캐나다 영리무역 이영현 회장

 

세계한상포럼 3탄 강사로 나선 캐나다 이영현 회장
이영현 캐나다 영리무역 회장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든 사람이다. 또 90년대 일본제품이 휩쓸던 캐나다 시장에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삼성카메라를 안착시킨 사람이다. 왜 삼성카메라를 팔았을까. 그의 답변은 의외로 명쾌했다.

 

“인연이 이어진 것입니다.”

그가 힘들게 시간제 택시기사 아르바이트로 생활하던 토론토 대학 2학년 시절. 시내를 돌다가 서울에서 스웨터 팔러 온 한국 사람을 봤다.

성도 이름도 모르지만 혼자서 큰 여행가방 옮기는 모습이 하도 딱해서 데려다가 밥도 먹이고, 도와준 적이 있다고.

이 회장은 대학졸업 후 캐나다에서 혼자 방문판매를 다니다가 이튼백화점 회장집을 방문했고, 용기에 탄복한 회장 덕분에 나무목각인형 3천개 주문을 받고, 물건을 구하러 서울에 왔다가 우연히 동생이 다니던 서울대학교에서 그 사람을 다시 만났다고.

그 사람이 윤종용 삼성부회장이었다. 당시에는 삼성물산에서 일하고 있었다. 길고 긴 인연의 시작이었다.

“캐나다에서는 80년대 일본제품을 가져다가 팔면 돈을 벌고, 90년대에는 중국제품을 가져다가 팔면 돈이 됐습니다. 하지만 나는 계속 한국제품만 가져다가 팔았습니다. 난 한국사람이니까.”

이회장의 한국제품 사랑은 끝이 없어 보인다. 그에게도 끝없어 보이는 시련의 시절이 있었다.

지난 7일 1시간동안 이어진 전남대 특강에서 1시간동안 40년 인생을 풀어내기는 어렵다고 연신 도래질 치면서도 캐나다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펼쳐졌다.

“제가 여의도에 공항이 있을 때 캐나다에 처음 건너갔습니다. 그 시절에 가지고 갈수 있는 돈이 200달러였습니다. 그것도 모두 1달러로 바꿔서 지폐 일련번호까지 적어야 환전이 됐습니다.”

“그렇게 캐나다 갔는데 공항에서 나한테 ‘영리’라고 부르길래 그때 내 이름이 ‘영리(young Lee. ’이영현‘을 영어로 쓰면 ’영현 리‘가 되는데 미들네임을 보통 부르지 않으니 ’현‘자를 빼고 불렀을 것이다. 꽤 많은 재외동포들의 영어이름이 이런식으로 만들어져 있다.)’라고 알았습니다.”

“나는 그래서 회사 이름도 ‘영리’라고 지었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캐나다에 첫발을 디뎠는데 호텔에서 12달러를 주고 하루밤을 자고나서야, 싼 월세방을 구하러 다녔습니다. 한달에 12달러짜리 햇볕도 들지 않던 지하방을 구하고 음식을 조금 사자 돈이 얼마남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캐나다 온지 5일 만에 한 레스토랑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자리를 구했다. 그 레스토랑 천장에는 화분이 80개 걸려 있었다고.

“그것은 인조화분이었는데 나는 그것이 인조화분인줄도 몰랐다. 사실 ‘인조화분(이 회장은 계속 'artificial flower'라고 말했다)’을 처음 본 것이었다. 그래서 저녁에 모두들 퇴근했을 때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 그 화분 모두에게 물을 줬습니다. 그저 일을 잘하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음날 그 레스토랑은 물난리가 났다. 그날 문을 닫아야 했다. 화가 난 식당 주인은 나에게 바로 ‘유 파이어(you fired)’라고 외쳤고 난 그렇게 쫓겨났다. 그 사건은 당시 토론토 지역일간지까지 실리는 대형사건이었다.

그러더니 며칠 후 그 레스토랑 사장이 나를 다시 불러냈다.

“영리, 그냥 식당 문 앞에서 좀 앉아있어 줄래~”

 

그 레스토랑 사장은 나에게 아무일도 시키지 않고 문앞에 나를 세워놨다. 그러자 식당에 오는 사람들이 나를 보고 웃거나 인사를 많이 했다. 나도 그들에게 답사를 했다. 당시에 왜 그러는지 처음에 몰랐다고. 영어를 잘 모르니까.

 

그는 3일이 지나서야 식당을 찾은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됐다는 사실을 알았다.

“자존심이 상한 난 그 식당을 박차고 나가서 다시는 돌아가지지 않았습니다. 돈은 하나도 못받았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후 돈이 궁했던 그는 캐나다에서 일용직을 얻을 때 학력이 높으면 일을 얻을 수 없었다는 사실을 알고 학력을 ‘무’로 속이고 3개월 동안 더글라스 항공기 회사에 조립라인에 취직했다.

하지만 3개월만에 또다시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고. 옆 라인에 있는 직원에 나에게 스패너를 던져 중상을 입었던 것이다.

“조립라인이기 때문에 옆에서 일을 빨리 잘하면 다음사람도 업무량이 늘어나는 시스템이었습니다. 일을 열심히 하니 주변 직원들의 업무량이 많아져서 생겼던 일이죠.”

이런 일을 두 차례 겪고 나서야 이 회장은 대학에 진학할 생각을 했다. 고등학교 때 아이스하키를 하면서 꿈궜던 것도 캐나다에서 운동을 계속 해나가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고.

바로 한국으로 연락해 교재를 구했고, 6개월 동안 몽땅 다 외운 끝에 토론토 대학 경영학과 합격증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아이스하키도 다시 시작했다.

하지만, 첫 번째 아이스하키 시합에 나갔다가 커다란 캐나다 선수와 부딪쳐 부상을 당했다. 하루를 혼수상태로 지내다가 깨어났다. 부상이 심해 더 이상 운동을 할 수 없었다고.

이후 운동없는 대학생활이 시작됐다. 아르바이트로 택시운전. 학교 수업 따라가는 것이 쉽지 않았다고 한다.

“영어를 못하니 배운 것을 쓰고, 읽고, 단어를 찾고, 그리고 말하고 영어를 잘 못하니까. 다 외워서 간신히 공부를 이어갔습니다. 시험도 모두 달달 외워서 봤고요. 매일매일 힘든 하루였지요. 하지만 과목중 지리학 교수와는 맨날 친하게 지내서 김치도 만들어 주면서 편하게 지냈습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했지요. ‘그 교수랑 친하니까 공부를 안해도 점수를 주겠지’ 하지만 나중에 성적표가 0점이 나왔다. 난 그 교수를 찾아갔다. 화를 내는 나에게 그 분은 나를 달래줬다. ‘쏘리 영리’하며 미안해했습니다. 나는 그 일을 통해 공과사를 배웠습니다.“

이 회장은 이렇게 힘들게 대학공부를 마치고 졸업 후 현지 IBM에 취직했다. 월급도 상당한 곳이지만 3개월 뒤에 해고당했다. 그가 직장상사에게 적응을 못한다는 지적을 받았던 것이다.

“3번이나 해고당했으니, 이제부터 나는 내 살길을 찾으러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내 사업. 방문판매를 시작했습니다.”

돈을 벌려면 부자들에게 팔아야 한다고 생각한 그는 부촌을 돌며 이것저것 팔았다고 한다.

 

이영현 회장은 4월 7일 전남대학교에서 진행된 포럼이 끝난 뒤 학생들의 사인공세를 받았다.
처음 그에게 큰돈을 안겨준 ‘이튼백화점’ 회장에게 주문을 받아 목각인형을 3천개 판 이후 그는 한국에서 모든 것을 가져다가 팔았다고 한다. 요강, 빨래판은 그중 하나였다고. 삼성도 나를 통해 물건을 제공하면서 함께 성장하기 시작했다.

 

“요강을 고급 캔디통으로 팔고, 빨래판을 액자에 넣어 공예품으로 둔갑시킨 것은 내가 물건에 대해 생각을 집중했기 때문이고, 덕분에 보는 관점에 따라 가치가 틀려진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어느날 월마트에서 야구글러브 6천개 오더를 받았다. 한국의 업자를 선택해 주문했더니, 그 업체가 오른쪽 글로브만 보냈다.(글로브는 왼손으로 주로 쓰인다.) 한국에 가서 확인해 봤더니, 그 업체 사장이 남은재고를 다 속여서 보낸 뒤 장갑 만드는 기계를 다른사람에게 팔고 사업체를 정리했던 것이다.

“난 정말 화가 나서 그 친구를 찾아냈습니다. 딱한 사정이 있었더군요. 그래서 저는 그 친구가 판 기계를 산 다른 업체에게 다시 주문 6천개를 내고, 그 딱한 친구를 캐나다로 불러들였습니다.”

그 거래에서 그는 엄청난 손해를 봤다. 하지만 사람을 건졌다고. 이 회장은 속였던 그 친구를 캐나다 이민을 시켜 오랫동안 ‘영리무역’에서 함께 일을 했고 지금처럼 성공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
 
그는 다시 삼성카메라 이야기를 시작했다. 삼성전자의 AS정책이 근간이 실은 이영현 회장에게 나오기 시작했던 스토리가 숨어있었다.

“80년대 당시 삼성카메라를 팔아야 하겠는데, 캐나다 시장은 이미 일본제품이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난 카메라 판매하는 매장앞에서 일주일을 지키면서 소비자들의 반응을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한 손님이 캐논카메라 제품을 들고 화를 내면서 나왔죠. 당장 그를 쫓아가 물었습니다. 왜 그러냐고.”

그는 “캐논카메라를 내일 아들졸업식에 찍어야 하는데, 수리하는데 2주일 걸린다고 해서 화가나서 나왔다”고 답했다. 이 회장은 화난 그에게 삼성카메라 한 대를 손에 쥐어주면서 “이거 그냥 가져다 쓰라”고 말했다고.

그는 삼성카메라가 일본제품과 경쟁할 수 있는 분야는 오직 AS라고 생각하고 불량률이 높은 삼성카메라를 무조건 하루에 고쳐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렇지 않다면 그냥 무상교환을 해주기로 했다.

그가 이 결심을 회사에 통고하자, 부사장이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했다. 납득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난 내가 망하든 시장을 장악하든 모험을 결었습니다. 내가 100% 사오는데 불량률이 30%가 나오는 상황이었습니다. 알면서도 엄청난 적자를 보는 상황에서 이는 어려운 판단이었습니다.”

그의 판매정책이 시행되자 그의 회사는 AS비용 때문에 엄청난 부담에 시달려야 했다고 한다. 거의 죽기살기를 각오하고 진행했다고 했다. 그의 당시 펼쳤던 3가지 정책은 무려 10년 동안 시험대에 올라야 했다.

1. 불량카메라는 하루안에 고쳐준다. 2.본사로 직접오는 손님에게는 30분만에 카메라를 고쳐준다. 만약 못 고치면 새것으로 바꿔준다. 3.성심성의껏 손님들을 대한다.

그의 회사는 1998년이 되자. 시장점유율 9.8%를 기록하며 업계 3위의 회사로 자리매김했다.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비결을 묻는 질문이 많아지자 그는 ‘Dynamic Power of After Service'라는 삼성카메라 구매자 편지를 모은 책자를 발행했다. 삼성카메라를 구입한 사람들의 반응이 적혀있는 책자다.

“내가 정성을 들이면 아무리 어려운 것도 됩니다. 그러면 돈이 나를 쫓게 됩니다. 이렇듯 회사를 세울 때 중요한 것은 70%가 세일입니다. 나머지 관리는 잘 하는 사람을 찾아서 맡기면 됩니다.”

매출 1억달러를 기록한 그이지만 인생철학은 의외로 단순했다.

 

“인생을 복잡하게 살지마세요.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고. 무엇보다 지금 위치는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세이브(저축)하세요. 시간을 저축해라. 저축할지 모르는 사람은 기회를 얻기 어렵습니다.”

 

그는 또 “가장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다.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지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1시간을 조금 넘긴 그의 강연에 청중들의 박수갈채가 여러번 울려퍼졌다. 솔직담백한 이회장의 스토리가 모두의 마음을 울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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