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 높으면, 골도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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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 높으면, 골도 깊다.”
  • 오재범 기자
  • 승인 2011.03.30 14: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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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한상포럼 실황중계 2탄. 대만 황희재 회장

 

“외국에서 크게 성공한 한상은 대부분 크게 좌절을 겪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한국과 달리 기본여건이 어려운 그곳에서 깊은 나락을 벗어날 정도면 대단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황희재 유허국제유한공사 대표(사진)가 한상(韓商)의 기본요건(?)에 대해 반문했다.

대만에서 성공한 한상인 황 대표는 “저는 사업을 하면서 성실과 원만함을 통해 살아왔다”며 “내 능력을 먼저 파악해 내가 오르기 힘든 무모한 산을 오르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지난 23일 후배들에게 조언했다.

 

황 대표는 현재 대만과 한국 양쪽에서 동시에 무역업을 하고 있다. 주 아이템은 섬유, 화학 원자재 등. 이집트에서 제조업을 하는 한상과 직접 거래를 하기도 한다. 평균 연매출은 300억대를 기록하고 있다.

□ 지방대학 설움딛고 시작한 대기업 생활 하지만...

그는 안동대 한문학과를 84년 졸업하고 ROTC장교로 복무 후 86년 제대했다. 하지만, 취업이 쉽지 않았다.

“원서를 넣고넣고 또 넣었더니, 제약회사 영업사원 자리가 됐습니다. 하지만 가슴이 답답했습니다.”

차별에 몸서리 친 그는 전공을 살리고자 대만 유학을 결심했다. 부모님은 그를 말렸다. 장교로 복무할 때 모아둔 돈 외 유학경비를 마련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할 수 없었다. 주변 사람 통해 소개서 한 장 받아 무작정 대만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의 힘든 유학생활이 시작됐다.

“운 좋게도 군대생활 당시에 알던 사람을 찾아 대만주재 한국대사관 내부 밤 경비자리가 하나 비었다는 사실을 알았고 (저를)채용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뒤 2년 동안 야간경비를 하면서 공부를 했습니다.”

그는 대만 동오대학교 중문학연구소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뒤 귀국했다.

“공채로 대우그룹에 들어갔습니다. 그렇지만 지방대 차별이 있었죠. 다시 면접을 보고 럭키에 들어갔지만 마찬가지였습니다. 다시 뛰쳐나와서 고려합섬에서 취직해 사회생활을 3년 했습니다. 이중 2년은 당시 회장님 수행비서를 했습니다.”

여기에서 그는 어른들을 보필하는 방법을 배웠다고 한다. 재미있는 일도 있었다고.

“89년인가. 한중 수교이전에 당시 88올림픽 탁구스타였던 중국의 자오즈민과 안재형 선수가 결혼을 결심하자 물밑작업을 고려합섬에서 했는데, 실무담당자가 저였습니다. 둘 사이에 어떤일이 있었는지 잘 알지요.(웃음)”

하지만, 황 회장은 90년 회사생활을 접고 대만행을 택했다. 왜 그랬을까. 남다른 비밀이 있었다.

“서울 집값이 천정부지로 치솟던 시기였습니다. 또 대만 유학시절 만난 대만사람인 집사람과 결혼해 한국으로 데리고 왔는데 아무런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저에게는 큰 고통이었습니다. 그 와중에 돈을 융통해 서울 일원동에 단칸방을 샀는데 제 월급으로는 갚을 길이 막막했습니다. 결국 대만에 가서 돈을 벌어서 해결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 가가호호 방문판매 시작해, 글로벌기업 바잉에이전트까지

황 대표가 대만에서 맨처음 시작한 사업은 섬유원단 무역이었다. 폴리에스테르로 대표되는 한국섬유 샘플을 대만현지에 직접 가지고 다니면서 ‘가가호호 방문판매’를 했다.

“제가 직접 여행용가방을 하루종일 끌고 다녔습니다. 처음에는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점차 자리를 잡아갔습니다.”

그러던 중 90년 중반부터는 우리나라 섬유산업 경쟁력이 줄어들어 사업이 어려워지자 다른 길을 찾았다.

그는 대만산 원단이 대외적으로 각광을 받은 것에 주목하고 있던차 서울의 한 업체에서 구매를 연결시켜달라는 연락이 왔다. 하지만, 한번 연결시켜준 다음에는 연락이 없었다. 추가계약이 이뤄지지 않은 것이다.

“보지 않으면 멀어진다는 것인지. 만나지 않아서 일이 계속되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저는 기회임을 직감했고, 97년 서울에 사무실을 열고 한국영업을 시작 했습니다. 대만과 한국을 직접 잇게 된 것이지요.”

또 리복, 나이키 등 글로벌기업에서 바잉에이전트로 나설 수 있었고, 호남정유가 생산한 화학원자재를 대만으로 수출하는 길도 찾았다. 그의 성공신화가 쓰여지기 시작한 것이다.

“대만으로 나갔던 우리 제품은 일본, 싱가포르 제품에 밀려 인지도가 없던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대만 내수시장을 두드려 4~50%까지 시장을 장악했지요.”

 

 

□ 선배들의 발자취 본받아 성실과 원만함으로 자리잡아

“먼저 내 능력을 먼저 파악해 내가 오르기 힘든 무모한 산을 오르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저는 30년 동안 한 업종으로 꾸준히 일해왔고 오랫동안 외국생활을 하면서 선배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앞으로 가야할 길을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그는 자신들보다 앞서간 사람들의 발자취에 관심이 많았다. 그 발자국을 따라가면 자연스럽게 위험요소도 줄어들기 때문이라고.

“무역상인 저는 남의 물건 받아서 다른사람에게 파는 것이 업입니다. 이를 위해선 상대방에게 성실함과 믿음을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합니다.”

그는 ‘명품’이야기를 꺼냈다.

“요새 젊은 사람들이 명품을 좋아합니다. 겉으로 큰 차이나지 않지만, 비싼값을 주고 사지요. 그런데 사람도 명품이 있습니다. 내가 나만의 캐릭터를 창조하고, 차별성을 부각시켜서 내 자신을 명품화 시키는 것입니다.”

황 대표는 자신의 성공 원동력을 단순한 곳에서 찾았다. 그가 느끼는 외국생활이 그리 힘들지 않았다는 것. 또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사실 ‘부지런함’ 그리고 ‘긍정적인 마인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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