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에 박힌 선인장 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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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에 박힌 선인장 가시
  • 최미자
  • 승인 2011.03.29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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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최미자 / 방송인, 재미수필가, 샌디에고 거주

최미자/재미수필가
얼마 전, 집 앞 정원에서 일하다가 뜻밖에 발을 잘못 디뎌 넘어졌다. 하필이면 삼십 년쯤 된 선인장 화분 위로 넘어졌다. 아기 머리만 한 여러 개의 선인장에 달린 가시는 내가 입은 코르덴바지를 통해 무릎을 관통했다. 순간 정신을 잃었고 다친 무릎은 마비상태가 돼버린 것 같았다. 곧 아프기 시작했지만 나는 어른이어서 비명도 지를 수가 없었다. 마치 고슴도치처럼 된 내 무릎 좀 보라며 남편을 불렀다. 가장 큰 가시는 작은 바늘 크기였다. 3월5일 토요일 오후였다.

만약 주중에 일어났으면 당연히 병원으로 달려가겠지만, 언젠가 응급실에 갔을 적에 장시간 의사를 기다려야 했기에 차라리 집에서 하나하나 가시를 뽑자고 그이가 말했다.

의사가 되고 싶었다는 남편은 바늘 침과 작은 칼을 가지고 하나하나 정성을 다해 가시를 뽑아냈다. 생살이 찢어지고 피가 나니 그렇게 따가울 수가 없다. 한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가끔 아프다며 나는 소리도 질렀다. 너무 아파서 이틀 걸려 조금씩 오십 개가 넘는 가시를 뽑았다. 그래도 몇 개가 더 남아 있었지만, 무릎 상처가 너무 심해 이 상태에서 그만두기로 했다.

공교롭게도, 3월 11일은 9.0이라는 일본의 대지진과 해일이 발생했다. 수많은 사람이 피해를 당하고 모든 것을 잃어버려 넋이 나간 모습을 텔레비전을 통해 보았다. 세상에 자연의 재해가 이토록 무섭다니…. 그런 희생자들의 아픔을 상상하니 내 무릎 통증 같은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날마다 내 다리도 낫기는커녕 가시의 독이 속으로 퍼지는지 발목까지 아픔이 심해서 일어 설 수가 없을 정도였다. 하는 수 없이 닷새째 되던 날 저녁 병원에 갔다. 가시를 좀 빼달라고 했는데 시간이 가면 가시는 저절로 빠진다며 젊은 여의사는 엑스레이만 찍었다. 목발과 붕대를 받아 가지고 왔다.

주부가 집안에서 할 일이 얼마나 많은가. 먹어야 하니 아픈 다리를 질질 끌며 낮에는 끼니 준비를 했다. 밤이면 너무 아려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 있곤 했다. 늘 종종거리며 집안일 하는 주부인데 좀 쉬라고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지난 겨울과 올봄은 유난히도 비가 많이 내려서 정원의 나무들이 잘 자라는 바람에 땅을 덮어 버렸다. 왼발을 평지에 내려놓는다는 게 그만 골이 움푹 들어간 곳이라 중심을 잃고 넘어지며 오른쪽 다리가 선인장 가시 위를 덮친 것이다.

도대체 내 무릎 속이 어떻게 되어 있기에 이리도 아픈가 싶어 나는 엠 알 아이를 찍어 달라고 의사에게 부탁했다. 정형외과 의사가 담당하는 것이기에 신청 서류를 보내준다는 말만 믿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월요일에 내가 정형외과에 전화하란다. 바보처럼 순순히 따랐으니 어느새 나도 이곳 미국사람이 된 것이다. 문득 나의 미국 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환자가 다쳐서 피를 흘리고 있는데 컴퓨터로 서류를 작성하는 동안에 환자는 더 악화하는 이곳의 병원시스템은 웃긴다는 것이다.

일요일에서야 예약을 신청했다. 가장 빠르다는 화요일. 그것도 간호사가 하는 보조의사다.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서 특수 촬영을 하고 싶어 승낙했다. 나를 보기로 한 여자 선생님은 나타나지 않고 또 다른 사람이 나를 보러 병실에 들어왔다. 다행히 나의 상황이야기를 잘 들었다. 하지만 특수 촬영은 상사가 결정한다며 두 번을 들락거렸지만 거절이었다.

세 번째는 정형외과의사와 함께 나타났다. 백인 의사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명령조로 환자인 나를 다루었다. 짜증이 난 나도 아이처럼 울어버렸다. 곧 다시 흥분을 가라앉히고 의사의 말을 일단 들었다.

무릎에 남은 가시를 빼달라고 말했더니 무릎을 열어서 수술하고 싶냐며 겁주는 소리를 했다. 그러면서 내 다리를 이리저리 만져보더니 괜찮다며 일어나서 걸으란다. 목발도 필요 없단다. 방문을 열더니 저기 복도를 걸으라며 혹독하게 말했다.

나는 조금 걸었지만, 무릎이 아파서 오래 서 있지 못한다며 중지해 버렸다. 내가 약을 안 먹고 스스로 나으려 했기에 그동안 나도 모르게 몸살이 나서 코 밑이 헐어버렸다. 내 코를 보라며 나도 의사에게 소리를 쳤다. 하지만, 집에 와서 생각해보니 입안이 헐 때 쓰는 영어 단어와 혼동을 했다.

엉터리 단어로 말한 것을 생각하며 혼자 피식 웃었다. 영어회화가 잘 안 되는 미국에 살며 이렇게 웃기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그가 종일 피곤해서였을까 아니면 환자인 내가 자기를 귀찮게 한다고 판단했을까. 아무튼, 환자를 대하는 태도가 전혀 안 된 나쁜 의사였다. 아파서 온 사람의 입장을 전혀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특수 촬영을 거부하는 이유를 친절하게 설명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당신은 군대식으로 명령한다며 나도 대꾸해주었다.

그날 밤 집에 돌아와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하다. 동양인에 대한 차별이 아니길 빌지만, 어느 환자도 그렇게 무례한 의사는 만나고 싶지 않을 것이다. 매달 어머 어마한 의료보험료를 내고 있는데 도대체 병원에서 이런 대우를 왜 받아야 하는지.

평소에 무척 건강한 나는 가끔 사고를 쳐서 병원에 간다. 다음날 어제 일어난 불평을 호소하려고 병원 사무실을 찾아갔다. 병원에 갈 때면 지금까지 대부분 의사나 직원들은 최고의 예절로 환자들을 대우했다. 사무실 직원도 상냥했다. 나와 대화를 나눌 젊은 상담직원이 반갑게 방으로 안내했다. 컴퓨터로 모든 절차를 확인하더니 나의 상황이야기를 다 듣고 빠른 속도로 타자를 쳤다.

미국 이웃과 친구들이 나에게 칭찬했던 한국인 정형외과 의사가 생각나서 나도 만나고 싶다고 직원에게 부탁했다. 실력이 좋은 그는 본부 병원이 아닌 변두리 동네에 배정되어 근무하고 있었다. 일주일 후에야 그를 만나게 된다. 아마 그때쯤에는 나의 다리는 모두 나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우리 자랑스러운 한국의사를 격려도 하고 그를 내 정형외과 주치의로 정하기 위해 만나려고 한다. 가시를 빼느라고 찢겼던 수십 개 무릎 상처의 딱지들은 하나둘 날마다 떨어져 나가고 있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의문이다. 수십 개의 가시가 박힌 무릎으로 병원의 응급실을 찾아갔다면 과연 의사가 내 남편처럼 정성껏 내 가시를 일일이 빼주었을까? 아니면 잔인하게 확 찢어서 그 나쁜 의사 말처럼 대수술을 했을까? 한국에 살며 병이 나면 곧바로 환자가 마음대로 병원을 골라 가서 치료를 받던 한국의 병원제도는 얼마나 감사한지. 고국의 삶이 또 그리워진다. 아이고, 서러운 내 팔자야. 해외동포들이 건강 검진을 하러 고국에 들어가는 일은 정말 서로에게 일거양득이다. 대한민국 경제에 도움이요. 나라의 든든한 재산이기도 한 우리, 해외국민들의 건강증진을 위해서도 좋다.

아무튼, 나의 인생살이도 한 걸음씩 조심조심 살아왔지만, 앞으로는 더욱더 발걸음 하나 내디딜 때마다 정신 차려야겠다. 사고는 늘 순식간에 일어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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