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옥박사를 통해 본 대한민국 정체성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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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옥박사를 통해 본 대한민국 정체성 (1)
  • 이영준/베를린
  • 승인 2004.01.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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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옥, 그는 민족을 사랑한 애국자였는가? (1)
-조병옥의 회고록에서-

대한민국의 뿌리 미군정과 한민당(한국민주당)

일본이 독도를, 중국이 고구려 역사를 자기들의 것이라 해도 대한민국 정부는 말이 없다.
친일파 자손은 3대를 이어가며 배불리 살아도 애국독립투사들의 자식들은 4대가 되어도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도 모르는 것이 대한민국 사회의 현실이다. 민족의 자주와 조국의 통일을 외치는 사람들은 국가보안법으로 잡아 죽이고 외세에 아부하는 사람들은 사회전반을 지배하고 호통하는 사회가 오늘의 한국이고 보면 이웃나라가 우리 민족을 우습게 아는 것도 이해할만 하다.

이제 곧 선거철이 온다. 이번에도 많은 국민들이 한나라당, 자민련, 민주당, 우리당을 놓고 누구를 찍을까 하고 골치를 아파해야 할 것이다. 따지고 보면 별로 정책적 차이 나는 당들도 아닌 것을 사람들이 서로 잘났다고 당이란 이름을 붙여 국민을 괴롭히고 있기 때문이다. 뽑아 놓으면 돈 뜯는 재주나 부리고 사회정의 바로잡기라던가 민족의 화해를 위한 장기적 계획 같은 것은 세우지 않고 외세의 눈치보며 국민의 세금 훔쳐 저만 잘 살려는 파렴치한 사람들을 막대한 세금을 써가며 뽑아야 한다니 우스운 일이라기보다 슬픈일이다.이러한 사회현상에 순순히 따라가는 국민들도 어찌 보면 너무나 우리 대한민국 역사를 외면하고 살아가고 있는 듯 싶다.

왜 그럴까?
대한민국은 태어날 때부터 부모가 잘 못된 기형아였다. 그 산파역활을 했던 조병옥박사의 회고록을 통해 간략하게 대한민국이 태어나기까지에 있었던 일들을 살펴보자.

1945년 8월 15일 이후 대한민국 역사를 되돌아 보면 민족적 긍지를 찾아보기 힘든 세월이었다.
오늘의 한국사회 병폐의 근원을 알아보기 위해 당시 미군정과 깊은 관계를 갖고 한국사회를 주름잡아 온 조병옥 경무국장의 회고록을 읽다가 혼자 알고 있기는 너무 아까워 여기 두서없이 간추려 소개해 본다.

1945년 9월 8일: 한국민주당 전신인 국민대회소집준비위원회가 동아일보사에서 [인민공화국 타도]의 성명서 발표한다.

조병옥:“나는 8월 16일부터 한국민주당 창당하는데 참획하였던 것이다.“(…) „한국민주당의 첫 사업은 해방직후 재빠르게 결성한 건국준비위원회와 동년 9월 6일에 좌익분자를 중심으로 조직한 소위 조선인민공화국을 거세하는데 있었던 것이다.“ (조병옥, 나의 회고록, 쪽 144)

„그리하여 한국민주당은 건국준비위원회를 타도하였고 그 다음 소위 조선인민공화국과 인민위원회, 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 등의 좌익집단을 성토하는데 중대한 역활을 하였다.“(…) „그런데 인민위원회의 조직은 지방 방방곡곡으로 뻗히었던 것이다.“ (조병옥 저, 나의 회고록, 쪽 145-146)

그 외에도 당시 조병옥의 활동은 민족세력을 좌익으로 몰아 소탕하는데 바빳으니 그의 회고록 쪽 149에는 미군정의 요인들과 밀접한 관계를 갖으며 일을 추진한 맥락을 자랑삼아 서술하고 있다.
1945년 10월 17일 Hodge의 고문인 Williams 대령이 한민당 사무처(동아일보 사내에 있었음)로 송진우 수석총무를 찾아 밀담을 했으며, 그 내용은 시간을 내어 한민당 수뇌부와 요담할 기회를 갖자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송진우집에서 송진우, 원세훈, 조병옥 그리고 Williams 회담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여러분도 아시다싶이 지금 북한에는 공산군이 점령하고 있읍니다. 그러므로 이에 대비하기 위하여 공산주의이론에 투철하고 반공사상에 철저한 유능하고도 실천력이 강한 한인중의 애국적 인사가 아니면 도저히 이 중책을 감당해 나가기가 어려우니 우리 군정을 협력하고 또 한국을 위한다는 의미에서 그러한 인사를 추천해 달라는 Hodge 중장의 요청이니 여러분께서 심사숙고하여 그와 같은 인사를 추천해 주기 바랍니다.“고 경찰의 총책임 경무국장 자리를 채우기 위해 말했다. (참고: 윗책 쪽 149)
이날 모임에서 송진우는 경찰책임을 조병옥에 맡을 것을 종용하고 조병옥은 „나는 책임감을 가지고 경무국장의 자리를 인수하겠읍니다.“고 이를 수락했다.

그 후 조병옥은 국립경찰병력을 25000명으로 책정, 미군과 같이 사단제로 편성하였으며 각 도청소재지에 경찰청 설치, 각시에 경찰서, 각읍면에 지서 등을 두어 계통적인 뎡찰망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카빙, M1소총, 등의 경무장과 중화기 등으로 무장 „수시로 각지에서 일어나는 공산당의 폭동에 대비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전국의 최요지점에는 기동경찰대를 배치하여 일조유사시에는 즉각적으로 출동할 수 있는 만반태세를 갗추었던 것이다.“ (참고: 윗 책, 쪽 152-153)
당시 경무국장 조병옥은 경찰학교에서 친미와 친일교육을 강좌하였으며 인민위원회와 인민공화국 타도에 전념하여 결국 Hodge로 하여금 45년 12월 12일에 이 단체들을 불법화 시키는데 이르렀다. 그런 반면 미군정이 우익청년단체를 해체하려는 계획에 반대하여 이를 적극 보호하고 나섰으며 이들을 경찰보조대로 사용하였다. „만약 그 당시 서북청년회를 해체하였드라면 [민애청]의 지하조직은 더 활발히 전개되었을 것이며 각지에서 공산당의 지령하에 의하여 산발적으로 일어나는 폭동을 국립경찰만으로는 도저히 진압할 수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외에도 조병옥은 [전평]해체에 주도적 역활을 하였으며 미군정 앞잡이 노동단체인 대한노총을 결성케 하였다. (참고: 윗 책 쪽 154-156)

부기: 조병옥박사의 „나의회고록“은 대한민국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뿐 아니라 일반 국민들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이다.

(계속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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