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외공관 `세금 도둑질` 동포사회에 큰 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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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외공관 `세금 도둑질` 동포사회에 큰 파문
  • 코리아미디어
  • 승인 2004.01.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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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영사관 등 대한민국 해외공관의 도덕성이 비판의 도마에 올랐다. 외교통상부의 한 직원이 내부통신망에 재외공관의 부패상을 폭로한 글을 올린 것을 계기로 공관장들의 도덕적 해이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높아진 것이다.
지난 연말 외부에 알려진 이 글은 재외공관의 경비유용 실태를 적나라하게 열거해 본국 뿐 아니라 교민사회에까지 큰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이번에 드러난 비위 사례는 사적인 모임에 공금 법인카드 사용하기, 출장기간 늘리기와 출장자 허위계상 차액 챙기기, 공관 만찬시 참석자 부풀려 운영비 챙기기 등 국가를 대표하는 외교관의 행태라고는 차마 생각하기 어려운 ‘낯뜨거운’ 일들이다. 특히 심각한 것은 이런 비리가 그동안 공공연한 관행으로 묵인돼 왔다는 점이다.
외교부는 직원의 ‘자조적 고백’이 공개된 뒤 처음에는 “내용이 구체적이지 않고 과거의 잘못된 관행을 지적한 것에 불과하다”며 얼버무리려 했다. 그러다 비판여론이 거세지자 대국민 사과와 함께 자체 감사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태스크 포스를 구성해 재외공관의 운영실태를 재점검하고 회계감사 시스템을 강화하겠다는 대책도 내놓았다.
외교부의 개혁의지가 과연 많은 재외국민과 여행자들의 지탄을 받아온 재외공관을 거듭나게 할 지는 두고 볼 일이다.
‘밥장사’란 천박한 은어로 상징되는 공관장의 공금 착복은 사실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외교가 안팎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광범위한 ‘관행’이다. 특히 민원업무 중심이고 대사관에 비해 본국의 관심도가 낮은 총영사관이 비리의 뿌리가 더 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토론토 총영사관에 근무했던 김모 영사는 “98년~2000년 공관 근무할 때 총영사의 ‘밥장사’가 너무 노골적이어서 직원들의 빈축을 사곤 했다”고 털어놨다.
박모 총영사는 당시 한인단체 관계자나 직원들을 관저로 불러 가정부가 준비한 간단한 식사를 한 뒤 1인당 50~1백 달러짜리 만찬으로 둔갑시키는 등의 방법으로 공금을 착복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식의 ‘밥장사’는 연말에 집중적으로 이뤄지는 것이 보통이다. 해가 바뀌기 전에 외교활동비 등의 경비를 한꺼번에 챙기기 위한 것이다. 밴쿠버 총영사관을 비롯한 각 공관에서 연말에 공관장 주최 만찬이 잦았던 것도 우연이 아닐 수 있다.
이처럼 명백한 ‘세금 도둑질’이 그저 관행으로 여겨져 온 것은 재외공관에 감독과 감시의 손길이 미치지 못한 탓이 크다.
감사원 감사와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의 국정감사가 있지만 국외에 주재하는 여건상 겉핧기에 그치고 있다. 규모가 작고 민감한 사안이 별로 없는 밴쿠버 총영사관 같은 곳은 사실상 감시가 전무한 실정이다.
총영사와 관련해 잡음이 끊이지 않는 또 하나의 사안이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평통) 해외 자문위원 위촉이다. 2년마다 있는 자문위원 선정을 둘러싸고 뒷돈거래 등의 의혹이 제기돼곤 했으나 제대로 밝혀진 적은 없다. 때문에 재외국민들 사이에선 평통 해체론이 여론의 대세를 이루고 있다.
총영사관에서 비자금을 조성해 본부 영사국에 떡값조로 보내거나 회식비 등으로 사용하는 관행도 있다. 액수의 2%에 해당하는 돈을 주고 가짜 영수증을 사들여 지출을 부풀리는 방식으로 8백여만원을 빼낸 총영사와 직원들이 경고조치를 받은 바 있다.
재외공관 운영의 난맥상에는 외교부의 배타적인 엘리트주의가 한 몫을 하고 있는 것으로 지적된다. 외교관들이 자신들의 울타리를 쳐놓고 어지간한 잘못은 서로 눈감아주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온정주의가 똬리를 틀고 있다는 것이다.
재외공관 비리가 공개되자 외교부 일각에서 “뭐 그런 것까지…”하는 반응을 보인 것은 이들의 도덕 불감증을 여실히 보여준다.
총영사관에 근무했던 교민 곽모씨는 “본국에선 신사로 소문난 외교관이 공관장으로 나오기만 하면 욕심사나운 독재자로 군림하기 일쑤”라며 “영사관이 교민 서비스는 뒷전이고 본국에서 오는 손님 접대에만 매달려 있다는 교민들의 비난은 마땅한 것”이라고 말했다.
공직윤리 실종은 한발 더 나가 본격적인 수뢰로까지 발전됐다. 재외공관 문제가 불거진 바로 그날 뇌물을 받고 ‘비자장사’를 해온 영사가 적발된 것이다. 홍콩 총영사관에 근무하면서 브로커를 통해 조선족 부적격자 265명에게 비자를 내주고 176만4천 홍콩달러 (한화 약 2억7천만원) 를 받아 챙긴 이정재 (52) 영사가 검찰에 구속됐다.
외교부는 지난해 11월 중국 베이징과 선양 주재 영사 2명이 비슷한 혐의로 구속됐을 때 이들이 법무부 소속이라고 애써 발뺌했으나 이제는 할 말이 없게 됐다.
이런 와중에 지난해 처음 실시한 초임 공관장 적격심사에서 영어시험에 탈락한 외교관이 28명 가운데 6명에 이르는 것으로 밝혀져 공관장의 자질론까지 불거졌다.
한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이번에 문제를 촉발한 글이 외교부 조직혁신을 위한 내부 의견수렴 과정에서 나왔다는 점이다. 이 글을 언론에 유출한 직원은 “치부가 바깥에 알려지는 것이 부끄럽긴 하지만 이번에 자기혁신을 하지 못하면 외교부는 영원히 국민으로부터 버림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더 컸다”고 말했다.
윤영관 장관 등 외교부 수뇌부의 조직혁신 의지는 확고하지만 자체 개혁에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감사원과 총리실, 청와대 등 외부의 개입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이와 관련해 감사원은 1월 말 미국 등 10여개 재외공관에 대해 각종 경비 집행, 회계 처리, 외교관의 품위손상 행위 등에 대해 특별감사를 벌일 것으로 알려졌다.
재외공관 비리는 최근 한국사회를 뒤흔들고 있는 차떼기 수법의 수백억원 정치자금에 비하면 사소한 일로 비춰질 수 있다. 이권사업과 관련이 없는 외교부가 이럴 정도면 다른 권력기관의 부정부패는 얼마나 더 심할 것이냐는 자조섞인 이야기도 나돈다.
그러나 문제는 돈의 과다로 비교할 성질이 아니라는 지적이 더 설득력있게 들린다. 공금을 빼돌리는 잘못된 행태가 죄의식없이 되풀이돼 왔으며 이를 통제할 내부 감시장치가 작동되지 않았다는 것은 한국을 대표하는 재외공관의 기강 해이가 심각한 수준임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오룡 기자
roh@coreamedi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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