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임금 문무왕의 숨결, 동해에 잦아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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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임금 문무왕의 숨결, 동해에 잦아들다
  • 유정서
  • 승인 2011.01.19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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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길 따라 한국사 : 우리 역사의 현장을 가다] 1 - 경주 동해구 유적

219호부터 우리 역사의 중요한 현장을 탐방하는 형식의 역사기행 ‘발길 따라 한국사 : 우리 역사의 현장을 가다’란 제목의 시리즈를 매월 1회 연재한다. 이 시리즈가 동포들이 신문지상으로나마 우리 역사의 현장을 보고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되고, 또 재외동포 2세교육을 위한 역사 자료로 활용되길 바란다. <편집자주>

신라 왕실 으뜸의 성역, 동해구

“경주에 가거들랑 모름지기 문무왕의 유적을 찾으라-”

일제강점기의 암흑시기에 우리나라 미술사 연구의 첫 장을 연 선구적인 미술사학자 우현(又玄) 고유섭(高裕燮)은 1940년 경 어떤 잡지에 쓴 글에서 독자들을 향해 이렇게 일갈한 바 있다.

그가 이렇듯 간곡하게 찾아가 볼 것을 권유한 ‘문무왕의 유적’은 구체적으로 말하면 감포 앞바다에 떠 있는 문무왕의 해중릉, 곧 ‘대왕암’을 말한다.

그가 석굴암이나 불국사 같은 유명한 유적들을 다 젖혀두고 먼저 대왕암을 찾으라고 강권한 것은 무슨 까닭일까.

아마도 그 하나는 일제하의 암흑 속에서 단재 신채호나 백암 박은식 같은 민족사학자들이 광개토왕이나 대조영 같은 고대 정복군주의 기상을 부르짖은 것처럼 그 역시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의 강건한 정신을 나라 사람들이 본받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문무왕의 유적이야말로 찬란했던 신라문화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열쇠라는, 학자로서의 견해를 밝힌 것이었을 터이다. 어떤 뜻에서였건 이 뛰어난 선각자의 권유는 오늘날에도 충분히 귀담아 들을 만한 가치가 있다.

옛 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는 문무왕 해중릉이 있는 감포 앞바다 일대를 ‘동해구(東海口)’라는 다분히 상징적인 이름으로 적고 있다. 문자 그대로 ‘동해의 입’이라는 뜻이다.

이견대 언덕에 있는 동해구 표지석.

이를테면 경주의 제일가는 진산(鎭山)인 토함산에서 흘러나온 물이 큰 내를 이루어 동해로 흘러들어가는 ‘입구’라는 말이다.

이곳은 무엇보다도 신라의 왕실과 깊은 관련이 있는 지역이다. 대왕암의 주인공 문무왕을 비롯, 효성왕, 선덕왕 등 통일왕국 임금들의 시신이 불교식으로 화장되어 뿌려진 신라 왕실의 공동 묘역이자 으뜸가는 성역이었던 것이다.

대왕암이 내려다보이는 이견대(利見臺) 근처의 바닷가 언덕에는 이곳이 바로 옛 기록에 나오는 ‘동해구’ 임을 알리는 표지석과 동해구를 노래한 우현 고유섭의 시비가 함께 서 있다. ‘동해구의 유적’이란 바로 이 성역을 중심으로 조성된 몇몇 중요한 유적을 일컫는다.

삼국통일의 영주, 문무왕의 숨결 서린 흔적들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룬 문무왕은, 그러나 통일이 된 후에도 적지 않은 근심거리를 떠안고 있었다. 바로 시도 때도 없이 동해 바닷가에 상륙해 노략질을 일삼고 수도 경주까지 위협하는 ‘왜구’의 침입이었다.

왜구를 완전히 진압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게 된 문무왕은 죽은 후에라도 왜구를 진압하겠다고(欲鎭倭兵) 서원하고 자신이 죽으면 불교식으로 화장을 해 동해상의 큰 바위, 즉 지금의 대왕암에 장사를 지내라는 유언을 남기게 된다.

그리고 동해를 그윽하게 굽어보는 용당리 언덕에 그 비원을 이루기 위한 원찰을 세우는 공사에 착수하게 된다. 그러나 그 원찰이 다 완성되기도 전에 대왕은 세상을 떠나게 된다.

대왕이 승하하자 아들 신문왕은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불교식으로 화장을 해서 그 유골을 대왕암에 장사지내고 미처 다 짓지 못한 원찰(願刹)을 완성, 절의 이름을 ‘감은사(感恩寺)’라고 명명한다. 그리고 대왕암이 가장 잘 내려다보이는 바닷가 언덕 위에 터를 고르고 대를 쌓아 이견대라고 이름 한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대왕암’, ‘이견대’, ‘감은사’의 세 곳이 바로 ‘동해구’를 대표하는 문무왕의 유적이다. 이들 유적은 모두 자신의 나라 신라가 영원히 강대한 나라로 남기를 바랐던 위대한 군주의 비원이 서린 뜻 깊은 흔적으로 훗날 선각자 고유섭이 ‘먼저 찾으라’고 간곡하게 권유한 바로 그 유적이기도 하다.

해중릉과 호국의 원찰 감은사의 위용

대왕암이란 실은 감포 봉길리 해변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바다 속에 산뜻하게 솟아올라 있는 자연 암석에 불과하다. 동해의 어느 곳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이 바위가 중요한 유적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게 된 것은 전적으로 문무왕의 시신을 이곳에 장사지냈다는 옛 기록 때문이다.

감포 봉길리 해변에서 바라본 대왕암의 모습.

바위 가운데 뚜렷한 인공의 흔적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근거로 문무왕의 신골(身骨)이 불교식 장법으로 안치되었다는 설과, 그저 바위 언저리에 뼛가루를 뿌린 정도였을 것이라는 설이 팽팽하게 대립되어왔다.

그러나 어떤 방법으로 장사를 지냈든 이 바위가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문무왕의 넋이 잠든 의미 있는 흔적이라는 사실만큼은 틀림이 없다.

한편 이 바다가 아련히 바라보이는 양북면 용당리 야산 자락에는 ‘욕진왜병’이라는 대왕의 집요한 염원에 의해 건립된 원찰 감은사의 옛터가 있다.

감은사터의 유구.

현재 이 절은 동서로 마주보고 있는 우람한 3층 탑 2기만 남고 나머지 전각은 모두 없어진 허허로운 절터로만 남아있다. 주춧돌만 남아있는 건물지 등으로 유추해 볼 때 감은사는 남쪽에서 북쪽을 향해 ‘두개의 탑→법당→강당’이 일렬로 늘어서 있는 이른바 ‘2탑 1금당’식 가람배치 양식을 취하고 있다.

법당 앞에 2기의 탑을 마주보게 세우는 이 새로운 방식은 감은사에서 처음 시도되어 후에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가람배치 방식으로 자리 잡게 되는 새로운 양식이었다.

절터에 남아있는 2기의 우람한 탑도 우리 고미술사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유적이다. 신라의 불탑은 중국의 벽돌탑을 석재로 모방한 이른바 ‘모전석탑’에서 출발, 통일 이후 목탑을 본 뜬 백제 석탑의 양식을 절충해 신라만의 고유한 형식으로 완성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대왕암의 원찰로 지어진 감은사터에 남은 웅장한 규모의 쌍탑.

감은사 터에 남아있는 이 탑들이 바로 신라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주고 있는 최초의 탑이다. 이 탑에서 볼 수 있는 2층의 높직한 기단과 3층의 탑신, 그리고 날렵한 반전을 보여주고 있는 지붕돌과 5개의 층급으로 이루어진 계단 형태의 지붕받침 등은 신라 석탑의 가장 뚜렷한 특징으로 꼽히는 요소들이다.

이런 점에서 감은사지탑은 신라의 석탑, 나아가 한국 석탑의 진정한 출발점에 서 있는 기념비적인 유적인 것이다.

용이 된 문무왕을 만난 자리, 이견대

한편, 호국(護國)의 대룡(大龍)이 되어 더러 이 감은사에 들어와 노닐고자 했던 문무왕은 과연 소원대로 용이 되었을까?

초자연적이고 신비한 현상까지 역사적 사실처럼 기록한 <삼국유사>는 당연히 그러했다고 적고 있을 뿐더러 ‘용을 목격한 장소’까지 밝히고 있다. 대왕암이 선명하게 내려다보이는 감포 바다 동쪽 언덕 위에 서 있는 이견대가 바로 그곳이다.

대왕암의 망배처로 추정되는 이견대.

이견대는 그 유명한 신비한 피리 ‘만파식적(萬波息笛)’ 전설의 무대로 널리 알려진 바로 그곳이다.

<삼국유사> 만파식적조는 아들 신문왕이 신하들과 함께 용이 된 문무왕을 맞이하기 위해 이곳에 나왔다가 검은 용으로부터 신비한 대나무를 받아 만파식적을 만들었다고 적고 있다.

이러한 기록에서 보듯 이견대는 문무왕의 신골을 대왕암에 안치하고 나서 대왕암이 가장 잘 내려다보이는 바다 기슭에 건립한 일종의 망배처(望拜處)인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이견대 건물은 지난 1970년, 동해구 일대 발굴조사 당시 건물의 흔적을 찾아 정자 형태의 건물로 새롭게 추정 복원한 것이다.

이처럼 대왕암-이견대-감은사지로 이어지는 동해구의 유적은 통일의 영주 문무왕의 비원이 서린 유적이자 찬란한 신라 불교문화의 성격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유적이라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를테면 삼국통일의 과업을 이루고 나서도 계속해서 남의 나라의 침략을 받지 않는 강력한 나라로 남기를 염원했던 문무왕의 위대한 의지와 종교의 힘까지 빌어 그 뜻을 길이 기리고자 했던 신라 왕실의 정성이야말로 천년을 이어온 신라 사직의 가장 큰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일제 침략기의 암담한 시절에 우리 고미술사 연구에 일생을 바쳤던 선각자 우현 고유섭이 ‘경주에 가면 우선 문무왕의 유적을 찾으라’고 간곡히 말했던 것은 결코 사사로운 권유가 아니다. 실로 가슴 뭉클한 절규인 것이다.

대왕암이 바라보이는 감포 바다, 그가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라고 술회한 그 넓은 바닷가에 서면 그런 느낌이 더하다.

글/유정서, 사진/이주용

유정서

필자 유정서는 동국대학교 역사교육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 문화예술대학원에서 문화재를 전공했다. 일찍이 잡지에 입문, 기자 및 편집장으로 활동하며 우리 역사와 문화재에 대한 많은 글을 써왔다. 지은 책으로 <대한민국기독문화유산답사기>, <고려의 역사> <옛날 임금은 어떤 집에서 살았을까?> <검정고무신과 함께하는 우리문화유산답사-궁궐편, 사찰편> 등이 있다.




이주용

사진작가 이주용은 신구대학사진과와 광주대학교디자인과를 졸업했으며 월간<마당>을 비롯한 여러잡지의 사진기자로 일했다. 우리나라의 문화유산과 인물사진을 많이 찍으며 <예술가의 일상>이라는 제목으로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현재 두울스튜디오를 운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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