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피할 수 없으면 도전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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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피할 수 없으면 도전해야죠”
  • 이현아 기자
  • 승인 2011.01.19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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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러운성균인’ 이오영 전 미주총연 회장
“그때는 학업을 포기하게 될까봐 많이 좌절했었죠.”

이오영 전 미주한인회총연합회 회장(사진)이 대학시절의 기억을 되살리는 데 걸린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성균관대학교 법학대학 61학번인 이오영 전 회장이 성균관대학교총동창회 선정 ‘2011 자랑스러운 성균인’ 해외부문 수상을 위해 방한했다.

이 전 회장을 시상식이 있던 18일 오후 서울 장충동에서 만났다. ROTC(학군단)로 대학생활의 거의 대부분을 보냈던 이 전 회장에게는 여전히 장교출신의 반듯한 태가 남아 있다.

“2학년으로 진학할 때 결핵을 알았어요. 형편이 가난했던지라 휴학하면 더 이상 학업을 이어갈 수 없을 것 같았죠.”

그는 ROTC의 훈련과 군인정신으로 병마를 극복했다.

“첫해 여름 한 달간 진행되는 ROTC 야영이 고비였어요. 주치의는 병이 옮지는 않겠지만 체력을 아껴야 하니 야영은 좋지 않다고 충고했죠”

그 같은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 전 회장은 자신을 실험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한 달의 무지막지한 훈련 동안 그가 의지할 것이라고는 약 뿐이었다. 당시 그의 병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몰래 약을 먹는 일이 고역이었어요. 약봉지를 뜯고 있으면 어디선가 동기들이 나타나 무슨 약을 먹느냐고 물어요. 어물어물 영양제다 대답하면 그런 걸 왜 혼자 먹냐, 같이 먹어야지 하는 타박이 돌아왔죠.”

당시의 에피소드를 소개하며 이 전 회장은 호탕하게 웃는다. 이제는 모두 지나간 과거의 추억이다. 혹독했던 군 생활로 그는 ‘피할 수 없으면 도전하라’는 좌우명을 얻었다. 대학 졸업 후 그는 월남전에 참전할 정도로 체력이 회복됐다. 1973년까지 군 생활을 했던 그는 대위 전역 2달 후 미국으로 떠났다.

그는 “처음 미국에 갔을 때는 몹시 괴로웠다”며 “군인 생활에 완전히 젖어 있었던데다가, 법대를 나온 것이 초기 미국 이민자에게 무슨 도움이 됐겠느냐”고 덧붙인다. 하지만 그는 결핵을 이겨낼 때처럼 또 다시 도전했다. 생산직 기술자부터 차근차근 밟아 올라가길 마다하지 않았다.

이 전 회장의 성실한 이민생활은 현지에도 정평이 나 2009년 5월에는 ‘앨리스아일랜드 상’ 수상의 영예를 안기도 했다. 힘든 이민생활을 극복하고 훌륭하게 성공한 이들에게 주는 상으로 대통령, 대법원장, 노벨상 수상자들이 받던 상인만큼 그 권위를 짐작할 만하다.

이 전 회장은 이 같은 명예들이 “소속한 사회에 헌신해야 한다”는 단순한 신념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성균관대학교 북미주연합동문회 고문을 맡고 있는 그는 회장을 맡았던 시절 장학재단을 설립해 후배 양성의 기틀을 마련한 바 있다. 이 같은 활동들은 소속사회에 헌신해야 한다는 그의 신념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연락 끊어진 친구들 찾고파

“현지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 모교에 대한 애착과 자부심을 인정해주신 것 같다”고 ‘자랑스러운성균인’에 선정된 의미를 설명한 이오영 전 미주총연 회장은 대학시절 함께 했던 친구들과의 기억을 소개했다.

“ROTC 생활을 함께 한 정성렬, 학생운동을 같이 한 조철영, 노래를 잘 했던 엄형탁 같은 친구들이 많이 기억나요. 법대 앞 은행나무 아래 누워서 엄형탁이 부르는 노래를 듣곤 했어요. 노래를 얼마나 잘 했는지, 지나가던 사람들이 넋을 잃고 들었죠.”

부조리한 현실을 바꾸겠다며 학생운동에 매달렸고, 학교 담을 넘어 창경궁에 숨어 들어가다 바지가 찢어지는 수모를 함께 겪기도 했던 친구들. 하지만 이제는 연락이 닿지 않는다고.

“제가 너무 급하게 미국에 간 탓이죠. 외국생활을 오래 하다보니 그 친구들과도 연락이 끊어져 버렸어요.”

시종일관 유쾌하고 흥미진진하게 과거의 이야기를 하던 그였다. 하지만 친구들을 추억하는 때에 이르러서는 아련한 안타까움도 묻어난다.

비록 모든 것이 대학시절의 모습 그대로 유지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추억들은 이 전 회장이 미국생활을 해 나가는 원동력이 됐다.

“힘들게 시작한 미국생활이지만 어느새 아이들이 다 자랐어요. 첫째는 치과의사가 됐고, 둘째는 법률사무소에 근무하고 있죠.”

기사를 통해 소식이 끊어진 친구들과도 인연이 닿았으면 좋겠다고 희망한 그는 다음 일정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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