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바망간기념관 탐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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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바망간기념관 탐방기
  • 강성봉 기자
  • 승인 2010.12.08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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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무덤 대신이다. 조선의 역사를 남기는 것”
교토시내에서 국도 162호선을 따라 북으로 약 1시간 거리. 주변은 산으로 둘러싸여 맑은 물줄기를 따라 기타야마 삼나무 숲이 우거진 고요한 산골.

지난달 27일 제7회 재외동포NGO대회 참가자들이 버스를 타고 찾은 단바망간기념관의 자연경관은 아름다웠다.

수많은 조선인이 가혹한 노동을 강요당하고, 진폐증으로 고통 받다 죽어간 현장이라는 선입견과는 너무도 대조적인 주변 경관이다. 차가 도착하자 기념관의 이용식 관장이 사무실로 안내해 기념관을 만들게 된 배경 설명을 했다.

이용식 관장.

단바망간기념관은 일본 교토 북쪽 게이호쿠(京北, 게이호쿠지역의 옛이름이 단바)에 있는 신오타니광산과 유미야마광산에 만들어졌다. 일본의 3대 망간 광산 지역은 도호쿠의 하치노헤, 시고쿠의 우와지마, 단바인데 이중 단바가 최대 산출지였다고 한다. 단바에는 과거 300개 이상의 망간광산이 있었다. 신오타니광산은 1983년까지 채굴작업이 이뤄진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망간광산이다.

△진폐증으로 숨진 이정호씨와 두 아들이 만든 피와 땀의 발자취

“83년 어느 날 진폐증을 앓고 있던 아버지가 저를 부르더니 ‘박물관을 만들자’는 거여요. 그래서 ‘그게 돈이 되겠습니까? 아니 돈은 안 되더라도 유지비는 나오겠습니까’ 물었죠. 아버지 대답이 ‘아마도 돈은 안 될 것’이라는 거여요. ‘그럼 왜 만듭니까’ 다시 물었죠. 그러자 아버지가 ‘내 무덤 대신이다. 조선인의 역사를 남기는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정상인의 폐. 진폐증에 걸린 사람의 폐.

이용식 관장의 세 형제 중 두명이 이런 방식으로 아버지에게 설득을 당했다. 망간 광맥이라도 뚫을 듯한 강한 의지를 가진 아버지 이정호씨와 그의 두 아들이 드디어 뜨겁고 뜨거운 가슴으로 두껍고도 두터운 차별의 암반을 깨부수어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정호씨가 ‘박물관을 만들자’ 제안한 지 6년 뒤인 1989년 5월, ‘단바망간기념관’이 마침내 문을 열었다.

“기념관을 개관하는데 2억엔이 들었고, 20년간 운영하는데 1억엔이 들었습니다. 2009년 폐관 될 때까지 일본 정부의 운영비 보조금은 단 돈 1엔도 없었습니다.”


이 관장은 기념관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을 마치고, 사람들을 사무실 옆에 있는 함바로 이끌었다. 함바는 광산 노동자의 증언을 토대로 재현한 것이었는데 노동자들에게 밥을 해 주던 조리기구와 노동자들이 합숙하던 다다미방이 꾸며져 있었다.


“광산에선 6조 다다미에 20명이 생활했다고 합니다. 먹는 것은 보리, 고등어 고사리였는데 일할 때는 밥을 다섯 그릇을 먹어야 했고, 하루에 땀을 3리터를 흘렸답니다.”

다다미는 2조가 약 3.3제곱미터, 한 평에 해당한다. 세 평짜리 다다미에서 20명이 생활했다는 말이다.
함바에 대한 설명에 이어 이 관장은 사람들을 광산으로 안내했다.

탐방객들은 사진이 가장 그럴싸하게 나온다는 광산 입구에서 기념촬영을 한 후 이 관장의 안내를 받아 광산 내부 견학을 위해 갱도 안으로 들어갔다.

광산 입구.

“이 체험장을 만들기 위해 ‘하루에 10Cm밖에 파지 못한 적도 있습니다. 낙반 사고 때문에 하루 종일 갇힌 적도 있었구요.”

일순간 이 관장의 얼굴에 체험장을 만들던 때의 고통이 기억난 듯 그늘이 드리워졌다.

갱도 곳곳에는 망간광석을 캐는 모습을 재현한 마네킹, 캔 광석을 운반하는 손으로 미는 목마, 약 3톤의 암반을 지탱하는 버팀목 등등이 설치 돼 있었다.


견학을 위해 만들어진 갱도는 이층으로 돼 있었는데 먼저 위층을 본 후 이 관장은 사람들을 땅속 깊숙이 아래층으로 이끌고 들어갔다.

언제까지 내려가야 하나 사람들의 표정에 두려움이 어릴 즈음 갱도에 밝은 햇살이 비쳤다. 출구가 나온 것이다.

“여러분들은 연장 총길이 3Km인 신오타니 광산의 갱도 중 단지 300m를 관람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광산체험장의 출구는 기념관의 자료실로 바로 연결돼 있었다.

기념관 자료실.
기념관 자료실.

자료실에는 광산노동자로 강제연행된 조선인들과 조선인 징용자들이 오기 전에 광산에서 일했던 일본 부라쿠민(部落民)들과 관련된 자료가 수집돼 있다. 이용식 관장과 그의 아버지 이정호씨가 직접 만나 인터뷰한 기록도 있었다. 일본의 피차별 천민집단인 부리쿠민은 아직도 일반인들과 격리돼 생활한다.

△“일본이 가해역사 인식 하는 순간 재일조선인 차별 사라질 것”

“일본 사람들은 일본의 가해역사에 대해 이야기 하면 몹시 싫어합니다. ‘일본을 위해서’라고 얘기하면 ‘그게 왜 일본을 위한 것이냐’ 되묻습니다. 그러면 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역사인식을 하나로 하는 것, 그것이 아시아와 일본의 화해를 가장 빠르게 하는 길이다.’ 일본이 가해자라는 역사인식을 하는 순간, 재일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가해는 사라지게 됩니다. 제가 일본의 가해역사기념관인 단바망간기념관을 재건하고자 하는 이유입니다.”

설명하는 이용식 관장.

이용식 관장의 호소가 기념관을 뒤로 하고 교토 시내로 향하는 제7회 재외동포NGO대회 참가자들의 귓전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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