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학도의용군을 기억하다
상태바
재일학도의용군을 기억하다
  • 이현아 기자
  • 승인 2010.09.29 13:3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국전 발발하자 한달음에 달려온 애국청년들
1950년 6월 25일 한반도 전역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었다. 수없이 많은 청년들이 조국을 위해 전장에서 스러져갔다. 이들 가운데 직장과 학업을 모두 중단한 채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했던 재일동포 청년들을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

29일 오전 인천 수봉공원 참전기념탑에서는 제 60주년 재일학도의용군 6․25 참전기념식이 엄숙하게 거행됐다. 장대섭 국가보훈처 보훈심사위원장, 정진 재일본대한민국민단장 등 주요인사들을 비롯해 윌리엄스 로버트 J(Williams, Robert J) 미8군 부사령관 등 400여명의 참전용사들이 자리를 함께 했다.

매년 참전기념식을 주관해 온 재일학도의용군동지회가 올해도 어김없이 행사를 맡았다.

재일학도의용군동지회는 1973년 국립묘지에 ‘재일학도의용군위령비’를 건립한 데 이어 1979년에는 인천 수봉공원에 ‘재일학도의용군참전기념탑’을 세우는 등 재일동포 애국청년들을 기리기 위해 힘써 왔다.

우리 정부 역시 1967년 참전자 317명에 방위포장을 수여하고, 1997년 소재불명으로 서훈을 받지 못했던 45명에게도 추가 포상을 시행했다. 1968년에는 이들에 대한 국가유공자 지정도 이뤄졌다.

참혹한 전쟁의 고통에 신음하고 있는 조국으로 한걸음에 달려 왔던 재일동포 청년들의 의기는 1967년 제 3차 중동전쟁 당시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던 이스라엘 국민들이 자진 입대에 나서며 보여줬던 애국심과 비견될만 하다.

재일학도의용군동지회는 “(재일동포 청년들의 한국전 참전은) 이스라엘 국민이 아랍연합군에 맞서 자진입대했던 시기보다 무려 17년이나 앞선 일”이라며 “이는 전세계적으로 애국심의 표상으로 추앙받아 마땅하다”고 강조했다.

당시 의용대를 소집해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한 642명의 재일학도의용군은 원산.이원상륙작전, 갑산․혜산진 탈환작전, 백마고지 전투 등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참전자 중 135명은 끝내 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이들의 빛나는 공로에도 불구하고 그 보상이나 처우는 미미했던 것이 사실. 심지어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된 후 재일학도의용군 생존자 중 일부는 일본정부의 거부로 일본 입국이 좌절되기도 했다.

재일학도의용군동지회는 “일본 정부가 1952년 4월 체결된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근거로 이들의 입국을 거부해 265명만이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었고, 나머지 242명은 조국 땅에 잔류하게 됐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재외동포들의 애국심을 대표하는 이들의 뜻을 기리는 움직임은 계속되고 있다. 지난 6월에는 경주에도 이들 재일학도의용군 전사자 및 행방불명된 이들을 기리기 위한 위령비가 세워졌다. 재일학도의용군동지회 역시 이들의 고귀한 뜻과 안타까운 죽음이 자칫 역사의 기억에서 사라질까 해마다 기념식을 치러 왔다.

이날 현장에는 김병익 재일학도의용군동지회장의 개회사를 시작으로, 대통령의 축하메시지가 낭독된 후 주요인사들의 축사와 격려사가 이어졌다. 애국청년들을 추모하는 자리이니만큼 헌시와 만세삼창도 식순에 포함됐다. 
행사를 마친 참석자들은 같은 날 오후 국립 서울현충원에 있는 재일학도의용군 묘역을 참배한 후, 오는 1일에는 재일학도의용군동지회 회원들과 그 가족들이 안장돼 있는 천안 ‘망향의 동산’ 위령탑 광장에서 합동 위령제를 가지며 호국영령들의 충혼을 기릴 예정이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