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체류자 추방이후 몸살앓는 조선족사회];“서울 맛보니 마음 붕떠 일손 안잡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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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체류자 추방이후 몸살앓는 조선족사회];“서울 맛보니 마음 붕떠 일손 안잡혀”
  • 조선일보
  • 승인 2003.12.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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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6일 저녁 8시, 가로등 불빛 하나 찾을 수 없는 짙은 어둠을 뚫고 옌지(延吉)시 하북거리의 한 우중충한 아파트 4층으로 들어갔다.
지난 3월 불법체류자 단속에 걸려 강제귀환한 최모(40)씨.
그러나 이곳 생활 2개월 만에 부인과 이혼한 뒤 직업도 없이 75세 노모에 얹혀 살고 있었다.
“서로 떨어져 산 지 오래돼 부부의 정이 식었던 거죠.
그동안 내가 부쳐준 돈으로 살던 아내가 내가 쫓겨 돌아오니까 이번에는 자기가 ‘위장결혼’해 한국 가겠다며 집을 나갔어요.
어쨌든 서울 맛을 보고 나니 여기 생활에 영 적응이 안 됩니다.
사실 한국에서 별로 돈을 벌지 못했어요.
내가 한국으로 들어갈 때 브로커에게 주기로 한 5만위안도 채 갚지 못했죠.
그렇다고 여기서 싼 임금에 일할 기분은 들지 않고….
한국정부의 단속에 따라 불법체류자 신분의 중국동포들이 속속 본국으로 귀환하고 있다.
법무부에 따르면, 올해 출입국관리법 위반으로 본국에 되돌아간 중국동포 불법체류자 수는 7949명.
지난 9월 1일부터 11월15일까지 계속된 ‘불법체류 외국인 자진출국기간’ 동안 돌아간 중국동포 수도 5800여명에 이른다.
다시 찾은 고향에서의 이들 삶은 명(明)과 암(暗)이 극명하게 교차한다.
귀향자 중에는 한국에서 벌어온 돈으로 성공적인 기반을 닦은 이도 상당하다.
지난 8월 귀향한 이웅춘(63)씨가 그런 경우다.
그는 사고로 두 다리의 신경이 마비된 아들을 위해 용정시 영성툰에 20만위안을 털어 ‘토끼농장’을 마련해줬다.
이씨는 “한국에서 고생해서 벌어온 돈을 헤프게 날릴 수는 없다”며 “한국땅에서 돈벌게 해준 한국 동포에 대해 늘 고맙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반면 다른 한쪽에는 마음을 잡지 못한 채 술과 도박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있다.
아예 가정이 파탄난 경우도 적지 않다.
그들의 삶은 한때 자신의 터전이었던 곳에서 정착하지 못한 채 흔들리고 있다.
지난 6월 귀환한 중국동포 박모(41·헤이룽장성)씨.
지난 4년간 꼬박꼬박 돈을 부쳤지만 돌아와 보니 부인은 집에 없었다.
다른 남성과 살림을 차려 가버린 것이다.
그 남성의 부인 또한 한국에 돈벌러 나갔다고 했다.
박씨는 “가족이 더 유복하게 살기 위해 서울로 돈벌러 떠난 결과가 가정의 파탄”이라고 말했다.
박씨의 한 이웃은 “한국에서 돌아온 조선족들은 달라진 환경에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해 애써 벌어온 돈을 헤프게 쓰는 경우가 많다”며 “돈이 떨어지면 다시 한국으로 나가면 된다는 식이다”고 말했다.
이런 속에서도 조선족 사회의 한국바람은 좀처럼 잦아들지 않고 있다.
지난 97년 4월 한국으로 나간 뒤 올해 초 옌지로 돌아왔다는 김모(여·43)씨.
이번에 벌어온 20만위안(1위안은 한국화폐로 약 150여원)으로 87㎡(약 27평) 크기 아파트를 장만했다는 그녀는 “한국남성과 결혼해 다시 한국으로 들어가려 하는데 6개월째 비자가 안 나와 미칠 지경”이라며 머리를 감싸쥐었다.
김씨는 위궤양이 심한 데다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허리를 제대로 펼 수 없어 귀향을 택했지만 끝내 이곳의 삶을 참지 못했다.
소개업체를 통한 ‘재혼’으로 다시 한국행을 모색하고 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끝까지 버틸 걸 그랬어요.
돌아와 보니 4년 이상 한국에서 불법체류하고 있는 조선족은 대부분 귀국하지 않았어요.
한국생활을 경험한 많은 중국동포들은 한국 정부에 대한 불신감을 숨기지 않는다.
한국 정부의 오락가락하는 외국노동자 정책이 조선족 사회 안에 각종 불법과 비리를 낳고 있다는 것이다.
옌지시에 사는 장모(60)씨는 “자진신고하고 출국하면 재입국시 어떤 규제도 받지 않는다고 해 돌아왔는데 비자신청이 계속 불허되고 있다”며 “이런 식이라면 불법체류 경력이 없는 여권으로 바꿔 들어가는 수밖에 없지 않으냐”고 말했다.
이 때문에 신분증 위조 브로커들은 더욱 활개를 치고 사기 피해자도 속출하고 있다.
최근에는 “신학교 유학생으로 한국에 보내주겠다”는 구실로 옌볜·헤이룽장성 일대 조선족 30여명으로부터 1인당 2만~3만위안씩 받아내는 등 총 60만위안(약 1억원)을 뜯어낸 목사가 중국 공안에 붙잡혔다.
피해자는 대부분 7만위안씩 하는 경비가 없어 한국행을 주저하는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요즘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중국동포들의 국적회복운동은 이곳 조선족 사회에서도 초미의 관심거리다.
중국 정부는 한 달여 전부터 헤이룽장성·선양 일대의 중국동포들을 상대로 한국방송을 시청할 수 있는 위성수신기를 떼어가고 있으며, 일부 동포신문에는 국적회복운동 등과 관련된 보도가 금지되고 있다.
한 중국동포는 “서울에서 벌어진 우리 동포의 국적회복운동 때문에 우리가 피해를 보게 생겼다”고 말했다.
동북3성(중국)=최승현기자 vaidale@chosun.com

  
  
  [] 2003-12-23 () 03면 2250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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