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니바 신문 사건기사를 통해 본 한인사회 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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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니바 신문 사건기사를 통해 본 한인사회 10년
  • 오니바
  • 승인 2003.12.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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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니바 신문에 보도된 지난 10년동안 프랑스 한인사회에서 일어난 사건 사고들을 살펴보니 고국을 떠나 낯선 땅에 어떻게든 적응하고 살아야만 했던 사람들의 힘겨움이 느껴진다.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 외에는 힘겨움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지 못했던 사람도 있었고, 다른 사람을 속여 그 무게를 남에게 지워버리려 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었나 싶은 기이한 사건도 있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우리 누구나 그런 피해자가 될 수 있고, 심지어는 가해자도 될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이 모든 일들은  '우리' 공통의 과거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지난 10년 동안 한인사회의 사건,사고들을 돌아본 이 자리가 강물에 달집 태워 보내듯 과거를 섭섭잖게 대접해 보내면서 미래를 새로이 준비하는 자리가 되었기를 기대해 본다.

  불법 체류자로 유치장 신세  

  프랑스에 처음 도착한 외국인들이 겪는 가장 심각한 고충이라면  단연 집 구하는 일과 체류증을 만드는 일을 꼽을 수 있다. 따라서 오니바 지면에 실린 최초의 대형 사건 또한 체류증과 관련된 것이었다.  
  이보현(여, 26세)씨가 임시 체류증을 몇 차례 연장하면서 1년 이상 끌어온 체류증을 받기 위해 크레떼이 경찰서를 찾아간 것은 지난 95년 5월. 그러나 이씨는 그 자리에서 불법 체류자로 간주, 수갑이 채워진 채 유치장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이튿날 열린 재판에서는 6일 후 출국이라는 결정이 내려졌다.  이에 대사관과 유학생을 중심으로 <이보현 불법구속사건 유학생 대책위원회>가 즉시 결성돼 베르사이유 법정에 이의신청을 제기한 한편 변호사 비용을 위해 1만 6400프랑의 성금을 마련했다. 크레테이 경찰서는 재판 결과가 나오기 전 출국명령 집행을 위해 이씨의 집을 급습하는 무리수를 두기도 했다.
  결국 이씨의 출국 명령이 부당하다는 법정 판결이 내려졌지만 크레떼이 경찰서는 이씨가 등록한 베르사이유 보자르가 국립학교가 아니라는 어이없는 이유를 대며 체류증 발급을 계속 거부했다. 장기화 조짐을 보이던 이 사건은 엉뚱하게도 이씨가 11월 개인 사정으로 유학생활을 중단하고 귀국하면서 마무리된다. 이 사건을 통해 대사관과 한인회, 유학생들이 상호 긴밀한 협조 하에 신속하게 대처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오니바 21호는 이를 두고 "재불 교민사에 오래 남을 모범을 남겼다'고 평했다.

수면제 탄 술에 동사한 유학생

  96년 2월 레알 상가 내에서 유학생 이용우(남, 35세)씨가 숨진 채 발견됐다. 2주만에 붙잡힌 범인은 주거부정의 한 세네갈인. 그는 우연히 길에서 이씨를 알게 됐는데 술에 수면제를 타 이씨에게 먹이고 실신한 이씨의 돈을 빼앗아 그를 레알 상가 바닥에 방치해 버렸던 것. 결국 이씨는 추운 날씨로 인해 동사한 것이었다.

  모친 살해 후 세느강에 투신

  96년엔 교민들의 사망사고가 잇따랐다. 그 해 3월 세느강에 투신 자살한 황우열씨의 옆에서 머리가 없는 시신이 든  가방이 같이 발견된 엽기적인 사건이 있었다. 더 놀라운 사실은 그 시신이 황씨의 어머니였던 조문자씨로 밝혀진 것이다. 평소 정신착란 증세가 있었던 황씨가 전날 어머니를 살해한 후 함께 투신한 것. 특별한 직업 없이 18세 연상의 외국인 여성과 결혼했다가 자살 직전 이혼한 황씨는 어머니로부터 무능하다는 핀잔을 자주 들어왔다고 한다. 결국 가족간 갈등과 정신적인 문제가 빚어낸 비극이었다.  

보험 사기 사건에 4백여명 피해

  한인 사회가 좁긴 하지만 사람들이 얽혀 사는 곳이다 보니 사기사건이 빠질 수 없었다. 97년에 주불 한국 대사관의 회계담당 직원이 장부 조작을 통해 1억 6천여 만원을 횡령한 사건이 있었으며 그 해 9월에는 수많은 피해자를 낸 헬프 에뛰디앙 보험 사건이 있었다. 오니바 47호에 따르면 한인이 경영하는 보험중개회사 헬프 에뛰디앙은 프랑스의 보험회사 AGF를 상대로 한국인 고객을 모집해 수수료를 받아 왔다.
  사건의 발단은 97년 8월 AGF측에서 한국인 가입자 400여명에게 연체된 보험료를 내지 않으면 재산을 압류하겠다는 편지를 발송하면서 시작됐다. 헬프측이 AGF에 입금하기로한 40만프랑이 지불되지 않았던 것. 이미 헬프측을 통해 보험료를 지불했던 한인들은 헬프측에 해명을 요구했으나 납득할만한 설명을 들을 수 없었고, 헬프와 AGF 양측은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할 뿐이었다. 40만 프랑이 사라졌고 위조된 서류와 거짓 계약서까지 존재하는데  범인을 찾지 못해 결국 사건의 진상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이 사건은 97년 10월  AGF측이 기존 보험계약을 모두 유효한 것으로 받아들이기로 함에 따라 일단락된다. 그러나 98년 3월 오니바 54호는 이 약속마저 제대로 이행되지 않아 피해자들이 AGF 본사앞에서 시위를 벌인 소식을 전하고 있다.

  IMF 한파에 잇따른 불상사

  한동안 뜸하던 사망 사건이 IMF 위기를 맞아 고개를 쳐들었다. 99년 7월 오니바에 따르면 98년 한해동안 5명의 재불 한인이 병사하거나 자살을 택했고 99년에도 이런 추세는 계속된다. 스트라스부르그의 30대 유학생 노 아무개씨가 열차에서 실족사 하더니 명문 경영학교 인시아드의 박사과정에 있던 전수근씨가 세느강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박사논문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받는 중압감에 고국의 경제 위기가 주는 불안감까지 겹쳤던 것이다. 이런 불상사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7월에는 문화원의 박장열 문화관이 자택 베란다에서 추락사했으며 20여년간 파리에서 요식업에 종사한 이 아무개씨가 한국 방문중 심장마비로 숨지기도 했다. 99년은 고국의 경제 위기로 여행업과 요식업이 주를 이루는 파리의 한인경제가 큰 타격을 받은 데 이어 잇단 사망사건으로 뒤숭숭한 한해였다.

재불 한인들의 훈훈한 성금 마련

  99년 오니바 66호는 랑스에 살고 있는 30대 김 아무개씨가 아랍계 불량배 7명에게 강간을 당했다고 보도했다. 사건 직후 김씨의 고발로 범인들이 경찰에 잡히자 동료들이 보복을 하겠다며 김씨를 위협했고 이에 김씨가 오니바에 도움을 청해 온 것이었다.
  한인회를 중심으로 김씨를 돕기 위한 움직임이 일어났고 5733프랑의 성금이 모였다. 이 금액은 김씨가 랑스를 떠나 빠리로 거주지를 옮기는 비용으로 사용됐다. 또한 94년 10월 프랑스 한인회의 현판식 소식을 전하면서 한인회관을 구입하기 위해 재불한인들이 모은 성금이 4년동안 96만 프랑에 달했다고 보도했다. 이는 유로로 치면 15만 유로에 이르는 상당한 금액이다.

희대의 사기꾼,최석원 사건

  최석원 사건은 99년 2월 오니바 64호에 최초로 보도됨으로써 널리 알려지게 됐다. 이 사건은 한국에서 수배를 피해 도망친 범죄자가 5년여에 걸쳐 유럽에서 활동하며 사기와 절도로 생계를 이어간 놀라운 사건이었다. 최씨의 수법은 주로 민박집에서 여행객의 금품을 훔치거나 유학 온 여학생들에게 도와주겠다며 접근해 환심을 산후 수표나 카드를 절취.도용하거나 현금을 빌려 갚지 않는 방식이었다. 심지어는 루이뷔통 아르바이트를 하는 학생에게 가방을 대신 사주겠다며 접근,가방구입을 위해 받은돈 1만여프랑을 가로채 달아난일도 있었다.
  최석원은 파리에서만 두 번 체포됐는데, 첫번째는 유학생 김아무개씨가 오니바 신문을 보고 신문사로 알려온 것이 계기가 됐다. 그러나 99년 4월 15구 경찰서에서 법원으로 신병이 인도된 최석원은 증거불충분으로 이틀 뒤 석방되는데 이는 대부분 여학생인 피해자들이 피해 사실을 밝히길 꺼렸기  때문이다.
  체포와 석방을 전후해 최석원은 여러 차례 오니바로 전화를 걸어 자신과 관련된 진실(?)을 여러 시간에 걸쳐 털어놓기도 했다. 이 내용을 보도한 오니바 66호에 따르면, 95년 말 프랑스에 입국한 최석원은 96년 7월 기거하던 하숙집 주인을 강간한 혐의로 체포되어 97년 4월까지 감옥에서 지낸다. 그러나 피해자가 법원에 출두하지 않아 흐지부지 되고 최석원은 석방된다. 출소 직후 그는 98년 1월 한 여자 유학생에게 좋은 환율로 환전을 해주겠다고 속여 5백만원을 가로채고 캐나다로 도주한다.
  캐나다에서도 최씨의 '라이프 스타일'은 변하지 않는다. 고교 선배 정모씨에게 약 5만 프랑을 사기를 친 후 98년 7월 다시 프랑스로 돌아와 루이비통 사건을 성공시킨다. 이후 체포되는 99년 4월까지 최씨는 2건의 카드 도용사건, 1건의 2만프랑짜리 수표 절취 사건등을 일으키고 다음 범행 대상을 물색하던 중에 체포됐다. 석방 직후인 5월에 또 다시 한 유학생의 수표를 훔친 최석원은 99년 6월 20일 자신의 유일한 말상대였던 오니바에 다시 전화를 건다. 일본인의 여권을 훔쳤다면서 7월 5일 경 프랑스를 떠날 것이라고 예고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후 뜸하던 최석원의 이름이 다시 오니바 지면에 등장한 것은 2년이 지난 2001년 7월이었다. 이정현이라는 가명을 쓰며 밀라노와 파리에서 사기행각을 벌이고 있는 자가 최석원으로 추정된다는 보도였다.  밀라노의 한 한인 사업가가 400만원을 사기 당한 사건도 알려졌다. 아니나 다를까 한달 후 최석원은 또 한 번 파리에서 붙들리는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2001년 8월 16일 아침, 최석원은 몇 달간 유럽여행을 함께 다닌 배낭여행 여학생을 도와주기 위해(?) 새벽기차로 파리에 내렸다가 피해자 중 한사람인 김모씨와 정면으로 마주치고 격투 끝에 붙잡히게 됐다. 이미 인터폴의 수배를 받고 있던 최석원은 즉시 대사관으로 인도된다. 두 번째로 잡힌 그에게 프랑스 감옥이냐 고국의 감옥이냐는 선택밖에 없었고, 최석원은 한국으로의 소환을 선택한다. 2001년 8월 16일 저녁, 5년여간 유럽의 한인들을 속여가며 살아온 사기꾼 최석원은 그렇게 떠밀리듯 고국의 법정을 향해 떠났다.
    (손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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