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 전 장관 "한민족 정체성 주류진출 원동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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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전 장관 "한민족 정체성 주류진출 원동력"
  • 강성봉 기자
  • 승인 2010.08.20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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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외동포, 유목민의 피 다시 발현된 것”
▲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
지난달 23일 미국 시애틀에서 열린 제28차 재미한국학교협의회 겸 총회 개막식에는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이 기조 강연자로 초청됐다. 이 전 장관이 한글학교 교사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

이 전 장관은 자신이 명명한 ‘디지로그’ 등에 대해 그리고 ‘교사로서 재외동포 2세들의 창의성을 어떻게 북돋워야 하는가’ 등에 대해 열강을 했다. 강의가 끝나자 경청했던 한글학교 교사들은 기립박수로 이 전 장관에게 감사를 표했다.

시애틀 현지 인터뷰를 통해 우리시대 최고의 석학 이어령 전장관이 보는 한민족, 재외동포사회, 동포 교육에 대한 비전을 전한다. <편집자 주>


- 한글학교 교사들을 처음 만난 소감은?
미국의 한글학교 교사들이 재외동포 2세 교육을 제대로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청중들이 스폰지가 물을 빨아들이듯이 내 이야기를 그대로 빨아들이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강연을 여러 번 해봤지만 이런 체험은 드물다.

교사들이 미국 전역에서 왔다. 뉴욕의 플러싱 등 일부 지역에 밀집돼 살던 동포들이 미국 전역에 골고루 분포돼 있다는 걸 알게 됐다. 폐쇄적인 동포사회가 오픈된 커뮤니티로 가고 있는 증거로 봤다.

- 재외동포란 어떤 존재인가?
그 동안 한국인은 폐쇄적이고 정착적인 이미지가 컸다. 외국 나가는 것은 비정상이고 고향은 언제나 그리운 곳, 타향살이는 슬픈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원래 우리 민족은 인류가 신빙하기 아프리카로부터 이주를 시작한 이래 알라스카까지 대장정(Great Journey)을 해낸 끊임없이 움직이는 유목민족이었다.

지금 조선 500년 동안 발산 되지 않고 있던 유목민의 피가 다시 발현되고 있는 것이다.

조선후기부터 한국전쟁 직후까지의 민족의 이동은 슬픈 것,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에 들어와서는 진취적 이주가 시작됐다.

한민족의 DNA 속에 잠재돼 있던 유목민적 피가 분출되어 70년대 이후 중산층에서 창조적인 이민이 시작되고, 모험적인 사업 이민이 많아졌다. 그 결과 낯선 땅을 끝없이 개척하고, 더 나은 삶을 위해 적극적으로 선택하는 이민으로 그 양상이 바뀌었다.

한민족의 이민은 소수민족으로서 특이한 분포를 보이고 있다. 중국, 이태리의 이민은 특정지역에만 분포한다. 그러나 한민족은 남태평양의 외딴 섬, 이프리카의 오지까지 가지 않는 곳이 없다.

- 재외동포 사회는 어떻게 변모할 것으로 보는가?
10년 전만 해도 한인사회는 매우 폐쇄적이었다. 과연 타민족과 섞여서 살 수 있을까 걱정됐다. 1991년 미국 LA 폭동 때 강연을 했는데 그때의 동포사회는 매우 비관적(pessimistic)이었다. 한국인끼리 서로 멸시하고 모함했다. 생활 여건도 썩 좋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한국문화와 접근된 특이한 한인들이 나타나고, 한국인이면서도 현지사회와 융합된 글로벌 리더들이 출현하고 있다.

미국사회의 특이성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특히 미국에서 현지사회의 리더십을 가진 한인들이 늘고 있다. 한인 2세 3세에게 한민족의 정체성을 만들어 내는 교육을 잘 한다면 한국적이면서도 전 세계에 통할 수 있는 모델이 미국에서 나올 것으로 보고 있다.

- 복수 국적 허용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세계가 글로벌 사회로 빠르게 변모하면서 복수 국적(Multi-nationality) 생활자가 늘어날 것이다. 시대의 흐름이고 바람직한 모습이다. 복수국적을 갖는 것은 기회주의적인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다. 한국사회도 이 문제에 대해 관대하게 변하고 있다. 열린사회로 가는 것이다.

복수국적의 허용과 함께 이민관도 바뀌어야 한다. 우리는 지금 주거를 자유롭게 선택하는 글로벌 시대에 살고 있다. 한국에 살아야만 한국인이 아니라 어느 나라에 살든 한국인이다.

디아스포라적인 이민은 사라지고 있다. 난민으로 시작됐던 이민이 기회의 땅으로의 이민, 유목민 문화로의 이민, 삶의 한 양태로서의 이민으로 바뀌었다.

- 재외동포들이 한민족의 미래를 위해 어떤 역할 할 수 있나?
전통문화는 가족중심이다. 그러나 한국처럼 가족의 붕괴가 심한 나라는 없다. 출산율이 세계 최하로 떨어지고 외톨이, 싱글이 늘어 핵가족화 하면서 앞으로는 형 동생이란 말, 삼촌 이모 고모라는 말도 사용할 기회가 없어진다. 혈족 개념이 사라지는 것이다. 이제야말로 진정한 아이덴티티 크라이시스가 오고 있다.

한국에는 가족이 사라져 가고 있지만 동포사회에는 아직 가족살이가 남아 있다. 21세기 한국인의 삶의 전형이 한반도가 아니라 해외에서 만들어질 것으로 본다.

- 재외동포와 관련 현지화와 민족정체성 유지라는 딜레마를 어떻게 풀 것인가?
21세기는 논리적으로 합쳐질 수 없는 것들의 융합, 컨버전스(Convergence)가 가능한 시대다. 산업주의, 국가주의가 지배하는 시대는 불가능했지만 이미 우리는 현지화하면서도 민족정체성 유지가 가능한 시대에 살고 있다.

민족정체성을 명확히 갖는 것이 현지 주류 사회 진출에 오히려 더 유리하다. 다문화 사회 다가치가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정체성을 하나만 가지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개의 정체성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결혼한 여성은 한 남자의 아내이면서 아이들의 어머니이기도 하지 않은가.

- 재외동포 교육의 방향은?
한글학교라는 말은 문제다. 한국어에는 몽골어, 영어, 한자 등 다양한 언어가 습합돼 있다. 그러나 한글학교라고 문자 중심으로 사고하게 되면 배타적이 되기 쉽다. 이건 맞지 않다고 본다. 몇 만 년 간 한민족이 사용해온 말인 한국어를 아이들이 세종대왕이 만든 것으로 생각한다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

한국학교에선 영어도 가르칠 수 있고, 한자도 가르칠 수 있고, 몽골어도 가르칠 수 있다. 그러나 언어 중심으로 가면 국수주의로 흐르기 쉽다.

우리는 이미 민족문화가 자원이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시대는 고유한 것을 찾는 단계를 지나 전통문화를 확산하는 단계에 들어섰다. 우리 고유의 전통을 지키면서 이걸 어떻게 현대화할 것인가 고민해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민족에게 다섯 방위를 상징하는 색으로 오방색이 있다. 오방색을 사용해 디자인을 한다면 미국 아이들이 따라올 수 없는 전혀 새로운 디자인이 나온다.

한국학교가 언어 중심에서 탈피해 한국문화를 몸으로 익히고 체득할 수 있는 교육을 실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 동포사회와의 관계에서 한국 사회는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가?
한국은 외국유학 비율이 여전히 아시아에서 최고 수준이지만 일본은 외국유학이 줄고 있다. 외국유학을 갔던 사람이 귀국했을 때 일본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도 그런 시대가 올 수 있다.

한국사회가 변하지 않으면 재외동포 사회는 변하지 않는다. 국내의 폐쇄성이 없어져 사회 전체적으로 외국에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동포사화와 모국이 함께 발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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