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정-임광빈 목사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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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임광빈 목사 인터뷰
  • 송옥진 기자
  • 승인 2003.12.1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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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0만 중 1000명만 동포인가
땅으로 떨어진 '우수한 소수민족' 중국동포의 자긍심 되살린 임광빈 목사
광주에서 눈뜬 민중목회자의 길, 조선족 복지선교센터 소장 임광빈
아직도 농성중인 중국동포들의 친구, 임광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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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월 1일로 재외동포법 개정을 요구하는 중국동포들의 농성이 17일째를 맞았다. 부시의 이라크 깜짝방문처럼 노무현 대통령이 조선족 교회를 다녀간 뒤, 조선족 동포의 국적회복을 요구해온 서경석 목사가 지도하는 서울조선족교회는 이미 농성을 풀었다. 노대통령의 방문으로 조선족 동포 문제가 모두 해결된 것처럼 언론은 떠들었지만 그 사건과 무관하게 점점 추위가 다가오는 이 12월에도 재외동포법개정을 위한 기독교 추진위원회, 재외동포연대 등 주요 동포단체들과 중국 동포들은 여전히 ‘농성중’이다.
그 농성장 한켠을 지키고 있는 것은 조선족복지선교센터 ‘임광빈’ 목사다. 신학교를 나와 외국 유학갔다오고 ‘인텔리전트 신학자’가 되겠다던 그의 꿈은 80년 광주에서 깨졌다.
“너무 처절해서 양심에 걸렸다. 유학을 접고 사회참여적인 신학생으로 살았다”고 말하는 임목사의 스승은 책을 통해 알게된 함석헌, 안병무 같은 우리나라 민중신학의 태두들이다. 그는 광주민중항쟁 이 후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서울지역신학대학원생 신학연구반 모임 등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광주민중항쟁의 신학적 조명’이라는 화두를 들고 전국 대학, 지역 고등학생 등을 대상으로 강연도 하고 학생운동을 지도하는 재야 기독교인이 되었다. 87년 6월 항쟁 때는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에서 활동했다. 현 KNCC 회장 오충일 목사도 이때 함께 활동한 친구다. 88년부터는 KNCC 인권위에서 간사이자 사무국장 대행으로 활동했다.
“한해에 300건 이상의 시국사건에 변호사를 선임하고 법률구조활동을 했다. 9월 노동자 시위가 한창일 땐 용역깡패와 구사대에 의해 차마 입에 담지 못할 폭행을 당하고 미쳐버린 노동자 사건을 다루기도 했다”고 회상한다.
정권이 바뀌어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생기고 임목사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심사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당시 내가 담당했던 사건들을 심사하니 감개무량하더라. 역사의 변화를 보게되니 즐거웠고 힘이 났다”고 말한다.
그가 처음 목회를 시작한 것은 90년 가을이다. 처음에는 새로운 변화에 일반교인들도 함께 할 수 있도록 교인과 공유하는 사회활동을 고민했다. 그러다 2000년 3월 중국 연변에 답사를 가게됐다. 그곳에서 그는 무너지는 조선족 동포사회를 보게 됐다. 피폐한 농촌사회는 파산지경이었고 탈북동포들이 중국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임목사는 “선교차원이 아니라, ‘조선족이 통째로 위기다’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한다.
귀국한 그는 손이 닿는대로 국내에 입국한 동포들을 만나 상담하면서 동포, 신학대 교수, 4~50대 목회자들과 함께 동포문제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2000년 10월 조선족 복지센터는 그렇게 문을 열었다.
“동포들을 만나는 일부터 시작했다. 무엇보다 조선족 동포들의 미래를 그리고 희망을 갖게 도와주는 게 급한 일이었다”고 말한다.
한국에 들어와 대부분 노점상, 가정부, 파출부, 일용직 등 우리 사회의 하층민으로 일하던 동포들은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잃어갔고 중국사회에서 ‘우수한 소수민족’으로 대우받던 자긍심도 잃고 있었기 때문이다.
“희망을 갖고 존경받는 동포상을 만들기 위해 장학금 사업을 시작했다. 사기피해를 당한 동포 가정 아이를 학교에 보내기 위한 사업으로 지금까지 약 3억 위안 정도를 중국으로 송금했다”고 말한다.
국내 입국하려다 사기 피해를 입은 중국 동포는 약 3만명. 가족까지 치면 10만명을 넘어선다. 사기는 조선족의 경제기반을 흔들고 가정파탄을 일으켰다. 하루아침에 집을 잃은 아이들은 학업을 중단해야 했다. 장학금 사업은 동포들의 가슴에 희망과 자부심을 갖게 했다.
임목사는 “동포들 스스로 자존심을 회복하고 한국에서 얻은 마음의 병을 치유해나갔다”고 말한다. 조선족복지선교센터는 초기부터 지금까지 동포들의 힘으로 운영되고 있다. 임목사는 이를 ‘치열한 과정’이었다고 말한다. 6개월동안 400명의 동포가 모였고 한국에서 조선족 동포의 정체성문제를 새롭게 제기했다. 또 조선족동포 문제를 구조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동포들 스스로 동포법 개정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동포들은 처음에는 조선족이 왜 추방당하는지도 몰랐다. 법에 의해 동포로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기까지 2000년 12월부터 동포법 개정을 연구했고, 동포들 모임인 조선족연합회 준비위원회를 구성하게 됐다”고 말한다.
임목사는 ‘민중의 힘’을 믿는 사람이다. 그런 그에게도 동포들의 변화는 ‘폭팔적’이었다. 지난 26일 시위에는 조선족연합회 준비위 동포 한사람이 중국동포 80명을 동원하는 인맥과 운동력을 과시하면서 1000여명의 동포가 모여들기도 했다. 처음에는 민간이 정부 정책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조차 못하고 불법체류 단속에 겁을 먹던 이들이다.
임목사는 “파출부라는 인식에서 동포법 개정의 주체로 존재 자체가 바뀌었고 자아를 깨닿았다. 중국을 가려다 짐을 풀고 동포법 개정운동에 나선 사람까지 있다”고 말한다.
중국동포들은 지난 10월부터 지금까지, 어쩌면 동포법 개정 시한인 12월 31일까지 계속 싸울 것이다. 그리고 임목사는 이미 이 싸움은 이긴 것이라고 말한다.
“이미 법은 개정됐다. 이제는 한국땅, 중국땅에서 조선족 동포가 어떤 모습으로 살지, 그것을 그리고 있다”고 말한다.

박스)국적회복이 아니라 동포로 인정해달라는 것뿐
박스기사 제목)국수주의로는 국제화시대 살아갈 수 없어
임광빈 목사가 보는 동포문제의 핵심, 민족, 자본문제
동포문제 해결없이 세계화는 없다
원정출산하면서 중국동포는 왜면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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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바람이 새어들어오는 기독교 100주년 기념회관 1층 로비 농성장에서 중국동포들은 이제 익숙한 목소리로 “조선족도 동포다”, “자유왕래 보장하라”고 외친다.
그 한켠에서 임목사는 “동포들이 원하는 것은 국적이 아니라 추방안당하고 돈을 벌어 돌아가는 것”이라고 전한다. “오히려 집에 갈 수 있는 사람을 부러워 한다. 자식들이 중국에서 공무원을 하고 있고 당원으로 살고 있는데 한국에서 살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동포들은 단지 ‘동포차별없이 인정해달라’는 것이다. 더 어떤 조치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한국과 중국을 오갈 수 있도록 동포자격을 인정해달라는 것이다. 재외동포법은 90년대 해외자본을 유치하기 위해 만들어져 ‘돈’을 가진 부유한 동포만 동포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임목사는 “정부는 가난한 중국 동포들이 한국으로 한꺼번에 많이 몰려온다고 하지만 이는 시행령을 통해 비자발급 시기를 조절하면 되는 것이다”고 주장한다.
지난 11월 11일 국무회의를 통과한 동포법 개정안에 대해 그는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150개 국가에 우리 동포들이 나가 살고 있다. 그 중 왜 중국과 구소련지역 동포만 동포가 될 수 없는가?”라며 “중국도 화교, 화인을 인정하고 있는데 중국정부가 반대해 동포문제를 건드릴 수 없다는 건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조치다”라고 비난한다.
임목사는 “혈육과 동포를 인정하라는 것이다. 할아버지, 아버지 고향에 성묘할 권리를 달라는 것이지 국민이 되겠다는 것이 아니다”고 말한다.
그는 또 서경석 목사가 지도하는 조선족동포국적회복운동에 회의적이다.
“서목사도 국적회복이 대안이 아니라는 것 알고 있었다. 단지 농성을 풀 명분이 필요했고 대통령의 방문이 그 명분을 주었지만 현실적으로 해준 것은 없다”고 지적한다.
노대통령이 약속한 것은 호적이 있는 사람에 한해 국적회복신청자 접수를 받고 12월 31일까지 추방기한을 연장한다는 것이다.
임목사는 “이 조치는 실제로는 혜택이 전혀 없는 조치다”라고 강하게 비판한다. 현재 200만명의 중국내 조선족 동포 중 한국에 거주하는 사람은 30만명가량이다. 이 중 국적회복신청을 한 사람은 5천5백명인데 국적 회복에 필수인 호적이 있는 동포는 그 중 1~2%에 불과하다는 지적이다. 정부는 조선족 동포 200만명 중 불과 1100명만 동포로 인정하겠다는 것이다.
임목사는 “국적회복은 200만 중국 조선족의 희망도 아니고 합의사항도 아니다. 중국 56개 민족 중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아온 조선족 동포의 체면을 깍아 동포사회에 치명타를 입히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동포문제를 포함한 이주 노동자 문제의 핵심은 경제논리에 있다고 본다. 한국정부, 기업, 국민이 저임금의 이주 노동력을 사용하기 위해 ‘연수생’제도를 운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동포들의 노동생산성은 약 76%라고 한다. 임금의 76%만 지급하고도 똑같은 노동력을 쓸 수 있는데 ‘동포’로 인정하고, 이주 노동자를 ‘노동자’로 인정하면 노동3권을 비롯한 권리를 주게되고 결국 임금을 올리게 될 거라는 논리다”라고 지적한다.
임목사는 또 “UN 이주노동자의 인권규약에 따르면 장기 체류한 이주 노동자는 가족도 데려와 살수 있다”면서 우리 정부에는 이주 노동자에 대한 정책이 없다고 비난한다.
임목사는 “이제는 다민족 공생사회다. 지금 세상에 ‘순결성’이란 의미가 없다. 원정출산까지 하면서 다민족을 거부하는 것은 웃기는 얘기다”라며 정부를 강하게 비판한다.
그는 “독일, 호주, 캐나다는 외국인 노동자를 통해 자국 경제 발전을 이루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법과 상식에 맞게 정책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임목사에 따르면 동포법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지 않고 장기화 되면서 체류중인 중국 동포들이 정신적, 신체적으로 여러 가지 병을 앓고 있다고 지적한다.
“체류기간이 길어져 이산가족이 되고 부부관계도 소원하고 아이들 교육문제도 심각하다. 당장 체류중 강도 높은 노동에 타 이주 노동자들과 달리 중장년층리라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고 있다”고 전한다. 또 “불법체류자로 살면서 인간성이 파괴되고 비굴함이 몸에 배거나 자기 자신을 비하하는 경우까지 있다”며 안타까와 했다.
민중 속에서 신학을 하고 운동을 해온 그는 동포법 문제가 해결되면 동포문제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이 소원이다. 동포의 근원에 대한 정리가 안되어 오늘날 동포가 ‘문제’시 되었기 때문이다.
임목사는 “이주노동자, 파산농민으로 해외에 이주하기 시작한 것이 ‘동포’의 시작이다. 다시 이주노동자로, 파산농민으로 모국으로 돌아오는 문제를 민족과 자본문제로 새롭게 조명하고 싶다”고 말한다.
세계화라고 말하면서 정작 동포문제에서 우리나라는 국제주의적 시각을 갖지 못했다. 독일인 이한우도, 프랑스인 이다도시도, 러시아출신 축구선수 신의손도 한국인으로 사는 세상이지만 한국말을 쓰고 쌀밥을 먹는 조선족 동포는 동포가 아니란다. 언제까지 한국에서 혈통주의로 인종차별을 계속할지 임목사의 마음속엔 동북아를 떠도는 우리 동포들의 모습이 가슴아프게 새겨져 있다.(26.6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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