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 시대, 진정한 소통을 위한 피터 브룩의 <11그리고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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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문화 시대, 진정한 소통을 위한 피터 브룩의 <11그리고 12>
  • 서지영 연극평론가
  • 승인 2010.06.03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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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연출가이자 현대연극의 거장 피터 브룩 Peter Brook(1925~)의 작품 <11그리고 12>가 이달 17일부터 20일까지 LG아트센터에서 공연된다.

올해 나이 여든 네 살의 피터 브룩은 현존하는 가장 위대한 연출가이자 현대연극의 살아있는 신화로 불리며 현대연극정신의 표상으로 자리하고 있다.

피터 브룩의 내한 소식은 한국의 연극 팬들을 흥분시켰다. 그러나 고령의 몸으로 먼 여행은 무리가 있다고 판단했는지 돌연 방한을 취소했다. 세기의 거장을 한국에서 편히 볼 수 있는 기회는 놓쳤지만 작품을 통해 그의 예술적 숨결은 고스란히 전해지리라 기대한다.

피터 브룩은 1925년 런던에서 태어났다. 1960년대 로얄셰익스피어컴퍼니에서 연출가로 명성을 쌓은 후 영국 뿐 아니라 프랑스, 미국 등 세계무대를 돌며 70편이 넘는 작품을 올렸다.

일찍이 셰익스피어의 전통연극에 대해서 “점잖고 가식적인 연극으로는 관객과 진실한 소통을 할 수 없다”며, 전통을 전복시킨 동시대 현대연극의 개척자 대열에서 그는 연극예술계에 획을 긋는 새로운 실험들을 시도했다.

인습을 타파한 그의 무대는 무례하기 그지없었다. 신체성과 현장성을 추구한 그의 연극은 충격과 전율 그 자체였다. 물론 이 같은 전위연극은 브룩 이전에도 1920년대 후반부터 많은 연출가들이 줄곧 시도해 왔다. 그러나 실험적 현상이라는 것이 의례 그렀듯 특정시기의 유행으로 발생했다가 새로운 변화의 흐름을 다시 타기 마련이다.

하지만 브룩은 달랐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 연극은 형식적인 우아함을 추구하기 시작했는데 브룩은 이 같은 분위기를 피해 다시 ‘뭔가 다른 것’을 찾아 도발적인 시도를 감행한다. 브룩의 연극인생 64년은 변화와 실험의 연속이었다.

영국의 극장에서 예술논설위원으로 활동했던 마이클 커스토는 브룩의 연극 작업에 대해 “연극의 불순물을 걸러내는 ‘증류의 과정’을 거쳐 껍데기를 벗기고 핵심을 걸러내는 일”이라고 설명한다.

이 말은 50년대 난해하고 복잡했던 브룩의 연극이 점점 정적이고 단순화된 이유를 납득시켜 주었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 중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생략’과 ‘삭제’는 브룩이 작가와의 갈등을 피해갈 수 없게 만들었다.

영국의 극작가 데이비드 헤어는 자신의 작품에서 강조 되어야 할 사회적 배경을 브룩이 의도적으로 뺀 것에 대해 불만을 품고 브룩 연극의 시대참여성 부재를 걸고 넘어졌다. 데이비드 헤어는 브룩의 연극은 ‘참여를 두려워 한 보편적인 히피의 떠벌임’이라고 비하했다.

그 당시 영국의 연극은 정치적 이슈를 보여줌으로써 존립의 가치를 인정받았다. 그러나 브룩은 이를 거부했다. “논쟁이나 정치 팜플렛 같은 논증적 연극보다는 진정성이 담긴 움직임이 연극에서 더 중요하다”는 게 그의 견해다.

연극적 움직임을 통해 인종차별이라는 가장 고통스런 주제를 드러낼 수 있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더 필요한 일이라고 브룩은 주장했다. 데이비드 헤어의 작품에 나타난 시시콜콜한 사회적 배경은 브룩에겐 결국 사족이었던 셈이다.

브룩은 정치적인 입장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시대가 요구하는 것을 제대로 읽어내고 그것을 무대 위에 질문으로 던졌다. 무엇보다도 국적을 초월하여 전 인류에 호소하는 그의 감수성은 영국문화도 프랑스 문화도 뛰어 넘어 여러 개의 문화가 화학적으로 결합된 국제적 문화로서 무대에 존재하도록 했다.

그가 지금 몸담고 있는 파리의 뷔페 뒤 노르극장은 어느 특정 문화에 소속되지 않는다. 그들에겐 모국이 따로 없다. 그곳은 영토를 초월한 지역이다. 브룩은 이곳에서 다국적 배우들과 함께 작업해 왔고 이번에 한국에서 공연하는 <11그리고 12>에도 영국과 미국, 이스라엘, 스페인, 프랑스, 말리 출신의 다국적 배우 7명이 출연한다.

<11 그리고 12>는 아프리카 수피즘의 지도자 티에르노 보카(1875~1939)의 생애를 다룬 작품이다. 당시 수피교는 그들의 예배의식의 과정에서 기도를 11번 해야 하는지, 12번 해야 하는 지를 두고 극렬한 분쟁을 벌이게 된다.

보카는 두 종파의 화해를 위해 상대편 지도자 하말라를 만나게 되는데 그와의 격렬한 신학적 논쟁 후 그들의 믿음에 확신이 있음을 깨닫고 상대편의 입장을 이해하게 된다. 그로인해 보카는 자신의 종파로부터 추방당하고 결국 죽음을 맞는다. 교리상의 분쟁으로 시작된 갈등은 당시의 프랑스 식민정책이 개입하면서 영토분할지배라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으로 이어진다.

브룩은 이 작품을 종교문제나 종교비판으로 끌어가기 보다는 식민지배에 억압된 자들의 삶의 방식에 초점을 맞추었다. 티에르노 보카의 종교와 정치, 사상을 통해 분쟁과 폭력으로 점철된 인류의 역사 속에서 관용의 의미를 재발견 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브룩이 연극을 통해 전통과 현대, 그리고 서로 다른 문화를 넘나들며 궁극적으로 지향해 온 것은 결국 우리자신과 타인에 대한 이해이다. 브룩은 평생을 인간의 소통에 대해 내기를 건 것처럼 작업해 왔다. 매우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배우들과 관객들이 브룩의 연극을 접하면서 자기들의 이야기처럼 공감하고 문화 간의 차이를 넘어서 보편적인 인류의 형태가 존재함을 느끼고 있다. 이번 공연이 한국의 관객과는 어떤 교감을 나누게 될지 무척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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