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사태 때 한명 북으로 살아갔다”
상태바
“1.21사태 때 한명 북으로 살아갔다”
  • 정리=강성봉 기자
  • 승인 2010.03.08 11:1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희망포럼 - 1.21사태의 실상]


김신조 목사
이글은 지난달 19일 덕성여중 강의실에서 김신조 목사가  ‘1.21사태의 실상’이라는 주제로 행한 129번째 희망포럼의 강연 내용을 요약 정리한 것이다.    
<편집자주>


필자는 공비였다. 공비가 목사가 된 것은 세계역사에 필자가 유일하다. 필자의 임무는 박정희 전 대통령을 살해하고 한국을 공산화하는 것이었다.

필자는 이런 무시무시한 임무를 띠고 내려와 여러 사람을 죽고 다치게 했음에도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해준 대한민국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늘 가슴 속에 품고 살고 있다.

1.21사태는 남북관계에서 6.25 이후 가장 큰 사건이었다. 대통령을 살해하기 위해서 대통령이 살고 있는 코앞까지 무장한 북한의 특수부대가 진출해 청와대 경호대와 교전을 했으니 사실상 이 싸움에서는 남이 이미 진 것이다.

1.21사태 당시 북한에는 10만명의 대남 특수부대 요원이 있었다. 1968년 1월11일, 독신이고 남한에 침투했던 경험이 있는 사람으로 10만명 중에 선발된 최정예 요원 31명은 철책선을 끊고 휴전선을 넘었다.

이 때 우리를 본 사람이 있었다. 국군 초병이었다. 그는 우리를 쏘지 못했다. 두렵고 목숨이 아까웠던 것이다. 새벽 네시에 우리는 임진강을 건넜고, 국군 초소를 통과했다. 각각 20Kg의 무기를 짊어지고 있었음에도 시속 12Km의 속도로 후방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가지고 있던 비상식량은 이틀만에 다 떨어졌다.


철책을 넘은 이튿날 우리는 법원리 초록골에 숙영했다. 이날 나무꾼 네 사람이 산에 나무를 하러 왔다가 우리를 발견했다. 우리는 그들에게 25사단 군인이라고 얘기했으나 그들은 우리가 적임을 바로 알아봤다. 눈빛이 다르더라는 것이다. 눈에 독기가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들을 죽이지 않고 살려준 것이 첫 번째 실패 원인이었다. 죽여야 되는데 살려 준 것이다. 이유는 단순했다. 죽이는 건 간단하지만 죽이고 나서 땅에 묻어야 하는데 언 땅을 파기가 다들 싫었던 것이다.

지휘관들을 모아놓고 회의를 했는데 ‘네가 파라’ 서로 미뤘다. 한달만에 모아 놓은 부대이다 보니 지휘체계가 바로 서지 않은 것이다. 할 수 없이 ‘이 나라가 해방되면 군수를 시켜주겠다’고 나무꾼들을 포섭해 입당시키고 풀어줬다. 그것이 착각이었다. 나무꾼들은 내려가자마자 군에 신고를 했던 것이다.

완전군장을 하고 밤에만 이동을 해서 북한산에 도착한 것이 1월 20일 밤. 우리는 21일 새벽, 비봉 암자에서 민간인 옷으로 갈아입고 서울 세검정으로 내려왔다. 당시 현재의 파크호텔 자리에 청와대 쪽으로 가는 버스 종점이 있었다. 시동을 걸어놓고 막 떠나려는 버스가 한 대 있었다. 필자는 총조장에게 ‘이 버스를 타고 가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총조장은 ‘도보로 들어간다’고 결정을 했다. 총조장과 필자 사이에 알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두 번째 실패원인이다.

이 때 버스를 타고 들어갔으면 성공할 가능성이 매우 컸다. 전투는 상황에 따라, 또 어떤 지휘관을 만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도보로 간다’고 할 때 필자는 ‘이 작전은 실패다’라고 마음을 접었다.

자하문 고개를 지나 청운중학교 후문에서 최규식 종로경찰서장을 만났다. ‘누구냐’고 검문을 해서 CIC(보안대)라고 답했다. ‘어디 갔다 오냐’고 해서 ‘작전 갔다 온다’고 했다. 이때 최 소장은 우리의 정체를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옷 안에 뭐가 있느냐’고 옷을 들추려 할 때 그대로 총격을 가해서 최 소장은 현장에서 순직했다.

청와대쪽으로 진격을 하다 청와대 정문을 200m 남겨두고 당시 전두환이 이끌던 청와대 경호대와 맞닥뜨려 교전을 하게 됐다. ‘청와대쪽으로 가도 죽고, 북으로 가도 죽는다.’ 필자는 이렇게 판단하고 남쪽으로 가다 서북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경복고등학교 마당에서 인왕산으로 올라간 것이다. ‘박정희를 죽이고 내가 죽는다면 나는 죽어도 좋다. 그러나 임무수행도 못하고 내가 왜 죽어야 하느냐’는 생각이었다. 무악재에서 군에 포위를 당하자 손을 들고 나왔다.

체포되고 나서 송추쪽 한 학교에 사살된 무장공비 시체들을 모아놓았다고 해서 확인을 하러 갔다. 시체가 29구밖에 없었다. 생포된 필자를 빼고 한구가 모자랐다. 한 사람은 살아서 돌아간 것이다. 당시에는 이러한 사실을 밝힐 수 없었다. 살아간 사람은 돌아가서 ‘김신조가 배신하는 바람에 작전에 실패했다’고 말해 본인은 이중영웅이 되고, 나중에 4성 장군까지 됐다는 소리를 들었다.

반면에 필자의 어머니 아버지는 청진공설운동장에서 1만여명의 군중 앞에서 공개처형 당했다. 삼촌 고모까지 죽임을 당했다. 가족이 월남한 김만철씨가 우리집 건너편에 살았다. 김씨가 내 부모가 총살되는 것을 직접 봤다고 말했다. 필자는 그 때 돌아버렸다. 한 동안 방황을 했으나 기독교에 귀의해 다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1.21사태 때 31명이 넘어왔는데 국군 5개사단 5만명과 전 경찰이 동원됐다. 당시 남한에는 공수부대가 하나밖에 없었는데 1.21 사태 이후 13개로 늘어났다. 그것으로 부족해서 각 군단에 특공연대를 만들었다. 필자가 전쟁을 막으려면 그렇게 해야 한다고 조언했기 때문이다.

북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남한을 공산화하는 것이 그들의 기본 목표다. 이 나라가 공산화되면 도망가야 할 사람이 많다. 인민재판 받아 총살당할 사람이 많다. 그런 일이 우리 역사에 다시 일어나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할 기초를 닦아놔야 한다. 나 같은 비극이 다시 일어나면 안 된다. 북의 인민에게도 자유를 줄 수 있는 날이 속히 와야 한다.



주요기사
이슈포토